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해져 가는 공동체" 빌2:1-4절 2015년 8월23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8-23 |
조회: 1298
여러분, 혹 짓다가 만 건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지난 월요일에 ‘설교자 하우스’ 세미나에 가기 위해 수안보에 간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보니까 공사를 하다만 건물들이 보기도 흉하게 몇채가 있었습니다. 저런 좋은 토지에 멋진 건물이 될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부도가 나서 몇 년째 공사를 하지 못하고 방치해 놓은 것이든지 아니면 어떤 사연이 있겠지만, 그런 건물들은 흉측스런 모습으로 인해 미관을 해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공사현장에서 날아오는 먼지로 인해서 주변 주민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고, 심지어 폐자재까지 인가로 날아오면서 큰 위험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방치된 건물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청소년들의 탈선 장소로 변하기도 합니다. 짓다가 만 건물은 그냥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흉물로 변해갑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성장이 멈추어버리면, 신앙이 그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멈춘 신앙은 그 때부터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멈춘 신앙은 퇴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냄새가 납니다. 마치 죽은 물고기가 부패하면서 썩은 냄새가 나듯이, 성장이 멈춘 신앙인에게서는 세상적인 냄새가 풍겨지기 시작합니다. 내 삶과 생각을 말씀에 맞추려하지 않고 세상에 적당하게 맞춰 살기 때문에 세상의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성장하는 신앙일 때에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갑니다. 성장해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제 계절의 변화 속에서 내 믿음이 자라고 있는지, 아니면 머물러 있는지. 점점 퇴보 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실 누구나 주 앞에 연약함이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숙치 못한 어쩌면 건물이 지어져 가는 공사 중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때로 세상의 유혹 앞에서 나약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도 믿음의 길에서 이탈된 채 살 때도 있습니다. 내 안에서는 의롭게 살고 정직하게 살려 하는데, 자꾸만 거짓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내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나요? 저 역시 ‘내가 목사이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목사다운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 때도 있습니다.
자신이 실수했을 때 실수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실수했음을 알고 고치려하는 것에는 하나님께서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실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수했음에도 실수인줄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문제이고, 실수하지 않았다고 우기며 자기를 합리화하며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공사 중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인격도 온전한 모습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공사 중에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 공사를 완성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의 내분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안타깝고 속이 상해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가 내분을 해결하고 하나를 이룬다면 자기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지 말고 하나가 되어 자기를 기쁘게 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2:1-4절은 헬라어 원문 상으로 보면 길지만 한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주절과 조건절, 그리고 목적절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 문법적 구조가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열쇠 역할을 합니다. 우선 주절은 4절 마지막에 나오는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말씀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를 기쁘게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왜 이처럼 노 사도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야만 했습니까?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지금 감옥 속에서 숱한 세월을 살아오지만, 그것은 주님을 위해 자신이 당한 고난이기에 얼마든지 참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뼈마디마디 가 쑤시고 저려오는 아픔과 통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인 빌립보 교회인데 이 교회 안에 갈등이 있다는 사실, 이것은 정말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바울에게 상처로 다가왔고, 자신안에 있는 기쁨이 빼앗길 정도로 통증이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갈등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한자로 갈등은 갈은 칡 ‘갈(葛)’이고, 등은 등나무‘ 등(藤)’입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처럼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상태를 갈등이라고 합니다. 갈등이 내면에서 일어나면 마음이 상하게 되고, 염려와 불안이 엄습합니다. 갈등이 관계 속에서 나타나면 싸움이 됩니다.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세대간의 갈등, 계층간의 갈등, 지역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 갈등이 국가나 민족간의 갈등으로 확대되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 본대로 1:15에 보면 빌립보 교회 내에도 투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인간적인 경쟁을 하려는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한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개개인은 다 예수를 잘 믿고 있는데 믿는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빌4장에 너머가 보면, 두 여 성도사이에 존재한 갈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4:2을 보십시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고하지 않습니까! 유오디아나 순두게는 모두 여성들의 이름입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기에 여성 성도들의 영향이 처음부터 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교회 안에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갈등은 자신들의 문제일뿐 아니라 교회 전체에 아픔을 주는 일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들에게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합니다. 