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그것을 주께로 가져오라" 마14:13-21절 2015년 8월 5일 -황중기 목사-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8-04 | 조회: 1219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서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들으셨을까요? 얼핏 보면 12절의 세례요한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속상해서, 혹은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이 예수님에게까지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멀리 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들으셨던 내용은 14장의 1-2절 말씀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기록된 다른 복음서를 살펴보면, 곧 마가복음 6장 6-16절, 또는 누가복음 9장 9절을 보면 제자들의 전도여행으로 인하여 많은 기적이 나타나고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술렁거렸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누군가’ 하는 것이 연일 사람들의 이야기 소재거리였습니다. 이에 헤롯은 자신이 목 베인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헤롯은 ‘예수,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군고’하며 예수님을 만나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헤롯의 부르심에 응하거나 백성들의 관심을 외면하고 오히려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습니까?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전면으로 이제 나타나셔서 일하시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지금의 대세는 예수님이며 ‘예수님, 당신은 이제 떨 때가 되었습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헤롯과 독대를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헛기침만을 했다고 해도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님에게 더 쏠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안에서 조용히 안식하며 묵상하는 것을 훨씬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목회자들이나 영적인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이목과 인정, 칭찬에 초연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분명한 목표와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 9절에서 11절을 보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줄 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죄인들과 동일시하며 자신을 깊이 낮추신 것입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한 기적을 행할 때가 아닌 자신을 낮추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13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떠나서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왔다고 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이렇게 열심을 내는 것일까요? 예수님에게서 소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구원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먼 걸음을 마다하지 않고 이 고을 저 고을에서부터 모여 들었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아 이친구들 너무하네, 눈치들이 저렇게 없어서. 오랜만에 조금 쉬려고 하는데 틈을 안 주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오늘은 그냥 돌아들 가고 내일 오시오’ 한다고 해서 아무 문제될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오셔서 큰 무리를 보시고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백성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의 헬라어 원어는 “에스프랑크니스쎄”인데 이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무엇이 그렇게 불쌍했을까요? 먼저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 백성들을 볼 때 안타까우셨습니다. 특히나 지배민족인 로마의 수탈과 헤롯의 학정아래 백성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가끔 우리가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북한 지역 주민들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영양 실종 걸린 아이들, 키가 작은 북한 군인들을 보노라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 양강도의 북한 군인들의 평균입대자들의 키가 145cm였다고 합니다. 한편 아프리카의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은 어떠합니까? 굶주림으로 눈은 푹 꺼져있고 뼈만 앙상한 아이들이 파리조차 좇을 힘이 없어서 파리가 상처의 피를 빨아 먹는 것을 체념하며 바라보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불쌍해서 우리의 가슴도 미어지는 듯 합니다. 예수님도 자기 백성이 로마의 식민지로 인하여 나라를 잃고 떠돌아 다니는 것을 볼 때, 자신의 동생의 아내를 빼앗고 세례요한과 같은 의로운 사람을 죽이는 지도자와 위선과 이기심, 욕심에 가득 찬 종교지도자들 밑에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마9:36, 막6:34) 때문에 예수님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이러한 아픔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보고 욕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참된 목자가 없어서 그렇다, 진리가운데 인도해 줄 사람들이 없어서 그러하다며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상한 심정이 필요합니다.

14-15절 초반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예수님은 자기 계획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며 양떼를 돌보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며 살아 나가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전도여행에 지친 제자들을 좀 쉬게 해 주고 싶으셨습니다. (막6;31-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이 틈에 자신도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쉬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속 모르는 사람들이 다가 왔을 때 쉬고자 하는 원래의 계획을 내려놓으시고 무리들 가운데 있는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전념하셨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추천할 일이지만 내 계획안에 하나님까지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오직 계획만 지켜 나간다면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 계획을 섬기며 결국 자기를 섬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올바른 우리의 자세는 우리의 계획도 기꺼이 내려놓고 언제든지 수정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팍팍한 우리 삶에 여유와 유연성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이며 양떼들 중심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게 할 때 자신의 계획과 반대되는 일을 우리가 강요받을 때도 피곤하지 않고 날카롭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실례로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에는 많은 분들이 자신의 가정을 오픈해서 대학생들을 초청하며 함께 교제하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가정을 최소한 개방하여서 양떼들을 섬기지는 못할지언정 언제라도 우리 계획 안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중요한 일들이 찾아올 때 우선순위 를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15절을 보면 열심히 병자들을 고치고 있는 예수님께로 제자들이 나아와 말하기를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권고 합니다. 제자들은 왜 무리들을 보내고자 했을까요? 백성들이 걱정이 되어서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있는 곳은 아무런 양식을 구할 수 없는 빈들이요 자기들에게는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때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기에 지금 마을로 가지 않으면 그나마 사거나 얻어 먹을 문들도 다 닫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오랜 시간 동안 남아서 자기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이제는 좀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자들의 심정이 아닌가 합니다. 이에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자기들도 좀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절)고 합니다. 갈 것 없다는 말씀은 보내지 말아라, 너희가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여기에 있는 백성들은 변변하게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제대로 도시락을 싸가지고 온 사람은 그나마 조금 형편이 나은 어린아이 한 명 뿐이었습니다. 15장 32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나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고 했는데 지금의 이들의 형편이 이 사람들의 형편보다 낫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들의 ‘저희가 사먹게 하소서’라는 말은 사실 굶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이런 무책임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앞에 있는 무리들은 너희들이 섬기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임을 말해줍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얼마 전에 비하여 전도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기존교회 성도들의 무관심한 틈을 타서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기성을 부리고 믿는 사람들을 꾀어 가기가 힘을 쏟습니다. 실제적으로 전도를 하는 대신 많은 사람들이 시대 탓을 하며 우리가 있는 곳은 영적인 빈들이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강퍅한 시대가 되었다. 때가 늦었어, 전도할 분위기가 아니다(캠퍼스전도의 실제)고 합니다. 실제적으로 요즈음 캠퍼스에서 전도하면 이단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선교에 대한 열심과 열정도 많이 식었습니다. 특히 서구사회는 이제 점점 선교사의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에 동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많은 선교단체들이 후보선교사들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속한 GBT(성경번역선교회)도 후보선교사들이 급격히 줄어들어서 한해에 번역훈련을 받는 가정이 2-3가정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시대는 사람들은 점점 더 뺀질뺀질해지고 쾌락을 추구하며 각종 죄악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버젓이 활기를 칩니다. 믿는 자들도 말세지말을 외치며 이제는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세상에 대한 목자의 심정, 세상의 필요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제자들처럼 ’저희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세요‘가 아니라 섬기고자 하며 책임감을 가지고 기도하며 영적인 양식들을 주어서 먹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금고에 돈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너희가 먹이라고 했을까요? 그 만큼 심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고 아무 것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먹이고자 하는 심정이 있으면 먹일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17절을 보십시오.

