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해방, 그리고 우리의 과제" 시126:1-6. 2015년 8월 9일 광복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8-09 | 조회: 1363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은총이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광복절 기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1945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 36년간의 치욕에서 해방이 된 날입니다. 우리는 이 감격스러운 해방을 광복절이라고 정했습니다. ‘빛을 다시 회복한 날’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가장 귀중한 가치인 자유를 되찮은 날이라는 것입니다.
자유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의 근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이시며 그분은 그분을 닮은 자유로운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 선물로 인간이 죄 짓고 타락할 것을 아시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지으신 분입니다. 만일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닮은 숭고한 존재일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유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근본적 가치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과거 종의 멍에를 벗고자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여 일어섰던 이유도 우리 백성의 자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개개인의 참된 존재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 가운데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지만, 이렇게 자유와 주권을 빼앗겼던 적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말을 빼앗기고, 자기의 이름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은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끌려가고 젊은 여자들과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가서 군인들의 위안부 노릇을 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은 남자들은 징용으로 끌려가서 북해도 탄광에서 짐승만도 못한 생활 속에서 석탄을 캐다가 이름 없이 죽어갔습니다. 나이 많은 늙은이들만이 남아서 인권도 생존권도 짖밟힌 채 먹을 만한 식량은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모조리 빼앗아 가고 심지어 밥그릇 숟가락까지 빼앗아 갔습니다. 교회당의 종까지 떼어갔습니다. 어린아이들까지 동원을 하여 소나무의 관솔을 따게 하였으며 짐승도 먹지 못할 꽁깨묵을 식량이라고 배급을 주었습니다.

당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천황을 향해 절을 강요했고, 모세오경과 요한 계시록은 읽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어기는 자들은 모조리 잡아 가두고, 죽였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36년 동안 일본에 의해 자유와 주권을 유린당했습니다. - 이 땅에 자유를 위해 한 생을 바쳤던 숱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뜻을 꺾고 절개를 버리고 일본에 굴복을 했던 것은 이 민족이 다시는 해방을 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연변 과기대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청산리를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관동군을 조직하여 만주까지 세력을 확장하던 그때에 변변치 못한 무기로 일본군 1개 사단을 초토화시킨 청산리 전투는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사건이었고, 이 이야기를 들었던 수많은 이 나라의 백성들은 멍든 가슴을 털어 낼만큼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엄청난 군대를 동원하여 청산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날카로운 글로 한국인에게 희망을 주던 춘원 이광수는 그 현장에 달려가 폐허가 된 현장을 보고, 붓을 꺾고 친일파로 돌아서게 됩니다. 더 이상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방이 온 것입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진 것입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 함석현 선생은 우리나라 해방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우리나라 해방은 도둑 같은 해방이었다, 예기치 않았다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이었다. 그리고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었다. 어느 누가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해방을 스스로 할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고 그는 평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일어난 것 같지 않은 이 민족이 해방을 맞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을 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 이 뜻 깊은 광복 주일을 맞이하지만, 이제 70년이라는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중에는 그때의 기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당시의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은 당시의 쓰라린 역사나 해방의 감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국가관이 정말 많이 바뀐 시대에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우리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마지막 시대에 이 민족이 세상 앞에 희망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너무 중요한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민족을 향한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시 126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 귀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우상 숭배를 거듭하다 바벨론에게 멸망합니다. 많은 엘리트 그룹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약속대로 70년이 지난 후 가나안 땅으로 귀환합니다. 몇 번에 걸쳐 귀환하게 되는데, 시편126편은 1차 귀한 직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포로 귀환은 바벨론이 바사(Persia)가 되고 초대 왕 고레스가 즉위한 원년(B.C. 537)에 단행되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온갖 멸시와 고초를 당하면서 얼마나 조국을 그리워했을까요? 문자 그대로 오매불망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며 귀환을 갈망했을 겁니다.




1. 바렐론에서 70년 만에 해방을 맞게 되었을 때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1-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 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에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상상도 할 수없는 현실이 그들의 눈에 펼쳐진 것입니다. 해방입니다. 자유입니다. 그것도 7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엄청난 해방을 보면서 1절에 보니까 ‘고향 땅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겨지지 않아서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착각을 했을 것입니다. 서로 꿈인가 생신가 해서 얼굴을 꼬집고 허벅지를 꼬집었을 것입니다! 2절에 보니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웃음'과 '찬양'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남의 나라에서 종노릇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 당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니 이들이 크게 웃고 기쁨의 찬양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그런데 보십시오. 그 해방의 기쁨을 안고 7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기쁨도 잠시입니다.
고향 땅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현실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은 잿더미가 되어서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의 제사를 드렸던 예루살렘 성전은 형편없이 허물어져버렸습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마음대로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 눈앞에 비쳐진 현실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가족들이 살던 옛 집 옛 동네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은 기뻤겠지만 현실은 참담했을 것입니다.

건물들은 다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고 먹을 것 입을 것 마져 여의치 않을 때 그 좌절감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예외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에 왔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모습은 눈을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다 무너지고 황폐화가 되었습니다.