이 두 지도자의 개인 갈등이 교회의 짐이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생각해 보세요. 이런 저런 소식 가운데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들을때 감옥 안에서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하나 됨에 대한 믿음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 2절을 보세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고” 여기 우리가 주목해야할 단어는 같이하자는 것입니다. 하나 되자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 됨은 제도나 정치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프로 야구팀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많습니다. 프로팀 가운데 두산에 왈론드라는 외국인 투수가 있었습니다. 큰 경기를 앞둔 어느 날 그는 라카룸에서 같은 팀 투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조그만 쇳덩이 하나를 선물을 했습니다. 등산 장비의 하나인 ‘카라비너’였습니다. D자형으로 생긴 철제 고리로 장비끼리 연결해서 추락을 방지하는 안전장치입니다. 왈론드는 이 카라비너를 각자의 가방에 걸도록 당부했습니다. 난데 없는 등신장비 선물에 동료들은 궁금하지 않았겠습니까? 야구 선수들, 특히 투수들에게는 전혀 쓸데도 없고 멋으로 달고 다닐만한 엑세서리는 아닙니다. 왈론드는 선물을 받고 의아해 하는 투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암벽등반을 할 때 카라비너는 대원들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매게체야. 한 가닥의 생명줄에 다같이 메달려 있게 해주는 것이지. 한명이라도 미끄러지면 다 함께 위기에 처할 것이고 그러면 나머지 동료들이 함께 힘을 모아 위기에서 벗어나야 해. 카라비너는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도구야.”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 투수 그리고 모든 선수들이 공동 운명체로 서로 도와야 한다는 멧세지를 이보다 더 잘 전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뭐, 동료들은 누구하나 여기에 이의제기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동료들은 모두 고개를 끄떡였고,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카라비너를 가방에 걸었습니다. 모든 선수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하나 됨--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서 그렇게도 보고 싶어한 가장 중요한 기대였음을 아시는지요? 요17:21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이 지상에서의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 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가 될 때 그들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 발휘할 수 있는 그 놀라운 가능성을 아셨습니다.
2. 서로를 세워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3절
3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어떻게 하라고요? 무슨 일을 하든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 하십니다. ‘다툼으로 하지 말라는 것’은 이기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은 공허한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 혼자만 들떠서 자기 자랑에 몰입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정말 열심히 교회와 주님을 위해 충성하면서도 말 때문에 모든 수고를 까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을 함부로 해서 상처를 줍니다. 이런 분들은 참 안타깝습니다. 열정도 있고, 능력도 있고, 추진력도 있어서 뭔가 해도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만 말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습니다.
어떤 성도는 봉사를 양은 냄비처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양은 냄비에서 끓이면 빨리 끓기도 하지만, 빨리 식기도 합니다. 죽 끓듯 하다는 말입니다. 잠깐 열심을 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새 식어버립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칠 정도로 의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는 것 같으면 신이 나서 열심히 하다가도, 좀 못한다고 책망하면 풀이 죽어 그만 두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박수와 칭찬 그거 결코 오래 지속되는 법이 없습니다. 잠시 잠간입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박수와 호응도 수그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인기 - 오래 지속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그렇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자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나를 낮출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겸손은 원래 땅을 나타내는 라틴어 ‘humus'에서 파생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 불름이란 신학자는 “겸손은 땅과 같다”고 말하면서 겸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땅은 조용히 모든 것을 용납하는 곳이다. 그리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온갖 쓰레기로부터 새로운 풍요를 만들어낸다. 썩은 것을 변화 시켜 생명력과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햇빛을 받고 비를 맞으며 우리가 뿌리는 씨를 받아들여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 풍성한 결실을 맺는 옥토는 겸손으로 예비된 심령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씨앗에는 문제가 없다. 진정한 열매는 겸손한 토양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겸손하게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 후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7:10절에 “그러므로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러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겸손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상대화시켜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았을 때 죄인이었던 나,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나, 나는 결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겸허의 자리, 거기서부터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 됨의 아름다움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함께 주 앞에 한 평생 겸손의 덕을 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을 돌아보되, 다른 사람의 이익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라고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아볼 때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돌아본다’는 말은 한자어로 '배려'한다는 말입니다. 配慮라는 한자어를 풀이하면 '배'자는 짝을 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려'자는 생각할 '려'라고 합니다. 배려라는 말은 같은 생각을 한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돌아본다는 말은 그 사람과 같은 입장에서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참 어렵습니다.
