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본향" 히11:13-16. 2015년 9월 27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09-27 |
조회: 1253
추석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추석은 민족의 가장 큰 명절로 시기적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서늘하며 들녘엔 오곡백과가 넘실댑니다. 그러므로 모든 백성들은 고향이나 식구들을 찾아가 이날을 즐깁니다. 올해도 수천 만 명의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는 열심은 대단합니다. ‘귀성 전쟁’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고향길이 고생길이지만, 기어코 고향을 찾아갑니다. 그래도 고향 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한결같이 환합니다. 그만큼 고향은 좋은 것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미국 LA에 특이한 교회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언제나 그리운 고향 교회” 우리 한국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명절이 되도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향민입니다. 남북이 분단된 우리나라의 경우 얼마나 많은 실향민들이 있습니까?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명절 때가 되면 그 고통이 심해져 하다못해 임진각에 가서라도, 아픈 마음을 달래야 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제 10월이면 그동안 중단이 되었던 남북 이산 가족이 한 자리에 모임을 갖는데 우리나라 실향민 숫자가 6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상봉 신청자 6만 6,000여 명 중 단 100명이 가족을 만나게 되는데 정말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가 아닙니까?” 한 분이라도 살아생전에 가족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데, 이산가족의 만남이 지금처럼 100명씩을 만나게 된다면 전부 성사되려면 60년이 넘게 걸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제 80이상 고령자가 대부분인데 정말 고향을 그리워하고 또 혈육의 만남이 얼마나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토록 보고 싶고,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실향의 아픔은 처절합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남하한 새터민들이 있습니다. 그 망향의 한을 달래기 위해 임진각을 찾아 눈물을 흘립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곳이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아닙니다. 막상 그리운 고향을 방문했지만 그곳이 옛날 고향이 아닌 것을 발견하고 실망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정이 넘치고 추억이 깃든 고향을 기대하고 찾아갔는데, 변해버린 고향의 모습에 오히려 실망만 하고 돌아온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가 사모하고 있는,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의 진정한 고향은 어느 곳일까요? 어디에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있을까요? 하늘에 있습니다. 16절을 다 같이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 ‘더 나은 본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땅의 고향도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고향’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는 땅 위의 고향도 있지만 동시에 하늘 위의 고향도 있다는 것입니다. 땅 위의 고향은 육신의 고향이고, 하늘의 고향은 영혼의 고향입니다. 흔히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불행한 사람은 이 땅의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좋은 고향’ 천국을 잃어버린 ‘영적인 실향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의 고향은 언젠가는 떠나야 하고, 또한 사라지고 말 겁니다. 오직 하늘나라만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고향보다 하늘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 불쌍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추석 명절을 맞이해서 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여러분 가운데 언젠가 우리가 가야할 영혼의 고향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더 나은 본향인 천국을 사모한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나그네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여러분, 나그네가 어떤 사람입니까? 잠시 동안 머무르다가 가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여관이나 호텔에 하루나 이틀 혹은 사나흘 등, 잠깐 동안 머무른 다음, 체크아웃한 후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외국인처럼, 나그네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고향이 바뀝니다. 육신의 고향이 아닌 영혼의 본향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내가 사는 집이나 땅이 나의 것이고 내가 여기서 영원히 안주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우리의 육신의 삶을 장막 집으로 비유합니다. 육신의 장막은 언젠가 무너집니다. 여기서 장막 집은 ‘스케노스(skenos)’ 라는 단어인데 ‘임시로 지어 놓은 건물’ 이란 뜻입니다. 이 땅의 육신의 삶은 모델 하우스와 같습니다. 아파트를 분양할 때, 모델하우스를 짓고 사람들에게 보여 줍니다.
