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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기쁨은" 빌 2:12-18절 2015년 9월 6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9-06 | 조회: 1277
켄 가이어가 쓴 "묵상하는 삶"에 보면 멕시코시티의 "양파 파는 노인"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멕시코시티 시장 한구석에서 '포타라모'라는 이름을 가진 인디언 노인이 양파 스무 줄을 걸어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시카고에 온 미국인 한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고 합니다. 양파 한 줄에 얼마나 되느냐고. 10센트라고 대답합니다. 두 줄에는? 20센트라고. 세 줄에는? 30센트라고. "깍아 주시는 것이 없으시군요. 그러면 스무 줄을 다 살터이니 얼마에 파시겠습니까?"하자, 그 노인은 "그렇게 팔수는 없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미국인은 다시 "아니 왜 못 파십니까? 양파 팔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하자 그는 이런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양파를 팔뿐 아니라 내 인생을 살기 위해서 여기 나온 것입니다. 난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여기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하고-- 사람들과 인사를 건네는 것을 사랑하고 친구들을 사랑하고 농작물 이야기하는 것을 사랑한답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한꺼번에 몽땅 팔면 나는 내 인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노인이야말로 현재의 행복을 아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행복의 극치를 고백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삶에는 행복할 조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오늘 집도, 가족도, 건강도 평안히 쉴 안식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보다 기쁨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뻐해야 할 이유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17-18절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섬겼던 빌립보 교우들의 그 사랑과 헌신 위에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한다.’는 이 말은 자신이 곧 순교당할 것을 예견하고 한 말씀입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재판을 앞두고 있지만, 그 재판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결날 가능성은 적어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곧 자신은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전제’라고 표현합니다. ‘전제’라는 말은 제사를 드릴 때 제물에 포도주를 붇는 것을 말합니다. 제물로 드려진 짐승의 몸에 포도주를 부어서 제물이 향기롭게 잘 타도록 돕는 것을 전제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그렇게 전제와 같이 복음을 위해서 부어지고 자신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는 기쁘다’고 선언합니다. 이만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행복의 극치에서 외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바울을 이렇게도 행복의 극치를 외칠 수 있게 하여 준 것입니까? 도대체 감옥이 빼앗아 가지 못하고 죽음의 위협도 빼앗아가지 못한, 그의 기쁨의 인생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사도 바울의 이 전천후 기쁨의 이유는

1. 날마다 얻는 구원의 성취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2절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룸으로 오는 절대적인 행복감, 이것이 기쁨의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여기 ‘구원을 이루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구원을 마치 우리가 노력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뛰어나야만 구원에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오해입니다. 엡 2:8-9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왜 성경은 구원의 근거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그것은 행위가 안 중요해서가 아니라 인간 행위의 불완전성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 일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면 천국은 자기 행위를 자랑하는 사람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곳이 천국일수 있겠습니까? 여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행위 그 자체는 아무리 존경스럽고 우러러 보이는 덕성의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완전하신 기준으로 보면 오십보 백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단어들인 선함과 악함은 사실은 모두 상대적인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부여하는 성자의 칭호조차도 인간 존재의 실상에 합당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신분은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자라나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이들을 길러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들이 똥 오줌을 가리지 못할 때 기저귀를 채우고 젖병으로 아이들을 키웁니다. 아이들이 황금 변을 보면 변 빚깔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고3이 되어서도 책가방에 젖병을 넣고 다닌다거나 기저귀를 차고 다니며 이것은 자랑 거리가 아니라 근심거리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수백 명 수천 명의 어른들이 양복을 입고, 또 곱게 화장을 했지만, 여전히 귀저기를 차고 걸음걸이가 불편하고, 우유병을 들거나 입에 물고 다니면 얼마나 웃긴 일입니까?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 구원의 감격 속에 신분의 변화를 경험했으면 자라야 합니다. 이것을 ‘성화’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현재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종내에는 흠도, 점도 없는 완전한 구원 영화의 구원, 미래 구원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되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이 말은 교리적으로 말하면, '성화'입니다. 성화는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형상이 끊임없이 계속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이것을 위하여 달려가는 삶을 살라는 요구입니다. 우리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점점 온전하게 나타나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하는 그날 우리의 연약한 몸을 받으시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영광의 구원의 몸으로 우리를 주께서 맞이할 것입니다. 이를 성경은 미래 구원, 영화의 구원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내가 무슨 근거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특권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바울을 보세요.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었고 자신의 신념 때문에 사람을 죽일 정도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은 자신의 운명하나 바꿀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였는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아무 조건없이 받아주신 그 은혜 앞에 자신이 가진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이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소망을 붙들고 있습니까? 물질을 잃어버리면 영원도 함께 잃어버린 자처럼 낙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존심이 상하면 구원의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함께 잊어버린 것처럼 절망하고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관계와 건강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이 세상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는 이 구원의 소식과 소망과 기쁨도 모두 함께 잃어버린 것처럼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기쁨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하는 그 ‘소명’에 근거합니다. (14-15)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무슨 말입니까? 15절을 직역하면, “타락한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밝게 빛나는 깨끗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사십시오” 이런 말씀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것은 대략 A.D. 62-63년 경입니다. 그 때는 네로가 로마를 통치하고 있던 때입니다. 네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유명합니다. 그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순탄하게 예수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대의 크리스천들의 키워드는 순교라는 단어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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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기가 살고 있던 세대를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고 했습니다. “어그러지고”라는 말은 구부러졌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반듯하게 자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옆으로 삐딱하게 빗나가듯이 바울은 자기 세대가 그런 세대라고 보았습니다. 또 바울은 자기 세대를 가리켜 “거스르는”이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세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대 앞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의 자녀로 삼으시고 소명자로 쓰신다는 것, 그 부르심 앞에 내가 서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시리아의 난민인 가족이 탈출을 하다 3살 먹은 아이의 죽음 앞에 세계가 전율을 떨고 있습니다. 몇해전에 한 tv 뉴스에서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보여 준적이 있습니다. 학살된 6백만 명의 유태인 중 150만 명이 학살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진행되는 기념식이었습니다.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안경만 가득한 방, 의족만 가득한 방, 여행용 가방만 가득한 방 그리고 머리카락만 가득한 방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자기 삶의 흔적을 남기고 죽어간 것입니다. 불태워 죽였던 현장 바로 너머에 독일군 장군들이 춤을 추며 밥을 먹었던 식당이 불과 십 미터 거리에 있었습니다. 철학의 대가들과 시대를 풍미했던 지성인들이 특히 많이 나왔던 독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랬던 사람들 속에서 죄책감 없이 다른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는 죄악된 모습을 함께 발견합니다.