이에 이와 같이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4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운명을 과거에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셨던 것처럼 다시 한번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 고향 땅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처참하오니 제발 옛날처럼 도와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라 '남방 시내들' 같이 넘치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남방 시내'는 이스라엘 헤브론 남쪽의 네게브 시내를 말하는데 중동 사막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기를 제외하고는 늘 물 없이 말라있던 시내를 말합니다. 흔히 '와디스'라고 부르는 이 시내들은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아서 말라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폭우가 내려서 강둑이 무너질 정도로 쏜살같이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남방 시내들 같이' 우리를 돌리라는 말은 그 옛날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해주셨던 같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쏜살같이, 그리고 넘치도록 풍성하게 자기들을 구원해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이방 땅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이 속히 하나님의 은혜 앞에 이 참된 기쁨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광복 70주년을 맞는 우리는 일본의 오만방자함 앞에 분노하고 있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제공한 일제의 상처 중에 하나가 남북의 분단의 아픔입니다. 그러나 분단의 70년이 지난 이 시간도 남북은 정말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천안함 침몰에 이어 북한이 6.25 이후 처음으로 우리 영토인 연평도에 포탄을 쏟아 부었습니다. 민간인까지 희생된 최악의 사건에 대규모 맞대응 훈련이 이어지고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북의 미래 경제를 합작하여 나아가겠다는 계획 중의 하나인 개성 공단의 철수와 조업은 투자 경제인들에게 두려움과 좌절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 그리고 나라를 어지럽게 만드는 NLL문제, 이 모두가 북한과의 문제 때문입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은, 언제 또 도발할지 모르는 상태이지만 여전히 국민들은 안전 불감증에 있습니다. 이를 생각을 하면, 교회와 성도들이 먼저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할 때라는 생각에 기도의 부담이 더 커집니다. 그리고 이 땅에 여전히 남아있는 갈등인 계층간의 갈등, 세대간의 갈등,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이 갈등 역시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통일 한국과 갈등이 극복이 되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아름답게 들어날 수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합니까?
5-6절을 보세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현재 엄청난 시련에 봉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미래의 소망인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예루살렘 성이 폐허가 되어서 비참하게 되었지만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이렇게 형편없이 비참하지만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씨앗을 뿌리고 가꾸라는 격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씨를 뿌리는데 ‘눈물을 흘리라’는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는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뿌리고 심고 있습니다. 어제 하루를 살았다는 말은 우리가 지나간 시간과 공간에 무엇인가를 뿌리고 심은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거져 주어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누군가의 노력과 수고와 눈물의 희생의 결과가 아닙니까?

저는 오늘 이 벅찬 과제를 감당할 수 있는 한 사례를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잘 아실 줄로 압니다. 이상재 선생이 애국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패망한 민족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의 근심이 컸겠습니까? 그런데 감옥의 벽 속에 조그만 종이쪽지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꺼내서 보니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끝부분이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중략)...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얼마나 역설적인 이야기입니까?

이상재 선생의 가슴 속에 콱 치미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이로 대항하려는 분노와 복수심 대신에 사랑으로 그들을 대할 때 펼쳐질 놀라운 하나님의 화평을 바라본 것입니다. 무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할 때 허락하실 참다운 하나님의 평강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감옥을 나와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 7월 20일 고종황제가 폐위되었습니다. 절망감에 젖어있던 이상재 선생에게 또 다른 절망감이 찾아왔습니다. 바쁘게 돌아다니고 감옥에 있느라 돌보지 못했던 아내 유씨가 숨을 거뒀습니다. 아내가 떠난 지 사흘 만에 맏아들 승윤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듬해에 둘째 아들 승인이 마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친구 같은 동반자이던 아내는 죽고, 미래의 희망이던 아들 둘도 한꺼번에 잃은 상황 속에서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리한 후 자결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이것을 알고 선교사 몇 분이 찾아왔습니다. 게일 선교사와 YMCA 운동을 하고 있던 질레트라는 선교사 그리고 브랑방 선교사가 왔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어떤 위로 받기도 거절했습니다. 그때에 어느 선교사님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설사 나라가 망하고 가족이 다 죽었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는 아직 조국의 미래인 저 젊은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 젊은이들은 선생님의 자식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희망이지 않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토록 고통스럽고 아픈 과정을 허락하시면서 선생님을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절망했던 그의 가슴에 아들과도 같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가왔습니다. 패망한 조선, 무너져가는 한반도의 젊은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될 그 비전과 꿈을 보았습니다. 다시금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Y MCA의 총무일을 맡았습니다. 열심히 뛰었습니다. 이 백성들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다고 결단했습니다.

한 해 동안 일만 육천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1907년 일백만 구령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전하며 절망한 이들의 가슴에 생명의 불을 던졌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통해서 ‘청년’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이제 우리가 통일 한국을 위해 눈물의 씨앗을 심어야합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 때가 있다”(전3:1)고 말합니다. 심은 때가 있으면 반드시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심음과 거둠의 법칙입니다. 추수의 법칙입니다. 이 심음과 거둠 사이에서 낙심하지 않으려면 시간을 견디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주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이천 년 전에 아기 예수님을 이 땅위에 보내주셨습니 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어떻게 인류와 우리 자신의 운명이 바뀌어지게 되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 어두움에 갖혀 있는 내 동포 2300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내 조국 대한민국에 5000만 가운데 아직도 어두움에서 죄에 갖혀 사는 내 동포를 참 빛이신 복음 앞에 인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광복 70주년 앞에 선 우리는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시는 하나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에게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한번 갈망할 때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께서 이 민족을 진정한 자유를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광복, 이는 결코 우리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큰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분단된 이 민족의 평화 통일도 꿈꾸는 것 같이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시온의 포로들이 그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나라와 민족, 교회와 성도 여러분들 위에 항상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