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고 싶은 사람" 빌2:19-24 빌강⑦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9-13 |
조회: 1236
오늘 말씀을 들어가기 앞서서 고 함석헌 선생의 유명한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히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생각할 때마다 이런 고마운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내 주위에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행복한 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이런 분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행복해지고 힘이 솟아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생각할 때마다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상처만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솟고 원망이 일어납니다. 이런 사람은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래서 생각도 하기 싫고 정말 꿈에도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지만,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 가운데,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만나서 함께했던 시간들이 어떠했느냐에 따라서 두고두고 그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진즉 헤어지지 못한 것이 원통할 만큼 쓰라리고 아픈 기억으로만 남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울의 상황을 보면 그는 지하 깊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것도 칡흙 같은 어두움과 습기 찬 짚북데기를 뒤짚어 쓰고 온갖 박해와 질병에 시달린 채 풀려날 기약마져 없는 감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한 복판에서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특히 자신과 함께한 숱한 사람들이 왜 생각이 안 나겠습니까? 그는 이 절박함이 다가오는 시간에 디모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 19-20절에서 디모데를 빌립보로 보내기로 하면서 “너희 사정을 디모데보다 더 잘 진실하게 살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만큼 목양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다 바친 것입니다. 그러니 숱한 사람들을 겪으면서 이 디모데를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를 얼마나 귀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전4:17절에서 디모데를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신한 아들”이라고 소개했고 딤전1:2절에서도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야말로 바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은 정말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을 만큼 사랑한 이 디모데는 어떤 사람일까요?
1.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19절)
19절에 보면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램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함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란다’는 것은 지금 바울이 빌립보 교회가 처해 있는 현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그 일을 감당하는 일에는 디모데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있겠지만, 빌립보 교회의 문제를 수습하고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면서 내가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도 아시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믿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날처럼 불신이 높아가는 시대에 인간관계에 있어서 믿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사람을 믿으라니요? 차라리 우리 집 개를 믿지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왜 개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개는 배신을 안 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복날에 개를 배신하지요. 사람은 우리를 배신합니다.
요즘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 /span>서로 돕고 살아야 할 이웃 간에 신뢰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는 부부가 서로를 의심하며 살아갑니다. 피를 나눈 부모와 자녀 간에 신뢰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신뢰했던 사람으로부터 실망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을 드리지만, 사람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신뢰의 대상으로 삼으면 나중에는 실망하고, 심하면 상처까지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신뢰의 삶속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에 어떤 인생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런 자기에게 도리어 긍휼을 베푸셔서 주의 사도로서의 직분과 능력을 주신 것을 넘치도록 풍성한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 은혜 앞에 선 바울은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삶을 믿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 이 디모데에게 자신의 사역을 맡깁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누가 고마우십니까? 저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참 고맙더라고요.
어떤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랍니까? 믿어주는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라납니다. 언제나 자식을 비판의 눈초리로 감시하고, 학교에서 어떻게 하는지 조사까지 하고, 그렇게 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믿어주어야 할 줄 믿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루즈벨트 대통령입니다. 그는 1921년 어느 날, 가족과 함께 별장에서 쉬던 중 이전에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다리의 통증을 느꼈고 그 이후로 서서히 다리가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소아마비였습니다. 옷도 자기 손으로 입지 못하고 두 다리도 쓸 수 없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친구들과 동료들은 루즈벨트의 정치 생명도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인 엘레나만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남편을 격려하며 곁을 지켰다. 어느 날 루즈벨트가 엘레나에게 “내가 이런 장애인이 되었는데 지금도 날 사랑하오?”라고 묻자 그녀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 것이 아니예요. 나는 당신의 전부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답니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루스벨트는 자신의 장래에 비관하지 않고 11년 뒤 미국의 32대 대통령이 되었고 이후에 처음으로 4번 연속 대통령직에 올랐습니다. 이와 같이 루즈벨트가 장애를 극복하고 가장 용기 있는 대통령으로 우뚝 서기까지는 늘 그의 곁에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엘레나의 숨은 역할이 있었습니다. 엘레나의 내조가 없었다면 루즈벨트라는 위대한 인물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만큼 믿어주어야 합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을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주님은 일곱 번 잘못하고 일곱 번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해도 그 사람을 믿고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나 사람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변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내가 회개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번 붙은 딱지를 떼려고 하면 10년이 걸린답니다.
2. 그는 진실한 사랑으로 교인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20절)
디모데는 열심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일하되, 일시적인 열심과 사랑이 아닌 진실된 열심과 사랑으로 일하였습니다. 20절에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없다’ 무슨 말입니까? 디모데를 보면 그가 어떤 자리에 있던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소명을 붙잡고 그 교회에 자신의 사명을 다 할 때까지 인생을 걸었습니다.
