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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동역자 - 그 아름다운 이름" 빌2:25-30.⑧ 2015년 9월20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9-20 | 조회: 1349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연단을 통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더구나 소중하고 값진 것일수록 더 많은 연단의 과정을 겪어야만 합니다. 성경에서도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연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들에 대한 비유를 여러 가지를 통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금이나 은과 같은 보석이 보석이 되기 위해서는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금이나 은, 그리고 모든 광물은 연단을 통해서 귀하게 쓰임 받는 광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금광에서 캐낸 금덩이라 하더라도 용광로에 들어가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연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 금덩이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갔다 와야 하는 고통이 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야만 합니다.

금은보석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쓰는 기구들도 풀무 불에 연단되어야만 필요한 도구가 됩니다. 낫이나 호미와 같은 농기구를 만들 때에 대장장이는 무쇠덩어리를 풀무 불에 집어넣고 뜨겁게 달굽니다. 그리고 달궈진 무쇠덩어리는 꺼내 망치로 세차게 두드립니다. 그런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한 후에야 대장장이가 만들고 싶어 하는 낫이 되기도 하고, 호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연단의 과정이 없이는 그 어떤 연장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을 닮아가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욥이도 욥23: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가 얼마나 힘든 고난의 시간을 보냅니까? 그러나 그 고난의 시간을 연단으로 보았습니다. 그 과정이 끝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정금같이 만드실 것을 소망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그처럼 보배로운 사람, 존귀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이름의 뜻은 ‘Charming'입니다. ’매혹적‘이라는 뜻입니다. 보석처럼 빛난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빌립보 교회 성도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있는 사도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가 선교비를 보내기 위해 이 에바브로디도를 선택해서 보낸 것입니다. 단순히 돈만 전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섬기도록 교회에서 위임을 받고 왔습니다. 그가 바울을 섬기면서 얼마나 충성을 했던지 그만 병을 얻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죽었다는 소문이 빌립보까지 전해질 정도로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온 성도들의 염려와 걱정, 그리고 바울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중병에 걸린 에바브로 디도를 고쳐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자신의 서신을 들려서 보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가 아팠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성도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을까 염려해서 지금 빨리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 성경은 그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9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에바브로디도를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존귀히 여기라 말씀합니다. “존귀히 여기라”는 말은 “하나님처럼 임금님처럼 높이라”는 뜻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섬기며 사랑을 베푸는 그런 에바브로디도를,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노종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사람, 이런 사람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이런 사람들을 존귀하게 하나님처럼, 임금님처럼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생을 살아가면서 항상 평가를 받고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명한 거장 화가인 미켈란젤로가 씨스틴 채플의 그 천장 벽화 프레스코를 거의 완성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작품은 이제 끝난 것으로 보여 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천장 을 향해서 마지막 그 finish 터치를 위한 손질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도왔던 조수들 가운데 한 사람 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젠 끝나지 않으셨습니까?" "자네 눈에는 끝난 것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내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그리고 몇 달을 더 그는 계속해서 이 작품에 매달렸습니다. 마침내 작업은 완전히 마쳐진 것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작업 도구를 치우지 않고 계속 천장을 응시 하면서 그 장소를 맴돌았습니다. 다시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제는 정말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미켈란젤로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내 눈에는 끝났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 주님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를 쓸 당시에도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언제 풀려날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사도 바울은 몸이 몹시도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종합병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몸이 몹시도 약했고, 병으로 인해 고생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몸도 좋지 않는 사람이 열악한 감옥 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힘든 삶이라 할지라도 살아남아서 그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세운 교회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사역을 하는데 생활의 염려를 알고 정말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을 담당 사람이 우리가 이 아침에 보게 되는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이 사람을 존귀히 여기라는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몸을 사리지 않고 자신을 돌보았던, 이 에바브로디도를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여기라는 이 바울의 심정에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여기 30절을 보십시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런 뜻입니다. 산악인들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고산들을 오르기 위해 등정하다가 목숨을 잃는 소식을 듣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느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내 거는 것입니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하여 마치 등산가가 등정을 위하여 목숨을 내 걸고 앞을 향하여 나아간 것처럼 에바브로디도는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은 아름답고 건강합니다. 목표가 바른 것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도 불사하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물살을 가르고 거세고 높은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거대한 추진력을 가진 거선과도 같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 사명을 ㉣聆歐 위해 죽음의 위기에서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생명을 다한 충성이야말로 진정한 충성이요, 온전한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께 생명을 다해 충성하셨습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대부분 순교한 것도 이런 충성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게 하신 것도 생명을 다해 온전히 충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내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말은 복음을 증거라는 일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사람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바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를 물으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런 에바브로디도를 향해 바울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25절입니다. “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한 사람을 이야기할 때 이보다 더 멋진 추천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은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 효용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저에게도 성도들이 진학이나 취업 등의 이유로 추천서를 써 달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추천서를 쓰면서 죄송할 때는 솔직히 그 성도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추천서를 써야 하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면 대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추천의 글을 쓰게 됩니다. 그러나 잘 아는 성도일 경우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오랜 시간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을 구체적으로 써줍니다. 본문 말씀에는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인물평이 나옵니다. 그저 아부하기 위해 건성으로 한 것이 아닌, 에바브로디도를 향한 바울의 존경과 감사가 담긴 진심 어린 평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5절에서 그를 ‘나의 형제’라고 표현합니다. 이 형제라는 단어는 바울 서신 전체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으로 특히 빌립보서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표현은 바울과 에바브로디도가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사역 관계가 아닌 수평적이고 친밀한 관계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나이와 역할을 넘어 친밀한 영적 교제가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나의 부하, 나의 사람, 나의 일꾼’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역할과 위치가 다를 뿐 계급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권위주의적, 수직적 리더십이 아닌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바울의 수평적 리더십이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로 표현합니다. ‘함께 수고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쉬네르곤’으로 동역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가 바울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세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동역자는 '어떤 일에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함께 보는 이 빌립보 서신에 나타나는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 이 바울은 한마디로 복음에 미쳐 산 사람들입니다. 감옥에서도 기죽지 않고 세상을 더 걱정합니다. 이런 열정이 있기에 그들이 가진 이 복음의 능력 앞에 거대한 로마가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나는 우리 동성 교회가 지금의 현실 앞에 다시 힘을 얻는 것은 이런 세 瓚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나아갈 줄 아는 사람들이 하나로 모여서 동역자로서 함께 나간다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온땅에 펼쳐 나가는 역사를 일으킬 줄로 믿습니다.

