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그리스인의 삶이란" 빌1:27-30절 2015년 8월16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8-16 |
조회: 1396
지난 한 주간도... 믿음안에서 승리하셨습니까? 늘 주 안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도 한번쯤은 읽거나 만지작거렸을 일본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제목에 있는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언가 생각하게 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에서 끊임없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로마 제국을 그토록 강대하게 만들었는가?” 지성적인 면에서는 그리스인들보다 못했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뒤떨어졌으며, 경제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쳐졌던 로마인들이 오래도록 번영을 누리며 세계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면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로마 시민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법과 질서를 지키고, 원칙을 지키며, 로마 시민 됨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한 정신이 바로 로마제국 승리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서 자존심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자존심이요, 다른 것은 다 건드려도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당시 최강국의 시민이었던 로마인들은 이 ‘로마 시민’이라는 자존심이 대단해서 로마인 외의 민족은 하등민족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많은 특권을 당연하게 여겼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로마 시민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돈을 주고 사기도 하고 군인생활을 하거나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워 시민권을 받기도 했습니다. 요즘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 사람들도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 진짜 문명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중화’라 부르며 민족적 자부심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이라 여기며 그 외 이방인들은 사람취급도 하시 않았습니다. 작은 나라이면서 대단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여러분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또한, 자신이 성도라는 사실에 얼마나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나는 천국 시민이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 땅에서 당당하게 살 크리스천으로서 자존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런 정체성에 대한 자존심이 성도의 지울 수 없는 삶의 흔적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자존심을 피와 같이 그의 영혼 전체에 흘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 보면 바울은 그런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27절 상반 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오직"이라는 말 속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고 하다가 그 때문에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고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면 쉽게 믿음을 버리고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의 구원의 복음을 저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구원을 확신하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이 말은 ‘이제 우리는 로마의 시민권 정도가 아닌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자다. 그러므로 세상 앞에 휘둘리거나 비겁하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감옥에서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외치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을 하는 것입니까?
1. 서로 협력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오늘 말씀 빌1:27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서로... 협력하자" 서서는 군대 용어입니다. 흐트러짐이 없는 연병장에 도열한 군인들의 모습처럼 지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협력'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쉬나-쓸룬테스'라고 말합니다. 이 뜻은, 보통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운동 시합에서 우승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합심으로 하나가 되어... 사력을 다해서 경기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자면, 축구경기나 야구경기나 농구경기 등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이런 시합은 단체 경기이기 때문에, 누구 하나만 잘 한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팀웍이 잘 되어야 합니다. 선수 하나 하나가 서로 협력하여 하나같이 움직일 때, 비로소 경기에서 승리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또 '쉬나-쓸룬테스'는 치열한 전투에서 함께 투쟁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최고의 관객을 동원했던 명랑이란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순신 장군이 던진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아십니까? 이순신 장군이 "신에게는 아직,12척의 전선이 남아 있나이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바다에서 12척의 배에 탄 군사들은 상대방의 배에 올라 칼과 창을 가지고 서로 맞붙어서 싸우는 백병전이었습니다. 상대방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고, 적군을 무찌르지 못하면,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냉엄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니 대충 대충 싸워서는 승산이 없기에 목숨 걸고 투쟁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나-쓸룬테스'는, 함께 분투하고 함께 고통당하고 함께 일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사활이 달려 있는 것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협력'의 관계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 교회가 다시 세상 앞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길은 다시 한번 교회의 성도들이 한마음, 한 뜻을 가지고 나를 구원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서 내 한목숨을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파레토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백 년 전 이탈리아인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처음 발견한 법칙으로, 오늘날에는?80대 20’ 이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빌 프레도 파레토는 19세기 영국의 부와 소득의 유형을 연구하던 중에 소수의 국민이 대부분의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즉 인구의 20%가 전체부의 8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경제와 사회에 매우 중요한 일반법칙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교회에 성도들이 있지만 성도 중 20%만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여러 조직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의 힘만이 동성교회를 움직이는 가용 힘으로서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다른 조직체나 혹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쓰고 있는 힘의 20% 외의 나머지는 낭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정과 개인 뿐 아니라 교회와 국가도 20%만 쓰고 80%를 그냥 버리고 있다면, 얼마나 많은 낭비입니까? 만일 나머지 80%를 다 사용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제 정말 내 가슴 열고 내 식어진 열정 다시한번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우리 모두 하나되어 주께서 맡긴 사명 믿음으로 감당해야 하지 않습니까?