19절을 보세요. 여기보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잠깐 동안 지배할 일회성의 사랑과 열심으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진정한 사랑과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된 오늘 우리도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내 즐거움과 나의 쾌락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나를 통해서 다른 누군가가 기쁨을 누린다면 마땅히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내 주변의 사람들, 그들의 약함과 허물을 내가 짊어짐으로 그들이 기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의 사명이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화가 우리를 그렇게 세뇌시키기 때문입니다. ‘내 이득을 얻는 일에 주저하지 마라.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먼저 찾아서 누려야 한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면 너만 바보가 되는 거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회에 적응되어 갈수록 사람들은 양보하는 법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 만족하면 그만이고, 자기 자신의 권리만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13년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윤리연구센터가 전국 초·중·고등학생 2만 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해서 ‘2013년 청소년 정직지수 조사 결과’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거기에 이런 항목도 있었습니다. ‘이웃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나만 잘살면 된다.’는 항목에 초등학생은 19%가, 중학생은 27%가, 그리고 고등학생은 36%가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그리고 고등학생으로 성장해 가면서 이기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아이들이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렸을 때에는 이웃의 어려움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관심사이고 내가 가슴 아파해야 하는 일로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웃의 어려움과 아픔이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로 성장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자화상인지도 모릅니다. 갈수록 이기주의적이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최소한 교회만은 진실한 사랑으로 헌신적인 희생을 다해 가며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3. 바울은 디모데를 동역자로 알고 함께 주의 일을 해 나갑니다. (22절)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여기 디모데의 비전은 자기의 출세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성공에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 는 말은 동역자로 함께 복음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권적인 사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동업자라고 말하고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을 동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숭고한 목적을 위해 함께 희생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로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동역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뜻이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뜻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중요하고 위대한 인생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요3:16절에 보면 그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또 인생의 가장 위대한 일은 무엇입니까? 롬1:16절에 보면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다른 이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기에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주를 위해 살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일은 예수 믿고 그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일을 위해 함께 동역한다는 게 얼마나 소망이 넘치겠습니까? 세상은 참으로 차갑습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너무도 매정합니다. 쓰고 나서 쓸모 없으면 가차없이 버립니다. 제가 살면서 경험을 한 것 중에 하나가 우리 사회는 사람을 쓰고 나서 버리는 사회라는 겁니다. 사람을 길러주는 사회가 아닙니다.
대기업만 봐도 명문대를 고생해서 나온 아이들을 뽑아서 새벽부터 밤까지 부려먹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새벽 6시에 출근 버스를 태워서 밤 9시에 떨어뜨립니다. 가족, 취미, 모든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회사만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가족, 신앙, 모든 것을 뒤로하고 회사를 위해 희생한 그 사람들을 3,40대 초반에 잘라버립니다. 명퇴를 시키지요. 이것이 우리 사회의 풍토입니다. 저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저 사람은 내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위험한 세상입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목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항상 수단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는 말은 복음을 위해 고난도 희생도 아픔도 함께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바울도 많은 고난을 받고 살았지만, 어쩌면 디모데가 바울보다 더 많은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질 수만 있다면” 하며 아파했을 것입니다. 고통의 연단 없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수많은 연단이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섬기기 위한다면 엄청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 누군가가 땀과 눈물과 피를 “기적을 창조하는 액체”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땀은 강건한 육체를 창조합니다. 기도의 눈물은 평안한 마음을 창조합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부흥을 창조합니다. 어떻게 주의 동역자라고 하면서 자기는 손가락하나 까닭하지 않고, 주를 섬겨 나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희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희생을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제가 신학교 시절에 입학금과 학교 등록금을 내주시고 저를 공부하는 일에 도운 장로님 내외분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내외분은 일반 순경으로 시작을 해서 서울 도봉구 서장까지 지낸 정말 모범적인 장로님 가정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를 드렸고, 주일이면 자신의 가정을 열어 찬양대원들에게 항상 점심을 지어서 봉사하던 가정입니다. 가난한 달동네였지만, 그분들의 희생과 섬김은 수많은 주의 종들과 사회 곳곳에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저 역시 그 사랑을 입었습니다. 복음의 향기가 그 달동네를 소망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잊을 수가 없어서 찾아 문안 인사를 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세상은 이런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아무리 불신이 가득하고 부조리한 시대라 할찌라도 이런 만남이 필요하지 않나요? 오늘 당신이 이 사람이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디모데와 같이 남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자신을 받아준 그 사랑 앞에 남을 믿어 주며,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생각하며, 넘어진 자를 과감하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자!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 불신과 낙담으로 인해 넘어져 가는 이 한국 사회가 다시 일어날 줄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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