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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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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한 일 빌1:12-18. 2015년 7월19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7-19 | 조회: 1346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도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네팔 현지를 다녀 왔고 그곳에서 지진으로 인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통증을 안고 들어 왔습니다. 지금도 계속 여진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한켠에서는 다시 일어나려는 삶의 의욕을 보이는 분들을 보고 한편으로 희망도 보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이런 지진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고 고난을 잘 대처해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게 될 때 당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주의 은혜를 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제가 지나간 옛 퀴즈를 한 가지 내면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어보시고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한번은 교통사고가 나서 한 버스에 타고 있던 많은 승객들이 안타깝게 죽고 부상을 당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퀴즈입니다. 그 사고에서 희생당한 사람들 가운데 이런 억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사람은 원래는 96번 버스를 타야 되는데, 69번 버스를 96번으로 착각하고 탔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결혼식이 내일인데, 그 버스를 탔다가 안타깝게 희생된 총각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버스가 막 출발할 때 저 뒤에서 급하게 달려와 버스를 세워 겨우 버스를 탔다가 변을 당한 사람입니다. 네 번째 사람은 버스 안에서 졸다가 그만 자기가 내릴 정거장을 놓쳐서 한 정거장 더 가는 바람에 죽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들 가운데 누가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실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하는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웃기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지만, 결코 웃어만 넘길 수 없는 내용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모순과 불합리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가 하는 것을 냉소적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96번을 타야 하는데, 69번 버스를 96번으로 착각하여 탔다가 죽었다는 것, 내일 결혼식을 앞두고 행복한 삶에의 온갖 꿈과 희망이 부풀어 있는데, 그 마지막 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 이제 막 떠나는 버스를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 겨우 잡아탔는데, 하필이면 그 버스가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것, 삶이 힘들고 피곤하여 깜빡 졸다가 한 정거장 더 가는 도중에 그만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것, 정말이지 다 억울한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우스개 소리가 우스개 소리로만 끝나지 않고, 정말로 이런 비합리적인 사건들이,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성폭행하고, 부모가 아이들에게 약을 먹이고 차가운 강물에 던지는가 하면, 부모와 형제를 끔찍하게 살해하고도 조금의 반성도 없는 패륜아의 모습이 우리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 또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들이 서슴없이 행해지고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삶 속에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고 있다는데 우리의 말 못할 고민이 있습니다.

요즈음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일들을 당하고 있습니까? 메르스 여파로 인해 어려움은 없었는가요? 아마도 우리들 가운데는 기쁘고 즐거운 일 보다는 이렇게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 속상하는 일, 기가 막히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당하면서 탄식했던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속에서는 이런 질문들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왜 우리 가정이 이런 일을 계속해서 겪어야 합니까? 왜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부모에게, 자식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진실로 우리 모두에게는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이유를 몰라,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몰라 더욱 고통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때때로 너무도 억울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런 문제들을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해서 낙망하고 탄식하던 한 믿음의 사람의 고백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탄식의 소리가 아닙니다. 실망의 소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고백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귀한 깨달음의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대로 바울은 그 삶 속에서 참 많은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는 그가 당한 그 수많은 일들 속에서 한 가지 귀한 진리를 깨달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고백은 바로 “나의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진전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바울이 당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빌립보서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나의 당한 일”이란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아무런 죄도 없이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나의 당한 일”이란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차디찬 감옥 안에 있습니다. 12-18절까지 옥중에 있음을 의미하는 메임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매임이라는 헬라어 ‘데스모이스’는 문자 그대로 ‘쇠고랑’ 또는 ‘감금된 상태’를 말합니 /span>.

그것도 그냥 감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두 명의 간수들의 손과 같이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 밖에서는 다른 두 사람이 그를 24시간 내내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여러분들이 처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할 것입니다. 심하면 하나님을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제까지 관광하려고 소아시아 지방과 마케도니아 지방을 돌아다닌 것 아니잖아요? 나는 이제까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나를 감옥에 가두셔서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이러한 반응이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12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전파의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다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오히려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전”라는 말은 “프로코페”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나무를 찍어 가면서 앞으로 전진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로 군대에서 공병대가 앞서 나아가서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길을 놓거나 다리를 놓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번에 네팔의 수도가 카트만두인데 여기는 지진의 피해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도에서 7-8시간 차로 가야 있는 젤리꽃이라는 도시가 지진의 진원지가 되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땅에 건물더미에 묻혔습니다. 여기를 가는데 도로가 유실되고 길이 막힌 곳이 한 둘이 아닙니다. 저의 일행이 갈 때는 길을 뚫고 넓히느라고 장비도 없이 오함마로 산에서 굴러 내린 바위를 깨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이처럼 이렇게 뚫린 길로 나간다는 말이 진전이라는 말입니다.




