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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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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소서 사6:5-13절 2015년 7월12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7-12 | 조회: 1498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인 ‘쇼펜하우워’가 한번은 공원 벤취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어느새 어두워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철학자는 일어설 줄 몰랐습니다. 그때 마침 공원 관리인이 문을 닫기 위하여 경내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늙수그레한 남자 한 분이 공원 벤치에 석고상처럼 앉아 있는 것입니다.

관리인은 말했습니다.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습니다, 관리인은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이 봐요, 당신 내 말이 안 들리나요? 도대체 당신 어디서 왔어요?.” 노 철학자는 그때서야 꿈속에서 깨어난 것처럼 고개를 들고 눈을 치켜 떴습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디서 왔느냐구요? 아아,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는 인생을 알지 못해서 깊은 한숨을 쉬면서 큰 탄식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사는 날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사는 날들이 짧습니다. 우리의 생애를 돌아보면 허무하고 짧은 인생이구나 하는 사실들을 실감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웃시야가 죽던 해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웃시야는 유다의 역대 왕 중에 가장 많은 인기와 덕망을 한 몸에 받았고 주변나라까지 소문난 왕이었습니다. 그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장장 52년이나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그 당시에 유다 는 작은 영토를 가진 나라였지만, 웃시야의 지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주변 나라들이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기도 했고 그의 명성이 애굽에까지 미쳤습니다(대하26:8). 한마디로 탁월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성품도 정직했고, 그는 신앙심이 깊은 왕이어서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명성이 높아지고 힘이 생기자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분수를 잊어버리고 제사장이 하는 일까지도 자신이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역대하26:19). 그는 왕 위에서 쫓겨나 죽을 때까지 별궁에서 거하고, 병중에는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그는 문둥병자라 하여 열왕들의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외딴 곳에 묻혔습니다. 가장 나라의 번영을 가져 왔고, 강력안 통치 기반을 닦았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것도 평범한 죽음이 아니라 문둥병에 걸려 죽은 사건은 백성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이사야 역시 자신의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니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조국이 어떻게 될까 얼마나 근심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답답한 심정으로 성전에 들어가 기도합니다. 바로 그때에 이사야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게 됩니다. 이 성전에서 그의 생애가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날,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 위에 앉아 계셨고 주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그분의 주위에 모시고 서 있기도 하고 날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찬양을 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천사들의 찬양으로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고 성전 안에는 연기가 가득했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이사야의 마음에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두렵고 떨리기만 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갈까?” 여기에 대해 이사야는 무엇이라 반응을 하니까? 6절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 달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3가지 의미가 담긴 고백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하늘과 그 영광으로 충만한 땅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사야는 한때 자신에 대해 대단한 자신을 가지고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영광의 하나님을 자신의 눈으로 볼 때, 그의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4, 5절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겨우 그가 내뱉은 소리는, 자기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을 보았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의 부정함을 즉각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로다!” 다시 말하면 ‘부정한 입술을 제하여 주소서’ 하는 것입니다. 입술은 인격의 표현입니다. 입술이 부정한 사람은 그 인품 전체가 부정한 사람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입술입니다. 일생을 두고 쉬지 아니하고 사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지어낸 말을 함부로 합니다. 약속한 말을 번복합니다. 했던 말도 안 했다고 합니다. 모함하고 헐뜯고 거짓된 말로 진실을 위장합니다. 남을 비난하고 근거없는 말, 확인되지 않은 말을 빠르게 합니다.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즐겨합니다. 모이기만 하면 남을 비하하고 흉을 보고 허물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험담이라는 것은 탈무드에 말하면 삼자를 죽인다 그래요. 하나는 말을 듣는 사람을 죽여요. 내가 험담을 말하게 되면 그 사람 마음이 그만 상하고 무너지거든요. 또 하나는 험담의 대상이 죽어요. 이 내용에 있는 거 내가 지금 험담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 죽어요.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험담하고 있는 내 자신이 죽어요. 이걸 잊지 마세요. 어두운 말, 부정적인 말, 더러운 말을 하지 말 것은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을 죽이고 있다고 내 심령이 지금 황폐해지고 맙니다. 그리고 삶이 긍정적이지 못한 채 늘 삐뚤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았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회개해야 할 사람은 타인이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처럼 성전 깊숙이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나고 추한가를 금방 알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뵙기 전에는 제 아무리 눈이 밝고 똑똑하고 사리가 밝다 해도, 자기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정신적, 영적 소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이사야는 의의 태양이시며, 진리의 빛이시며, 생명의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사야는 숙연히 자기의 죄를 탄식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만한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오늘 이사야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너무 끔찍하고 답답해서 나는 망했다. 다같이 망했다하고 슬퍼하고 회개할 때에 탄식 할 때 스랍 중에 하나가 재단 숯불을 손으로 집어다가 이사야 입에 댔다 그랬습니다. 그것을 갔다가 입에다 대고 지져버렸어요 거기다. 성경에는 없지마는 타버렸어요. 우지직 하고 지져버렸대요.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제단 숯불이 네 입에 닿았으니 이제 네 죄는 다 사함 받았느니라”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단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요. 제물이 거기서 타 죽지 않습니까? 네 입술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님은 우리의 부정한 입술을 태워서 깨끗케 해주십니다. 입술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요, 일생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잘못, 나의 실수, 나의 고집, 나의 정욕, 나의 부정을 성령의 불로 태웁시다. 우리의 더럽고, 때묻고, 냄새나고, 추한 죄악을 성령의 뜨거운 불로 태웁시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인격자, 완전히 변화된 거룩한 성도로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듬어서 쓰심을 믿었기에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전능자, 창조주이십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셔서 쓰시기로 했다면 다 하나님의 복안(腹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각 없이 부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부족한 자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훌륭한 일꾼이 됨을 기억하십시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 영국 런던의 어느 다리의 싸늘한 오후 시간이었습니다. 그 다리 위에서는 어느 노인의 낡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노인은 구걸을 위해 낡은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 놓인 모자 위에는 동전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지나가던 신사가 걸음을 멈추어 노인이 바이올린을 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바이올린을 좀 보자는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노인은 아무 생각 없이 이 신사에게 바이올린을 건네줍니다. 이 신사가 바이올린을 조율하더니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합니다. 이내 아름다운 선율의 멜로디가 주변에 울려 퍼집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모여 들고 동전, 은전, 금전이 수북이 쌓여갑니다.