이런 어그러진 시대 앞에 하나님께서 나를 쓰신다! 만물의 때보다도 못하며, 죄인의 괴수요 천하에 못된 나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서 써 주신다고 하는 놀라운 감격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 바로 여기에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원망과 불평 속에 살아갑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여기에서 원망은 '투덜대는 불평'을 의미하며, 시비는 '악의 있는 논쟁'을 의미합니다. 결국 원망과 시비는 악의 있는 마음으로 불평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런 말씀으로 보아 당시 빌립보 교회에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원망과 시비가 일어났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큰 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더라.’는 가십(gossip)으로 망한다.’ 목회학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작은 원망과 시비의 싹이 자라서 위태롭게 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에는 애굽에 있다고 원망하였습니다(출2:23). 또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는 애굽에서 나왔다고 원망하였습니다(출14:11~12). 그들은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출15:24).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출16:7).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공급해 주셨는데도 고기가 없다고 또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계속해서 원망과 불평이 그들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입을 벌렸다 하면 원망이요, 불평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인해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황하며 죽도록 고생만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과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이 원망과 불평을 잘하는지 아십니까? 어린아이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의 비유를 맞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요구사항이 많습니다. 그런데요, 영적으로도 베이비 같은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원망과 불평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매사가 불평입니다. 원망입니다. 환경만 바뀌면 좀더 잘할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뀐 환경에서도 마찬가지로 불평합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항상 제자리 걸음입니다.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반면에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어지간한 일을 당해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한다할지라도 오히려 그러한 환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인내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로 말미암은 문제가 생겨도 인내하며 관용으로 대합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믿음이 계속적으로 자라갈 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3.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살아갑니다(16-18절).16절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함이라” 지금 바울은 자신의 삶을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경주자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42.195km 달려 가장 먼저 선착할 때 우승의 월계관을 받아쓰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변칙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정해진 코스에 따라 성실하게 달려야 합니다. 중간에 사이 길로 온다던지, 아니면 다른 교통수단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일등으로 선착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실격판정을 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결과를 얻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전 9: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15:3절에 ‘날마다 나는 주노라’고 자신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두 가지 비유를 드는 가운데 경주의 비유뿐만 아니라 옷감을 짜는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여기 “헛되이 수고한다.”라는 말을 아돌프 다이스만이라는 사람은 바울의 텐트 짜는 경험과 연관시켜 설명합니다. 텐트를 하나 짜기 위해서는 긴 시간에 걸쳐서 힘든 노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량품 내지는 불합격품으로 판정을 받아 고객으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한 경험이 “헛되이 수고한다.”라는 표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빛 된 삶을 살 때 자신의 사역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소망이 가장 귀한 것으로 알았기에 그는 지금 깊은 감옥에 갇혀 온갖 박해와 질병에 시달린 채 이 감옥에서 언제 풀려날지 기약도 모르는 어쩌면 사형 언도를 받을 수 있는 두려움과 절망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개척한 빌립보 교회를 향해 편지를 보내면서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오늘 이 아침 묻습니다.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나를 믿어주신 그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까? 일본의 사무라이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칼 두자루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 일본의 대표적인 무사 계급입니다. 우리나라에 선비가 있다면 일본에는 사무라이가 있습니다. 이 ‘사무라이’라는 단어는 한자어로 모실 시(侍)자인데 그 한자어를 일본말로 읽으면 “사무라이”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무라이는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성주(다이묘)를 위해 죽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러운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입니다.

하물며 우리 성도의 정신이 이보다 못해서 되겠습니까? 성도가 모시는 주군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주님을 모실 수 있다는 사실, 그 주군이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의 성도들을 생명 다해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큰 영광이요, 자랑이요,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으로 충만했던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도 나와 같은 이유로 함께 기뻐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기쁨이 고상한 동기의 기쁨이요, 성령께서 주신 기쁨입니다. 세상이 주는 천박한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을 바울은 몸소 경험을 했고, 이 기쁨의 삶을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18절에 나타나는 ‘이와 같이’와 ‘함께’라는 두 단어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혼자 이 기쁨을 누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만 비범한 능력자로 위대한 리더자로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함께 하는 공동체로 모든 성도와 함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간절히 소망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소원을 안고 이 결실의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려고 합니다. 우리 동성 교회가 진정 교회다운 교회로, 하나 되는 교회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세상 앞에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 하는 교회로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것이 힘듬이 있고 고통이 있더라도 함께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해 내 삶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면 또 하나의 열매를 위해 우리 교회가 기쁨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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