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갈림길에서 빌1:20-26절 2015년 7월26일 주일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7-28 |
조회: 1342
몇 해 전에 “삶에 대한 의지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라는 카피를 전면에 내세워 광고한 한 영화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기억을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한 남자가 홀로 산악 모험을 하던 중에 암벽에 팔이 끼어 고립되면서 127시간, 5일을 버텨 살아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당시 가진 것이라고는 산악 로프와 물 500ml, 칼뿐이 없는 상황에서 5일을 버티다 결국 암벽에 낀 팔을 스스로 잘라내고 생명을 구합니다.
뭐, 내용은 단순한데 아무것도 없는 스토리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이 몰렸습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불가항력적인 위험에 맞서 이겨내려는 ‘사투’는 정말 진한 감동을 줍니다. 가끔 끔찍한 재난을 겪는 과정가운데 그 어려움을 헤치고 나오는 모습은 그 어떤 것으로 설명이 안 되지만, 그 자체로 눈물을 자아내게 만드는 감동입니다. 이 산악인은 마지막 5일째 되는 때 결국 자신의 팔을 잘라내면서까지 보여주는 삶의 집념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지금 당장 내 팔을 잘라낼 것인가? 이대로 기다리면서 조금씩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삶을 향한 강렬한 용기를 발휘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할 것인가?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매스컴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 가운데 정말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자살소식입니다. 삶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 자신의 단 한번 밖에 없는 생명을 포기했겠는가 하는 생각도 납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진정 자살 할 정도의 용기가 있다면 생명을 선택하는 것도 생각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가질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사람도, 평생을 노력해도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할 정도의 대단한 자리에 오른 사람도, 죽어라 공부해서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학에 들어간 청년도 왜 그 부러운 목숨을 그렇게 허무하게 끊습니까? 정말 생명을 구해야 할 목사로서 가슴을 치며 통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삶을 향한 용기는 죽음보다 위대하고 큽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빌립보 서신을 기록한 바울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거의 4-5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 갇히거나, 혹은 온갖 고생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기간 동안에 매우 답답하였을 것입니다. 무려 5년씩이나 부자유스러운 몸으로 갇히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언제나 감옥의 문이 열릴 것인지, 아니면 그 감옥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인지, 아무런 기약도 없이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 같아 아마도 처음에는 바울도 상당히 괴로웠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 고 있는 순간에도 그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도 확실히 모릅니다. 오히려 그가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더욱 짙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여기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난 말씀이 21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죽게 될 경우와 석방되어 더 살게 될 경우 각각의 의미와 유익을 모두 숙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죽게 될 경우에 대해서 그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21절을 보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의 바울의 삶은 온통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그가 사는 유일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주와 함께하는 것이었고, 주와 함께함이 그에게는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죽는다면 더 이상의 고생 없이 온전히 주님과 함께하며 그를 더 충만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기에 죽는 것은 더 좋은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23절에서는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다"고까지 그의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한편으로는 석방되어 더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있고 그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살게 하시리라는 믿음이 보다 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25절에서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은 자기를 살려주실 것 이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믿음의 진보를 이루며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자기를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리하면, 사도 바울 자신은 죽는 것이 온전히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사는 길이므로 이 세상에서 계속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 달린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더 살게 하신다면 그의 뜻을 따라 변함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의 믿음의 진보를 이루며 주 안에서 기쁨이 넘치게 하는 일에 힘을 다하고 무슨 일에든지 그리스도의 사도 된 자로서 부끄러움이 없이 행하여 자기 몸이 죽든지 살든지 자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여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인생의 갈림길에서도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한다’는 이 고백은 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 중심하는 삶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는 지금 생과 사를 오가는 인생의 갈림길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도 인간적으로 왜 어려움을 좋아하겠습니까? 왜 힘듬 앞에 흔들림이 없겠습니까? 왜 아픔과 상처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 절망의 자리에서도 오직 자신의 감정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저와 여러분이 만약 이런 문제 앞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희망과 의욕에 넘쳐서 열심히 살고 있다가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가 덮쳐 올때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을 하며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누군지도 잊어버립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삶의 태도를 갖기도 합니다. 헛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은 자기가 행했던 모든 일들을 부정하게 되며 그것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합니다.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환경과 상황들을 다 던져버리고 싶습니다.