바울 당시에 전 세계의 가장 막강한 군대였던 로마의 군대는 항상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공병대가 먼저 앞서 나가 장애물들을 제거하면서 도로를 닦았는데, 특별히 저들이 자랑하던 전차가 나아가는 길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뚫린 길로 로마의 전차가 행진해 들어가면 그곳이 곧 로마의 영토가 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럽에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까지 생긴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런 사실을 염두해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가 로마의 길을 잘 알지 않느냐? 저들이 계속해서 전차와 군대가 나아갈 길을 만들어 땅을 점령해 나아가듯이, 지금 너희가 걱정하고 있는 그 일 때문에, 즉 내가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오히려 복음의 대로가 열리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즉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됨으로 한번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곳에 복음을 위한 큰 길이 열리게 되었고, 복음의 새로운 영지가 확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새로운 영지가 어디입니까? 바울은 13절에서 그 복음의 새로운 영지가 어디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새로운 영지는 로마의 권력 중심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바울은 지금 시위대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위대란 바로 황제의 시위대, 즉 로마 황제의 경호를 맡은 친위부대를 말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로마 황제의 시위대는 엄청난 특권을 갖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유력한 집안의 자식들이었고, 로마정신에 투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호위부대이기 때문에 여기에 선발되면 급료도 두 배나 더 받고 남다른 조건에서 근무를 할 수 있었기에, 로마의 유력한 가문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시위대에 뽑히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 부대를 처음 조직한 황제가 바로 그 유명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였고, 보통 약 만 여명의 시위대 군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자기를 감시하는 사람들은 일반 로마 병사가 아닌, 로마 황실을 경호하는 출신성분이 뛰어난 사람들로서 어느 정도 일정 기간 동안 시위대 근무를 하면 로마제국의 지도급 관리로 발탁될 수도 있는 촉망받는 엘리트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바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은 비록 감옥 안에 있었지만< /span>, 그곳에서도 로마 제국의 최고급 엘리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들이 생겨났습니다.

빌4:22절을 보면, 바울이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안부를 전하는데 그 가운데 가이사, 즉 로마 황제 집안의 몇 사람들도 끼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시위대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결국 로마 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 즉 왕족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상황을 긍정적인 렌즈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옥에 갇히게 한 뜻을 깨닫고 그 안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증거함으로 결국 왕족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이번에 김선교사님이 세운 젤리꽃에 있는 ‘모던 네팔 학교’는 그야말로 힌두교사람들이 일색입니다. 교장이 크리스챤이지만, 자기의 신앙을 320명이나 되는 학생에게 이야기하기가 엄두가 안 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장이 전날 밤에 제 방에 찾아 왔습니다. 자기는 이 학교가 크리스챤 학교로 학교 방침을 세울 것인데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엄청난 결단입니다. 목숨을 건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일로 어떤 핍박이 있을 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진의 한 복판에서 그동안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각오를 이야기 합니다.

