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음을 품으라 빌2:5-11절 2015년 8월30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8-31 |
조회: 1260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라는 질문을 했다면 무엇이라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가장 중요시 여긴다는 것은 최고의 가치를 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미국의 해리스라는 여론 조사 기관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이 문제를 조사를 했습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56%가 ‘관계’, 21%가 종교적 믿음, 5%가 돈(물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돈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답한 사람이 열 배가 넘습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 사회에서 나온 통계라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라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소통이라는 것이 사회의 화두입니다. 그런데 소통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관계’입니다. 관계를 맺으려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 공동체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관계는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된 핵심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연결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건강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립된 사람들보다 병이 치유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고 합니다. 좋은 음식이 아니라도 함께 먹는 사람이 혼자 좋은 것을 먹는 사람보다 훨씬 더 건강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에 있어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정신적인 것은 물론이고 건강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다양한 스트레스의 요인들이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인간관계로부터 옵니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기면 영적으로도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가 막히고 예배의 감격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고 하다가 형제와의 관계에 맺힌 것이 있으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난 후에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수평적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수직적 관계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여기 ‘품는다’는 말은 단순히 마음에 간직한다는 뜻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태도를 우리 성도들이 삶 속에서 생활화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계셨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계셨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마음, 삶의 태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5-8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본문을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최고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신학적으로는 성육신이라고 말하는데 이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대하시는 사랑의 태도의 결정체’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처지가 되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자기를 비어'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시면서 그가 만일 그의 신성을 포기한 것이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우리의 모범은 되실 수 있어도 우리의 구원자는 되실 수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쉽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는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우선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된 자리를 포기하시고 사람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주인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종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받으실 수 있는 대접을 포기하셨습니다. 대신 가장 낮은 사람인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때로는 오해를 때로는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제자 되기를 구하는 오늘의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기꺼이 자신을 낮추기 위해 주장할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신 것들이 있으신가요? 자신을 위해 쓰는 일을 줄이고 이웃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있으셨나요?
좀 더 큰 집에서 살 수 있는 분들이 집을 줄인다든지 좀 더 큰 자동차 탈수 있는 분들이 더 작은 차를 타며 이웃을 섬기는 일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모습들이 있으셨는지요? 주차장에 주차 할 때도 다른 이웃들이 주차하기 어렵지 않도록 주차하지 말아야 할 곳에 주차 안하고 내가 좀 더 먼 곳에 주차하고 걸어오는 일, 엘리베이터 탈 때나 식당에서 식사 할 때도 연약한 이웃을 배려하고 자신이 손해 볼 줄 아는 것-믿음의 표현은 이런 구체적인 양보나 희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챙길 것 다 챙기고 다 대접받고 다 높임 받고 언제 섬기고 언제 이웃들을 전도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섬김의 시작은 자신의 비우심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섬김의 마지막 절정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가신 이유, 거기서 못박히신 이유-그것이 그를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양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 분이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는지, 어거스틴은 어느 날 이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고백합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지금 바울은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전율을 느낀 것입니다. 이 사랑, 이 은혜를 입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변화 받은 구원의 자녀가 할 일은 다름이 아닌 바로 주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이기주의가 극성을 떨고, 매정하고, 형제고 부모고 자기에게 손해를 줄 것 같으면 얼굴을 싹 돌리는 세상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이 주님이 말씀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1장을 차분하게 읽어보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훌륭합니다. 교인들 하나하나가 믿음 가운데 굳건하게 서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저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빌립보 교회를 볼 때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장 15-17절을 읽어보면 빌립보 교회에 파당이 있어서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개인은 다 예수를 잘 믿고 있는데 믿는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27절을 보면 바울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한 지붕 밑에서 더불어 살아가면서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것 이것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복음을 믿더라도 서로 하나를 이루어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직장이든 학교든,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기 때문에 정말 힘들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이 다르다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주제입니다. 같은 배에서 난 형제들도 다릅니다. 성격, 기호, 생각, 경험, 배경, 관점이 너무도 다릅니다. 형제라면 당연히 우애를 나눌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부도 한 사람은 성격이 항상 느긋하고 한 사람은 성질이 급한데 이런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부부가 둘 중 한 사람은 사회사업가 같이 퍼주고 한 사람은 모으는 데 집중한다면 같이 살기 어렵습니다. 