저 역시 그럴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죽어 가는 영혼이 살아나고 믿지 않던 영혼이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주님께 내 삶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다고 고백을 하며 삶의 보람과 의미를 느낍니다. 그러나 속상한 일이 생기고 나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금방 문제의 무게에 눌려 낙심하고 침체되어서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최선을 다하여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다한 사도바울에게 사형선고라는 절망적인 인생의 흔들림을 허락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흔들리는 역경을 주시는 이유는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생명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한 훈련임을 강조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망을 하시고, 징계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 과정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무려 광야대학에서 40년간이나 수학하게 하셨을까요? 바로의 압제 아래서 무려 430년이나 고통당한 그들에게 쉽고 편안하게 일주일에서 이 주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왜 40년이나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을까요? 신8:2절에 보시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을 낮추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섬기는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게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고생도 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배불리 먹고, 좋은 집에 살고, 소유가 풍부해졌을 때에 과연 하나님을 잘 섬길까 의문을 가지셨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40년간 광야의 여정을 통하여 그들의 교만을 꺾는 훈련을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너희들의 힘과 능력으로 차지하는 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만약 그들이 430년간 종노릇 하다가 한 달도 못돼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차지했다면 하나님을 잘 믿고 섬겼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축복을 주시다뇨? 일평생 은혜를 잊지 않고 목숨 바쳐 주님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물론 고백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살기는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들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얼마나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까?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지금 먹고 살만하고, 자식들도 잘 자라고, 경제적으로도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헌신합니까?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내가 잘 해서 이렇게 된 것처럼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어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첫 사랑의 열정도 사라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습관적인 신앙으로 떨어집니다. 이런 상황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때때로 광야라는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고생시켜서 넘어뜨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교만함을 깨뜨리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들이 역경의 터널을 지날 때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바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습니다. 몸이 병들어 입원해보면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습니다. 건강할 때는 내 사지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워 있어보면 내 몸이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사형선고 같은 인생의 고통을 허락하셨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바울은 세상의 모든 성공 조건을 갖추고 살던 자입니다. 최고의 혈통에, 학벌에, 로마의 시민권까지 갖춘 성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도 얼마나 말을 잘했던지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떠받들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쯤 되면 그가 얼마나 교만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더 혹독한 인생의 흔들림의 가시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도 몹시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12:9)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들은 바울은 크게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왕이면 안 아프고 건강하게 복음전하는 것이 좋지 불편한 가운데 사역하는 것이 무엇이 좋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깨닫습니다. 자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연약할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가 약할 그 때가 강함이라”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貫萱 흔들림의 순간은 바로 나의 교만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그 흔들림을 통하여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바로 그 흔들림의 시간은 저주나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채워 가시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의 변장된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주인이 애지중지하게 키우던 낙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실수로 낙타가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낙타를 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때 마을에 있는 지혜로운 스승에게 낙타를 구하는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웅덩이 앞에 왔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삽을 가지고 땅을 파서 웅덩이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본 주인은 소리를 치며 낙타를 웅덩이에 파묻어 죽일 거냐며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흙을 퍼부었습니다. 한참이 지나자 놀랍게도 낙타는 웅덩이에 던져진 흙을 밟고 무사히 나오게 됐습니다.
우리 인생길도 낙타처럼 웅덩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아무리 몸부림쳐도 헤어나지 못하는 인생의 웅덩이가 있습니다. 그 때는 내 힘을 빼야 합니다. 내 모든 방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흙덩이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잠깐은 죽는 것 같고, 견디기 힘든 아픔의 시간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밟고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웅덩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철저한 저주와 같았고, 실패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 죄와 사망과 사탄의 모든 계획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역경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 주님은 여전히 동행하십니다. 손을 내밀어 건져주십니다.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믿음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기적이 보이지 않아도 사망의 자리에서 우리를 이미 우리를 건져주셨고, 앞으로 건져주실 주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은 가능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언제 이런 능력이 나타날까요? 내가 약할 때입니다. 나는 질그릇처럼 깨어질 수 밖에 없는 미련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입니다. 내 인생이 흔들림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바라볼 때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가난함을 부유함으로 채워주십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시고, 갈 수 없는 곳에 가게하십니다. 뛸 수 없는 것을 뛰게 하십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할렐루야!
정채봉씨가 쓴 '모래알 한 가운데서'란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젊은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날기 시험에서 낙방한 독수리/
짝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독수리/
윗 독수리로부터 할큄 당한 독수리/"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만큼 상처가 심한 독수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죽느니보다 못하다는 데 금방 의견이 일치했다. 이때 망두에서 파수를 보던 독수리 중에 영웅이 쏜살같이 내려와서 이들 앞에 섰다. "왜 자살하려고 하느냐?" "괴로와서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어요." 영웅 독수리가 말했다. "나는 어떤가? 상처하나 없을 것 같지? 그러나 이 몸을 봐라." "이건 날기 시험 때 솔가지에 찢겨 생긴 것이고, 이건 윗 독수리한테 당한 자국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다. 마음의 상처자국은 헤아릴 수도 없다." 영웅 독수리가 조용히 말했다. "일어나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들이란 이 세상에 나자마자 죽은 새들이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사랑하는 여러분! 상처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상처는 치료하지 않으면 몸을 썩게 만듭니다. 육체의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의 상처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깊어지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지 않은 채 두면 마음에는 쓴 뿌리가 자라게 됩니다. 잘못하면 절제력을 상실한 채 분노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마음의 평안을 상실하고, 피해의식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상처를 잘 다루면 상처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은혜의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은 상처로 얼룩진 몸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처를 진주로 바꾸셨습니다. 상처를 통해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의 독을, 상처를 치유하는 약으로 바꾸셨습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약은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약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상처를 예수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예수님은 상처를 치유하는 의사이십니다. 상처 때문에 고통 중에 사는 사람도 있지만 상처 때문에 더욱 잘 된 사람도 많습니다. 상처는 잘 치유되면 상처가 없는 사람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과 비교해 보면 그는 그렇게 행복한 인생을 산 것 같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먹는 즐거움도 없었고, 특별한 취미생활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내 삶을 바쳤고, 이제는 이 땅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주시는 상입니다.” (디모데후서 4:6-8) 이 말씀은 그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을 다 산 후에 후회 없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인생의 갈림길에서 내 생각 내 주장을 겸손하게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뜻 앞에 다시 한번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일어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