원망과 감사 출15:22-27. 2015년 7월5일 맥추감사주일 낮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7-05 |
조회: 1351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절은 구약의 3대 절기의 하나인 맥추절을 계승한 절기입니다. 유대인들의 추수감사절이었던 맥추절은 히브리어로 ‘거두어 수확하는 절기’라는 뜻으로, 수확을 가능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로 드린 축제였습니다. 동시에 인생의 모든 것은 오직 여호와께로만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고백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재무장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모작을 하는 우리나라에서 맥추감사절은 보리수확을 감사하는 절기로 지켜왔습니다.
이 감사절을 맞이해서 우리가 감사에 대해서 깊이 말씀을 나누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감사를 잘하면 영적으로 상당히 건강하고 성숙한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감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 비해 감사를 잘 아는 사람이 그만큼 건강하고 성숙합니다. 영적인 면 뿐만 아니라 육적인 면에서도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건강하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아는 이야기지만, 우리 몸의 내장을 통제하는 자율신경계 안에 부교감 신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학계에 계시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칭찬하는 마음으로 계속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부교감 신경계를 자극해서 건강을 촉진시킨다고 합니다.
자연히 감사를 잘 안 하는 사람에 비해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건강도 좋아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감사는 100번 해도 손해 볼 것이 없고, 하면 할수록 영과 육에 유익을 가져다 주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감사에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살게 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감이 생기게 되자 감사가 점점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하려면 기도를 연습하고 배워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깊이 알려고 한다면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감사도 배우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믿음 좋은 주변 형제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눈여겨보면서 배우고 연습해 보십시오. 그러면 드디어 나에게도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며 나아가 습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배워서 습득한 사람은 훨씬 더 감사가 풍성하고, 깊이 있는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못한 일에 감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성공할 때야 어느 정도 감사할 수 있지만, 실패할 때 진정한 감사를 드리기란 웬만큼 배우며 연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힘듭니다. 이익을 많이 남겼을 때는 저절로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손해를 입었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평소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굉장한 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다른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법을 배우십시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 종살이하던 그 고통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갈 때, 수르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행복의 절정 감을 맛본 순간이 홍해를 건널 때였을 것입니다. 죽음의 절망 앞에 섰던 그들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갈라진 바다를 육지처럼 건널 때의 그 스릴과 감동이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그 백성들이 다 그 바다를 건넜을 때 바다는 다시 닫히고 그들을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는 물속에 수장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지도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에 겨워 노래하기 시작했고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이런 기쁨과 감격이 계속 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 한 평생 행복하게 살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푸른 초원이 아닌 수르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사흘 길을 걸어가게 합니다. 장정만 60만 명이니까 적어도 아내와 어린이를 합하면 족히 200만 명이 넘습니다.
광야의 사흘 길을 상상해 보셨나요? 광야에는 풀 한포기 조차 자라기 힘든 곳입니다. 가끔 광야 가운데 서 있는 유일한 나무들이 보이는데 싯딤나무입니다. 성소의 법궤를 만들 때 쓰여진 나무입니다. 광야에는 뜨거운 태양이 있습니다. 보이는 산은 모두 바위뿐입니다. 그리고 어디에도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곳에는 독성이 강한 뱀이 있고, 전갈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홍해를 건넌 후에 이런 광야로 들어갔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하루 이틀이야 그냥 버틴다고 해도 삼일이 되도 끝없는 광야길이라면 한 마디로 황당했겠죠? 그런데 사흘 뒤에 마라라는 곳에 이릅니다. 드디어 물이 보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갑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물도 없는 광야로 인도 하실리 만무하지!’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고 다시 저 푸른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을 지을 기대를 가지고 물을 마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난리가 났습니다. 물은 있는데 쓴물입니다. 마실 수 없는 독성이 강한 물입니다. 원래 ‘마라’ 라는 말은 ‘쓰다(bitter)’ 라는 뜻입니다. 물은 마신 사람들이 복통을 일으킵니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와 함께 쓰러집니다. 기대에 찼던 백성들이 술렁입니다. 그때 인간의 마음에서 본능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원망입니다. 불평입니다. 기대가 클수록 원망과 불평은 큽니다. 여기 24절 상반 절에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기를” 원망했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백성들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10가지 재앙과 기적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나일 강이 피로 물들었고,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고, 마지막에는 멀쩡한 장자가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던 자들입니다. 이 공포 속에서도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이 통과한 것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그 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서 홍해를 건넜으며, 애굽의 군인들이 그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불기둥, 구름기둥도 보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아무리 답답하고 내 이성에 동의되지 않는 이유가 있어도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비하는 일은 오늘로 끝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런 쓴물로 이 고통, 이 어려움이 있어야만 합니까?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마라의 고통을 안겨주셨는지 설명합니다. 25절에 보면 “그들을 시험(test)하셨다” 여기서 시험은 나쁜 길로 이끌기 위한 ‘유혹(temptation)’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 그들을 훈련하시고자 함입니다. 학생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시험입니다. 시험의 목적은 선생님이 학생들을 골탕 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고 있는지 측정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인지 시험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몸은 자유의 몸이지만, 아직 그들의 모든 것은 노예의 근성을 벗어나지 못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노예의 특징은 항상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드림이 없습니다.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애착이 대단합니다.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그것이 거지 의식이요. 그것이 노예의 삶입니다. 이것을 벗어버리기 위해 광야의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출에굽기를 보면 이런 광야의 연단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16장에 가면 신광야에 갑니다. 먹을 것이 다 떨어집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불평합니다. 17장에 가면 르비딤에 이르렀습니다. 역시 물이 없었습니다. 또 원망합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말씀해주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만 탓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으로부터 해결받으라는 것입니다. 마음 바꾸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살려는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다는 마음을 하나님께 나아가면 방법이 있다는 마음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전부라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미래를 보는 마음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해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앞길에는 홍해도 있고, 마라의 쓴 물도 있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신광야도 있고, 반복되는 르비딤도 있습니다. 