남편은 생선을 너무 좋아하는데 아내는 생선 알레르기가 있다면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남편은 물건들을 모으는 것이 취미이고 아내는 날마다 내다 버리는 것이 특기라면, 아내는 쇼핑을 너무 좋아하고 남편은 한번 사면 30년 이상은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갈등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침잠이 많은 아내와 아침을 꼭 먹고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함께 산다면 험난한 삶이 예상됩니다. 한 사람은 다혈질이고 한 사람은 점액질이면 힘들어집니다.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맞추며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하는 방식이 자기가 처한 배경과 지식과 경험에 따라 너무도 다릅니다. 그래서 일치점을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때문에 나와 다른 것 때문에 날마다 싸우며 은혜를 쏟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피하며 살 것인가?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내가 먼저 죽어지는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아침에 우리에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내게 있는 ‘의’를 철저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비워야 할 것 중에 가장 먼저인 것은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라는 것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만족해하며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한 것만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금식하면서 자신이 금식했노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일부러 허약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남들을 많이 도와주었지만, 도와주면서 자신이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게 모두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가 무서운 것은 자신이 한 것을 자랑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큼 하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여러분, 열심히 봉사하시고 열심히 신앙생활하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에 사로잡히진 마십시오. 우리는 겸손하게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 후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 17:10)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신앙적인 자기 의도 없습니다. 포기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의 삶을 열심을 다해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 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의를 만들지 않겠다고 열심을 포기하는 것은 게으르고 나태한 종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 때에도 그렇고,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일할 때에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모든 일에 열심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잊지 마십시다. 그 열심이 나의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한 후에는 열심히 했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그게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 보혈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당신의 지체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엡2:22절에 보면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함께’ - 함께라는 개념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함께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에 성전을 지을 때는 생김새가 다양한 돌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출애굽기에도 보면 성전을 지을 때 정으로 돌을 쪼지 말라고 했습니다.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돌의 모양 그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대로 끼워 맞춰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성격이나 배경, 경험, 기질, 어떤 일에 대한 관점과 생각이 다릅니다. 이해나 반응, 은사도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절망이 됩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은혜 받은 내 자신이 품어야 합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함께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외톨이가 됩니다. 외톨이는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 교회는 더불어 세워가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를 바꾸려고 몸부림치며 상처받고 깨지다가 결국은 ‘안 바뀐다’로 결론짓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바뀌면 상대가 바뀌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나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이 된다”라고 고린도교회에 말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자기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어서 사귀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 맞추어주는 것입니다. 돌담을 만들 때도 큰 돌만 있으면 돌담이 안 됩니다. 튀어나온 돌이 있으면 다른 돌이 들어가면 됩니다. 서로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의 원리입니다. 물은 컵에 맞게 담깁니다. 물이 자기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컵에 못 들어갑니다. 이것은 줏대가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성숙한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고집과 방식, 주장을 일관되게 고집한다면 미성숙입니다.
좋은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문제가 없는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그런 곳은 없습니다. 희한한 사람들이 있어도 품어주는 교회가 성숙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우리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저는 어릴 때 낙동강 상류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강물을 따라 내려운 자갈은 매우 거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강물을 따라 내려운 자갈은 매우 거칩니다. 제가 조금 커갈 때 부산에서 살았는데 낙동강하류에 가면 고운 모래나 자갈이 있습니다. 그 자갈들을 보면 모가 나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돌고 돌면서 서로가 엉켜 깎아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모나고 까다롭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신 것은 나를 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모난 사람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은 나도 모가 났다는 것입니다. 둥글둥글한 사람은 모두와 잘 어울립니다.
교만한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은 내가 교만한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부딪히면서 변화되어 갑니다. 때로는 실망하지만 도전 받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연약함을 보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과 다를 바가 없고, 내 안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저 정도의 사람도 품지 못하는구나, 이 정도의 문제도 극복하지 못하는 수준이구나 하면서 내 연약함이 보이고 다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자기 변화를 하는 동기부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거부한다면 편안할지는 몰라도 성숙과는 멀어집니다. 함께 하면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비우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서 받으셔야 할 영광이나 존귀를 하나도 남김없이 비워버리셨습니다. 그랬기에 십자가의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우셨다면, 조롱하고 채찍질하는 그들을 어찌 용서할 수 있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덜 비우셨다면, 배신하고 도망쳐버린 제자들을 어떻게 다시 제자로 부르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는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한 지상의 유일한 곳입니다. 교회만큼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남겨놓으신 지상의 그리스도의 몸, 관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십시오. 삶은 관계입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친밀함은 우리 삶의 행복의 핵심입니다. 관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그 안에서 축복과 은혜를 함께 누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