저는 내 생애 처음으로 마당에서 막4:31-32절의 겨자씨 비유를 전하고 예수만이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정말 정말 있는 힘을 다해 증거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마을이 생긴이래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진 때문에 모두가 희망을 잃었는데 이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학교 목표도 크리스챤 학교로 나아겠다는 교장 선생의 각오는 바로 바울이 가진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당한 일과 진전이라는 말씀을 함께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바울이 ‘당한 일은 적어도 그의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마냥 주저 앉지 않고 그는 로마의 병사들이 없던 길을 내는 것처럼 감옥에서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축구선수 호날두를 아시죠? 레알 마드리드 소속인데, 작년 한해 연봉과 기타 수입을 합쳐 8천만 달러(약 800억)를 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네팔 지진 때 85억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세이브칠드런이라는 NGO 단체‘에 기부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훈련을 해야 했는지 모릅니다. 남들 놀고 싶을 때 놀고, 남들 먹는 것 다 먹고, 그렇게 해서는 그런 유명한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죽을 것만 같은 고된 훈련도 묵묵히 참으며 견뎌내야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입니다. 아버지를 고치기 위해 노력 안해 본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포기하고 싶은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축구도 그냥 천재가 아닙니다. 참고 견디면서 훈련을 했기 때문에 오늘의 그들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아버지의 알콜 중독, 형의 마약 중독 그리고 가정을 돌보기 위해 어머니는 청소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런 고통의 가정이었습니다. 만약 가정의 비참함 때문에 그냥 주저앉았다면, 세계적인 축구스타로 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정말 겸손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다가가 자기의 아픔을 잊지 않고 그들의 상처를 끌어 앉는 삶을 산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오늘도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 이 땅의 주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그 일에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보는대로 살면 거기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감옥에서도 찬양합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관점과 긍정적인 관점입니다. 부정적인 관점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열 가지 중에 좋은 것이 아홉 가지가 있고, 좋지 않은 것이 한가지가 있을 때, 그 좋지 않은 한 가지를 물고 늘어집니다. 그리고 그 좋지 않은 한 가지에 목숨 걸고 난리를 칩니다. 아홉 가지의 장점을 가지고 있어도 아홉 가지의 장점은 보지도 않고 한가지의 단점을 물고 늘어집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사람은 열 가지 중에 좋은 것은 한가지이고, 좋지 않은 것이 아홉 가지일 때도 좋은 것 한가지를 보며 좋아합니다. 비록 아홉 가지의 단점이 보여도 한가지의 장점을 보며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줍니다.

어떤 회사에서 세일즈맨들의 능률이 오르지 않아 사장이 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사장은 귀퉁이에 까만 점 하나를 찍은 흰 수건을 세일즈맨들에게 펼쳐 보이면서 "무엇이 보이느냐"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까만 점"이 보인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자세히 보십시오.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까만 점밖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때 사장이 말하기를 "여러분! 까만 점은 이 구석에 하나밖에 없는데 왜 이 넓은 흰 바탕은 볼 줄 모릅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계속해서 무더운 여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합니까? 강마다 녹조현상이 일어나고 바다엔 적조가 일어나 환경이 죽어 가는데 이때 부는 태풍은 기존 시설물이나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익도 가져오기도 합니다. 태풍은 저위도 지방에서 축적된 대기 중의 에너지를 고위도 지방으로 운반해서 지구상의 남북의 온도 균형을 유지시켜 줍니다. 해수를 뒤섞어 순환시킴으로써 플랑크톤을 용승 분해시켜 바다 생태계를 활성화 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강과 바다를 뒤엎은 녹조현상을 완전히 없애줍니다. 하천의 썩은 오물을 씻어내며 더러움을 청소해줍니다. 대기를 순환시켜 맑은 공기를 가져다주고, 더위를 식혀주며, 물 부족 현상을 해소해 주기도 합니다. 부실공사를 드러내 보수하도록 해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고난을 좋아하겠습니까? 누가 힘든 삶을 기뻐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내 계획대로 일이 잘 풀려지지 않아 힘들어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건강이 좋지 않아 마음껏 일하고 싶은데 하지 못해 안타까워하지 않으십니까? 인생의 풍랑이나 갑작스럽게 닥친 고난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러나 이 시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어려운 환경과 역경 뒤에 숨어 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입니다. 저는 믿기는 우리의 환경과 여건이 아무리 어렵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바울의 감옥에 갇힌 상황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놀라운 복음의 진보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반드시 당신의 때가 되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동성교회 여러분, 혹 문제 가운데 있습니까? 고통 속에 있습니까? 그 문제가, 그 고통이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믿음으로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고통의 사건 속에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너희가 당하는 일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과 뜻하는 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담대하게 우리의 믿음의 무릎을 세우고, 믿음의 발걸음을 포기하지 마시고 힘차게 내 딛읍시다.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지금 내가 당하는 사건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음을 눈으로 바라보기를 축원합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갈 길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진전하는 삶으로 나아가십시다. 반드시 주님이 예비해 놓으신 축복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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