이 ‘함께 군사된 자’라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 사역은 엡6:10절 이하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적인 싸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명을 부여받은 모든 교회와 성도가 이 땅에 존재하는 방식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로 존재합니다. 이 싸움은 창세 이래로 계속 이어져 왔으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될 싸움입니다. 흑암의 권세 아래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 곧 영적인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군사 된 자’라는 말은 바울과 함께 에바브로디도 역시 이 복음의 영광스러운 싸움에 동참하여 충성스럽게 싸운 군사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딤후2:3절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군인이라는 신분은 늘 전투를 전제로 존재합니다. 사실 군인의 가치가 가장 빛나는 자리는 전쟁터다. 전쟁터는 위험한 곳입니다. 수고와 고난이 있는 자리지만, 그러나 동시에 승리의 영광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민수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백성들의 숫자를 헤아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움에 나설 용사들의 숫자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싸움이 있기에 용사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실재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든 싸우지 않든 모든 성도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차출된 자들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의 군사 된 본분에 충실하게 임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본분을 모른 채 자기 역할을 위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성도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 만족에 빠져 안주하고 있는 교회를 향해 ‘사탄의 포로수용소가 된 교회’라고 책망하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용사들이 모인 군대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교회 됨은 영적인 사움을 감당하는 용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처치리스’(Churchless)라는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2008년부터 2014년 사이에 미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18차례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무려 43%나 된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는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 밖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30%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건 비단 미국에서만의 일은 아닙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지난 2013년 1월에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소위 ‘가나안 교인’이 무려 백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예수는 믿지만 교회 나가기 싫어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만 백만 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그들만 비난할 순 없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만든 원인이 분명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떠난 신앙인들이 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완벽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나름대로 다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큰 문제를 안고 있고, 어떤 교회는 작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여러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어떤 교회는 몇 개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절대 완벽한 교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감에 있어 전혀 불필요한 교회 또한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보다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없는 교회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땅에 문제없는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맘에 들지 않아서 교회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교회 다니기를 포기한 교회 밖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할 때 하나님을 먼저 생각한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결정한 것이겠습니까? 신앙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수없이 다가오는 문제의 언덕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포기가 아닌 해결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복음전도자인 루이스 팔라우 목사님은 오늘날의 교회는 ‘퇴비’와 같다고 했습니다. 퇴비는 쌓아 놓기만 하면 악취를 풍기며 썩지만, 밭에 골고루 뿌려 주면 농작물들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모여만 있다면 악취를 풍깁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한가운데로 흩어져야 합니다. 교회가 흩어지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교회 안에 말썽이 생기게 됩니다. 자꾸 모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비만입니다. 살찌는 것과 건강하게 되는 것은 다릅니다.

지금 바울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이런 동역자들이 있기에 외롭거나 그 고난 중에서도 지치지를 않았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에바브로디도도 하나님 나라의 귀한 밑거름으로 드려진 사람입니다. 이런 신실한 일꾼들의 생명 다한 희생과 섬김이 부패한 시대 앞에서 오히려 복음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동역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실 때, 나의 도움과 협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도 주님 없이는 살수 없지만 주님도 우리 없이는 살수 없는 분입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도 주님과 함께, 죽는 것도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원리는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또 모든 일에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지만 주님도 우리의 도움을 받으셔야만 주님의 일이 되어집니다. 주님께 보답하는 일은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일하고 함께 영광을 받읍시다. 목숨을 내놓고 주님을 섬기는 동역자가 되는 것은 영광입니다 주님의 동역자로 살고, 영광스런 하늘의 자랑스런 이름이 기록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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