그럴 때 환경 탓만 하고 원망만 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은 극단적인 상황을 통하여 우리가 바뀌길 원합니다. 사람은 극단적 상황을 만나지 않으면 잘 바뀌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애굽의 농경 생활에서 광야 생활로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노예에서 자유민으로, 애굽의 이방신 문화에서 하나님의 의지하는 광야문화로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마음은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도태되고 죽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도 똑같은 환경을 만났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하는 데 백성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자신이 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여기보면 기도로 주께 나아와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눈 앞에 있는 문제와 환경만을 보고 원망, 불평합니다. 모든 문제에는 해답이 있습니다. 아무리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풀 수 없는 문제라도 그 문제를 낸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는 정답이 있습니다. 마라의 쓴물은 하나님이 내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아야 정답을 맞출 수 있습니다. 아무리 원망하고 불평해도 해답은 찾지 못합니다. 내 방법과 노력으로도 안됩니다.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해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문제를 내셨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해답이 나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바로 땅에서 매인 것을 하늘에서 풀게 하는 비법입니다. 하늘의 비밀을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할 때 모든 문제의 정답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지도자 모세는 백성들의 원망 앞에서 부르짖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Moses cry out to the Lord.’입니다. ‘하나님! 어렵습니다. 도와주세요.’ 이런 기도가 아닙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홍해의 기적을 보여주신 하나님! 이젠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히스기야 왕처럼 인생을 건 기도가 아니었을까요? 멸망의 기운이 가득한 조국 유다를 바라보며 감옥에 갖혀 애통해 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33:2-3절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
3)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일을 깨닫기 위해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맹인 바디매오는 주님 앞에서 소리쳤습니다(막10장).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습니다. 그래도 그는 더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아멘!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제적으로 많이 힘드시죠! 자녀의 일로 사업의 일로 마음이 곤고하시죠! 제주변에 어려움 가운데 있는 많은 분들을 많습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불의한 재판장 앞에 서 있는 홀로된 여인의 심정으로 주님 앞에 나와 부르짖으십시오. 여러분의 염치, 체면 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부르짖을 때 응답하십니다. 포기하지 말고, 낙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문제를 푸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모세가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이 방법을 지시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막대기를 물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의 중요한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하고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쓴물을 마시고 백성들이 복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쓴물의 독을 해독하려면 적어도 설탕을 뿌리든지, 소독약을 뿌리든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해법은 겨우 막대기를 던지라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도저히 해답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하나님 지금 절 놀리세요?’라고 비웃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걸려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해법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설탕이나 소독약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막대기 하나로도 얼마든지 물을 단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이성 안에, 내 경험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놓습니다. 내 생각만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참된 신앙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아멘!으로 순종하십시오. 기도응답의 열쇠는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입니다. 자기 뜻을 강화할 뿐입니다. 주님이 가라하면 가기 싫어도 가야 합니다. 주님이 포기하라 하면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해 내 이기심 때문에, 내 욕심 때문에 붙잡고 있기 때문에 하늘의 더 큰 것을 받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신정아씨가 미술관 큐레이터로 복귀를 했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났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이 신정아씨로 인해 한동안 우리 사회가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예일대 박사라고 학력을 위조해서 대학 교수도 하고 광주비엔날레 예술 감독도 했고, 고위공직자와 스캔들도 있었죠. 4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절망적인 과정들을 쭉 피력을 했습니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칠 때쯤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정아씨의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도대체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나라는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분이 자신의 과오를 함축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해선 안 될 사랑을 했고, 돈으로 학위를 사려 했다. 땀 흘려 한걸음씩 가야하는데 잘못된 지름길을 선택했다. 성실하지 못했고 내 인생관이 잘못돼 있었다.” “죽도록 창피했다 죽도록 반성했다… 이제는 살고 싶다. 절박하게!” 그 인터뷰를 보면서 본인이 말했던 그 잘못된 지름길을 추구했던 그런 인생관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치 저는 그 인터뷰 기사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허무한 길을 걷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호소하는 듯한 소리로 들려졌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삶에 주어진 기회 생각 없이, 또 잘못된 생각에 빠져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고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늘 성령의 도우심을 갈망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이 광야 아닌 삶이 어디 있습니까? 이 한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라의 쓴물로 범벅이 되어 원망과 불평의 삶이 아니라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변한 것처럼 우리의 삶에 감사의 단물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주의 십자가 보혈이 있는 곳에는 감사가 찾아옵니다.
자! 우리 모두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샘 열둘과 종려 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자, 이 정도면 사막의 광야에서는 환상의 오아시스라 할만하지 않습니까? 사막에서는 물 샘 하나도 귀한데 물샘이 무려 열두 개, 그늘을 만드는 한 그루의 종려나무도 귀한데 무려 일흔 그루의 나무들, 자 이런 놀라운 오아시스가 불과 10km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 마라에서 그들은 불평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왜 입니까? 단순합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늘 감사가 일상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은 우리를 위해 예비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엘림을 우리는 몰랐어도 하나님은 미리 엘림을 아시고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엘림은 마라를 통해서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라에 주저앉아 계신 성도들이 계신가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곧 우리는 엘림에 도달할 것입니다.
감사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듭니다. 감사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영혼이 병들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그것은 감사입니다. 신앙인은 감사하는 데서 자라가고 감사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감사는 신앙인의 영성을 가늠하는 최고의 기준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감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크리스천이 되시기 바랍니다.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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