2. 대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오늘 본문 28절 전반부 말씀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도 심했고, 이방인들의 공격도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달아 죽인 예수님이 다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메시야- 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외면했고, 이방인들은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에 대해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그리스인들은 때로는 가정이나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심하면 매를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며,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 믿으면 좀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일어나고 또 어떤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교회 나오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초대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를 믿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 부득불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원치 않는 곳, 원치 않는 남의 나라 땅에서 유리방황하며 쫓기는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고, 여기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신앙인으로 두려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염려와 두려움의 늪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문제를 만날 때, 그리고 그 문제에 무게에 눌려 살아갈 때 우리는 염려와 두려움에 빠져 신앙의 근본마져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딤후1:7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전사자가 35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엄청나죠. 그런데 자식이나 남편을 보내놓고 염려하다 심장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무려 100만 명입니다. 염려가 무서운가요? 전쟁이 무서운가요? 염려가 전쟁보다 보다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한 심리학자는 염려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염려는 인간을 서서히 죽이는 느린 형태의 자살 행위이다.” 염려는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까지 망가뜨립니다.
바울을 보세요.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도로서 품위와 자존감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대적자의 위협과 압력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조차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이런 능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고난 가운데 있는 바울의 삶 속에 계속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의 능력이었습니다.
두려움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떠나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숨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합니다. 결국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죄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두려움이 없는 삶을 원하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다윗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두렵지 않습니다. 적군이 에워싸도 마음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케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 떠는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용감하게 전진하는 자를 통해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3.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도 기꺼이 받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본문 29절을 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고난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 고난조차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다면 그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고난을 받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 같겠습니까? 주님의 그 고난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그 자체를 우리는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 뿐만 아니라, '고난' 조차도 은혜라는 사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자신의 앞날이 정말 불투명합니다. 그 중에 가장 힘든 것이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인간적으로 보면 자신의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주 만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데 오히려 고통이 버무려 있는 죽음의 현장인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왜 바울이라고 갈등이 왜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복음대로 살려면 언제나 고난이 있습니다. 믿음대로 살려면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고난 없는 영광만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실용주의자가 되고 편리한 생활 속에서 고난을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착각하며 진리를 왜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고난 앞에 견딤이 없습니다. 너무 쉽게 주저 앉고 무너집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도끼 자루를 구하러 산으로 갔습니다. 따라가던 손자가 발이 아파오자 말했습니다. "여기도 나무가 많은데 왜 자꾸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세요?" 할아버지는 말없이 계속 산길을 올랐습니다. 이윽고 산 정상 가까이 있는 절벽 위에서 할아버지는 바위 틈새를 뚫고 나온 나뭇가지를 어렵사리 잘라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산을 내려오며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절벽의 바위틈을 뚫고 나무가 뿌리를 내려 가지를 뻗으려면 얼마나 견뎌야 했겠니. 비바람도 폭설도 추위도 더위도 모두 견뎌낸 그놈을 잘라 도끼자루로 써야 평생 써도 부러지지 않는단다. 매사 모든 것이 견딤이 있은 연후에 쓰임이 있는 법이야." 그러므로 시119: 71-72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간 계속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로 약 1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빅터 프랑클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테레지엔슈타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독일의 카우페링과 튀르크하임 등 죽음의 수용소를 무려 네 군데나 거치고서도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살아야 할 의미’를 잊지 않고 그 고난을 견뎌냈기 때문입니다. 자기 미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람은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야 할 의미’를 가지고 견뎌낸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뚫고 다시 미래를 만듭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는 고통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C. S. Lewis 교수는 옥스퍼드 대학의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나올 때, 한 학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증거 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이런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겁니까?? 그 때 루이스 교수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이 있어도 교만한 인생인데, 만약 인생의 길에 고통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교만하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확성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커갈 때, 남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잘 할 때, 손대는 일마다 잘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폭풍이 불고, 풍랑이 밀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이 감옥에서도 이렇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으라고 외친 저 빌립보 성도는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모습은 아닙니까? 참 산다는 게 쉽지 않고 예전에 왠만한 이야기도 믿음으로 극복했는데 이젠 조그마한 것에 분노하고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내 모습은 아닙니까? 네 그것은 나의 모습뿐만 아니라 내 옆에 계신 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린 서로를 끌어 앉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안아주기를 기다리는 영혼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에서 힘들고 지쳐 있는 영혼들을 안아주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한 영혼들을 안아주어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이름트라우트 타르는 그의 책 『페퍼민트-나를 위한 향기로운 위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번의 포옹이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포옹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안아보십시오. 따뜻한 포옹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당신이 있어 기쁘다'는 것을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주십시오. 그것은 상대방은 물론 당신의 영혼에도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를 돌아보며 내가 안아 주어야 할 사람은 없는지 찾아보십시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품에 안기기를 원한다면 주저 없이 안아주십시다. 우리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내가 힘든 누군가를 안아 줄 때 그는 내 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될 것이고, 안아주는 나의 가슴 역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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