‘주님, 여기에 뭔가가 있는데 하지만 겨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17절)고 제자들이 답합니다. 제자들이 지금 먹여할 사람들은 최소한 만 명은 넘는 사람들입니다.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의 수만 5천명이 넘었으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이가 없는 양입니다. 제자들도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입니다 대답을 하였지만 어이가 없는 듯 머쓱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야 장난치냐? 그걸 누가 입에 붙이라고! 이 정신없는 사람들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18절)

오병이어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귀하게 여기시고 감사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비록 형편없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으나 예수님은 "오 주님 감사합니다. 오병이어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제자들이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큰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며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떡이 불어나고 고기가 많아졌는지 다 알 수 없고 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 기적과 같은 일이 사실대로 이루어졌습니다. 20절을 보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재능은 그다지 탁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나이가 많고 힘도 부칠 수도 있습니다. 때가 이미 저문 것처럼 황혼을 지나는 사람들도 우리 중에는 많습니다. 우리는 그다지 부자들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적고 우리의 능력이 너무 부족하고 우리의 재능이 너무 모자라며 너무 나이가 많아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우리가 심정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것을 주님께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번역선교사로서 다른 외국 사람들에 비하면 재능도 많지 않고 공부도 많이 하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언어적인 분석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영어도 탁월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선교지에서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낙망하고 주저앉기 보다는 제게 있는 것을 마치 오병이어처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제게는 사람들과 친화력과 성경을 관찰하며 해석하는 눈이 있습니다. 이를 가지고 성경번역을 해 나갔습니다.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은 이런 저를 좋아했습니다. 성경번역에도 협조적이었고 가끔씩 번역을 하다가 어떤 구절, 특히 어려운 구절을 알기 쉽게 해석해 주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성경번역은 이루어져 갔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을 향하여서 “나가리”라고 비난, 평가절하 하는 말입니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 목회자들이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할 때면 저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람들은 목표지향적인 사람들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뜨거운 가슴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자신은 쓰다 남은 몽땅 연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몽땅 연필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줬을 때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인도의 빈민굴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살려내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미국 뉴잉글랜드 윌리암스 칼리지에서 일어난 건초더미 운동도 오병이어와 같이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시작하였으나 후일에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동참하면서 전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초대교회의 열두 제자와 120명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대제국 로마와 헬라문화에 비하면 열두 제자를 중심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너무나 미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기도하고 전심으로 자신들을 예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복음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야간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끏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자들을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재능과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작은 달란트, 재능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것을 예수님께서 귀하게 여기십니다. 여러분의 작은 진심을 통하여서 예수님께서 일하십니다.
서로에 대해서도 존중할 줄 알고 세워줄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편의 지식이, 능력이, 형편이 오병이어 같더라도 서로를 인정하고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심정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세워줄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것만 좋고 잘 난줄 알고 우습게 여기며 깔보는 습관을 예수님은 오히려 천박하게 여깁니다. 파푸아뉴기니에는 70이 넘어 머리를 허옇게 헛날리면서 선교하러 오시는 분들이 아직도 제법 있습니다. 직접 번역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번역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돕습니다. 누구하나 그런 사람들을 늙어서 이곳에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나 되지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일은 하지 못하지만 자신들이 맡은 분량의 일을 하고 떠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오병이어와 같이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믿음과 진심을 담아 그것을 예수님께로 가져갈 때 우리는 세상을 먹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쓰다버려야 할 것 같은 몽땅 연필과 같은 사람도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면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인생의 법칙이요 하나님의 일하심의 법칙입니다. 마태복음 14장 17-18절을 읽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