그때 많은 관중 사이에서 어느 한 사람이 외칩니다. “파가니니다, 파가니니!” 낡은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이 신사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였던 것입니다. 낡고 보잘것없는 바이올린이었지만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손에 들려지자 최고의 음악을 연주한 것입니다. 우리도 전능자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기만 하면, 우리가 아무리 능력이 없고 보잘것없어도 멋진 인생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사역의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 인생, 내 삶을 누가 잡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붙잡고 사용하시면 내 인생은 걸작의 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세상의 학문이, 재물이나 인기가 내 인생을 붙잡고 연주하면 내 인생의 소리는 그것밖에 안 될 것입니다. 누가 나를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께서 자기를 써 주심을 날마다 감사했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여! 어찌하여 나를 초지에서 불러내어 이처럼 존귀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나이까” 푸른 초장에서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을 하나님이 붙잡고 연주하니까 그의 생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연주자요, 우리는 악기입니다. 우리가 뛰어난 악기는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별 볼일 없는 양치기라 할지라도 모세처럼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한 아이의 도시락밖에 되지 않는 5병2어도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의 도구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강하신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면 얼음장처럼 차가운 사람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나를 보내소서라는 말은 사명자로서 자원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는 왕족출신입니다. 그는 가만히 있으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름에 응답하면서부터 그는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험한 선지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몸이 반 토막 나는 죽음의 자리에 서지만, 그의 이름은 빛난 별처럼 세상 앞에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마음이 실린 자발적 행동에는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자발적 결단에는 마음이 실리게 되어 강력한 힘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발끝에 체중을 실어 걷어차는 운동입니다. 그러니까 공이 멀리 날아가는 것입니다. 권투는 온 몸의 힘을 주먹에 싣는 운동입니다. 그러니까 상대가 주먹 한방을 맞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힘이 실렸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에나 마음이 들어가면 일이 다 아름다워집니다. 음식에도 마음이 들어가면 맛이 울어 나옵니다. 그림에도 마음이 들어가면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명작은 마음이 들어가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짝퉁은 마음도 정성도 혼도 뜻도 들어가지 않은 물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강한 이유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실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능률이 나타나고 힘든 일도 기쁘게 하고 그 결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힘드십니까? 마음이 실리지 않아서 억지로 해서 그렇습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면 그 일처럼 힘든 일도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변화도 기적도 성과도 감동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신앙도 마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형식화 됩니다. 그래서 형식신앙은 깊이가 없고 열의가 없고 내용이 없고 향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후8:3-4절에 보면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주어진 사명을 행할 때 인간적인 열심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마음으로 즉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열심으로 자원함으로 봉사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맡은 자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자원하지 않고 부득이 함으로 봉사하면 부담이 되고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겠다고 자원하여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은혜만 받고 살아가는 자세가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을 가지고 봉사하며 살아가는 자가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김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억지로라도 그 일을 담당할 수 있도록 환경을 몰아가십니다. 그러나 자원하여 한다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주실 상급도 크실 것입니다. 군대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맞고 할래, 그냥 할래?”라는 고참들의 압박이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이왕이면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섬기게 되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를 부르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계신 이 성경책이 어떤 책입니까?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은혜 앞에 그 사랑 앞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 앞에 섰다면 주님께서 ‘누구를 보낼꼬 하실 때, 나를 보내소서!!’라는 주의 부르심 앞에 순종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7.8월은 교회가 훈련과 삶을 함께 나누는 달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우리는 이제 주님 앞에 받은 사랑을 가지고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그 눈물 한 방울이 그 섬기는 사랑의 향기가 결코 헛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교회의 신비를 알고 살아가십니까? 복음의 능력을 알고 살아가십니까? 성령충만의 맛을 알고 살아가시느냐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지 못한 복음을 듣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 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주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달라는 그것, 그것이 인생의 최고의 기쁨이고 보람이고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그것 가졌다는 행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세계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화를 간직한 행복! 이게 예수 믿는 삶이 아니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쇼펜하우워가 절규한 우리 인생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이, 탄식은 하나님을 모르게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삶의 진정한 가치를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빚어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자신의 몸과 생명을 다 바쳐 살 정도로 귀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 예수님이 우주 최고의 보화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생을 다 바쳐 예수그리스도를 소유합니다. 그 보배이신 주님을 향하여 헌신하고 봉사합니다. 일생을 다 바쳐 그 분을 예배하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내 오늘도 하나님께 쓰임받고 산다는 그석 하나 그것면 족합니다. 그것이 교사든 봉사든 선교든 우리는 주의 부르심 앞에 ‘나를 보내 주소서’!! 이 뜨거운 열정이 우리 가슴에 불타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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