시중에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개미와 코끼리가 함께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눈치 없이 자꾸 TV 앞으로, 다가앉는 바람에 개미가 TV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개미가 코끼리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너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 내가 니 앞에 앉아서 니 시선을 막아 놓으면 기분 좋겠어?” 주위에 보면 이 유머에 나오는 코끼리처럼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오직 자기 자신의 기준에 맞춰놓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의 처지와 환경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자기중심으로 행동으로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진정한 하나됨의 열매를 기대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그 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조차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내 떠나가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 친구가 별로 없고, 항상 외딴섬처럼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 주위에는 항상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주위에는 항상 친구가 많습니다. 항상 이해하는 이 사람의 넉넉함에 반해서 서로 친구가 되려고 합니다. 설령 오해로 말미암아 갈등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내 그 오해가 풀립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남의 어려움과 처지를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같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합니다. 아무리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세우신 아름다운 교회에 내 인생을 다 드릴려는 헌신과 섬김이 있습니다. 독불장군처럼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돌아보고 하나 되기를 힘을 씁니다. 서로 돌아볼 때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돌아볼 때 우리는 기쁩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이런 말씀을 들어도 우리의 삶이 말씀을 들을 때뿐이지 잘 안변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가 성령의 능력에 붙잡히지 않으면 결코 도덕적인 결단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 성령님-그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 됨을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 인간적 교제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들이지만 우리 안에 존재하는 죄성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은 그 깊은 감옥 속에도 저들이 겪는 그 갈등이 속히 치유되기를 바라 있습니다. 은혜 받은 자답게 자신을 겸손히 십자가 앞에 내려놓은 때, 더 이상 반목과 질시는 다라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 그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여유가 있습니다. 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건강한 모습으로 세움을 받게 됩니다.
얼마 전에 우리 영화가 세계에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의 최고의 상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조각상입니다. 로마의 유명한 바티칸 대성당 뮤지엄에 가면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피에타상이 있습니다. 높이 171cm의 대리석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미켈란젤로가 마리아의 옷자락에다가 서명한 그가 특히 아낀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수년전 이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철책선을 뛰어넘은 망치를 든 한 청년에 의해 무참하게 훼손된 일이 있었습니다. 박물관은 이 작품을 포기했을까요? 아니지요. 그들은 이 작품을 회복시키기 위한 세계적인 조각가 팀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회복작업에 착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의논한 끝에 우선 몇 달을 깨어진 이 작품을 감상하는 일에 보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눈과 가슴을 갖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눈이 미켈란젤로의 눈이 되어 이 작품에 나타난 마리아의 연민, 고통과 환희를 보고, 그의 가슴이 되어 그 연민을, 그 고통을, 그 환희를 함께 느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이 작품을 거의 완벽하게 재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동성교회가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상처나고 깨어진 형제, 자매를 붙들고 그들이 함께 그를 빚어 만드신 하나님의 눈과 가슴이 되어 그의 고통과 비참을 함께 느끼며 마침내 그를 도와 그를 회복시키는 작업--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며 우리의 회복의 사역인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십자가의 사역이 아닙니까! 우리의 죄와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마침내 우리 죄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회복하게 하신 주님의 사랑--이 사랑에 빚진 자가 되었다면 이제는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그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완성품이 아닙니다. 아직도 공사 중입니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제작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도록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주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십시다. 우리의 모습 가운데 아무리 못난 부분이 많다 하더라도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우리를 온전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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