보통 아파트 모델 하우스 짓는데 100억정도 든다고 했습니다. 특히 인기가 있는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는 사람들이 북세통을 이룹니다. 내부구조를 보기 위해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이태리제 대리석을 붙여놓고, 번쩍이는 황금 욕조에 누가 봐도 이 아파트는 꼭 사야겠다고 결심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고 장식한 모델 하우스라도 해가 떨어지면 문을 닫습니다. 멋진 침대에 잠자겠다고 눕는 사람 없습니다. 어느 날 보니 그 화려하고 멋진 모델 하우스가 철거된 것을 보았습니다. 육신의 장막은 영원히 살아갈 집도 영원히 거할 땅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다 버리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나그네는 여행자입니다. 지혜로운 여행자는 짐을 최대한 줄입니다. 짐이 많으면 여행의 즐거움이 반감됩니다. 간수하느라 신경도 쓰이고 여행의 재미를 놓치기 일쑤입니다.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소유에 대해 너무 집착하면 세상 근심으로 괴로워지고, 천국 가는 길에 방해를 받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진정한 고향이 아닙니다. 여기 아마 40대 이상의 분들은 어린 시절 동네 한 구석진 마당이나 아니면 동네 학교 마당에 한 구획을 정하고 방과 후 친구들과 어울려 해가 저물 때까지 공놀이, 자치기, 줄넘기, 땅 뺏기, 숨박꼭질 게임을 하고 놀던 추억을 안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맨 처음 전도사로 부임한 교회는 마당이 큰 교회였습니다. 하교 길이 되면 초등학생들이 올라와서 교회 마당에서 놀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심방을 하고 오니까 학생들이 교회 마당에서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네모난 선을 긋고 뼘을 그려 놓고 병뚜껑을 퉁겨서 가는 곳에 선을 긋고 3번에 뼘 안으로 들어오면 자기 땅이 되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이 놀이를 하다가 싸움이 생겼습니다. 서로 밀고 당기고 이 땅은 내 땅이다, 이 땅은 내가 딴 땅이다 하며 싸움이 생겼습니다. 깔리고 깔고 하다가 피가 흐르는 심한 싸움판이 벌어졌습니다.
이 시끄러운 소리에 교회 사찰 집사님이 빗자루를 등 뒤에 숨기고 와서 ‘전도사님 어쩔까요 쓸어버릴까요 하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한참 내 땅이라고 싸우는데 집사님이 빗자루를 들고 썩썩 쓸면서 “야! 이놈들아 어찌하여 이 땅이 너희들 땅이냐 교회 땅이지” 하며 다 쓸어 버렸습니다. 서로 자기 땅이라고 싸우던 이들은 멍하니 섰다가 툴툴 털고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 역시 어느 날 인생의 놀이터에서 해 저무는 줄 모르고 게임에 분주한 우리에게 저 하늘에 계신 분이 “그만 놀고 집으로 오너라”고 부르실 순간이 온다는 자각이었습니다. 거기에 누가 항변을 하겠습니까? 롯의 처를 아시죠? 그는 소돔성이 유황불 심판을 받을 때 천사의 지시로 황급하게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중도에 소금 기둥이 되어버립니다. 왜 그가 자꾸 뒤를 돌아보았습니까? 두고 온 짐이 많아서 그런 거죠. 재물도 있고, 향락도 있고, ... 여러분, 세상에는 정말 우리를 마취시키는 게 너무 너무 많습니다. 부귀와 영화, 향락 등 ... 자칫 잘못하면 이런 데 빠져 정신을 못 차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버리는 연습, 떠나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생활의 군살 빼기, 마음의 욕심을 버리는 심령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천국의 기쁨과 평안이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면 환경과 관계없이 기뻐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바울이 말했던 자족의 비결입니다. 빌4:11-12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올라가기 전, 잠시 잠깐 이 땅에 머무르고 있는 나그네인 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 천년만년 살 사람은 이 자리에 단 한 사람도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땅에 잠시 동안 머물러다가 떠날 나그네입니다’라는 나그네 의식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16절 상반 절에 보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여기 “사모한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뜻은 “어떤 것을 얻을려고 애를 쓴다”는 말 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언급되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 등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도 육신의 고향이 있었지만, 그들은 육적인 고향을 사모하기보다 영적인 고향인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고향보다 더 나은 천국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큰 기대를 걸고 인생을 투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눈에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이들은 잠시 뿐인 세상의 쾌락이나 명예, 그리고 인기, 권력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분 나를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으신 주님의 사랑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담대하게 증거 합니다.
여러분, 1세기를 살았던 순교자들의 그 대담한 신앙의 모습 어디에서 왔습니까? 야생동물의 밥으로 그들의 몸뚱이가 던지움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찬양을 부르면서 원형 경기장을 걸어가던 1세기 크리스챤들의 그 담대함 천국신앙이예요. 천국 믿었어요. 이 타계신앙이 라는 것은 그것이 이 타계적 영향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오늘의 삶을 바꿔요. 천국을 믿는 다면 오늘의 삶이 달라져요. 자, 내가 이 땅 에서 좀 손해를 봐도 지금 당장 조금 잃어버려도 주께서 영원한 것을 준비하셨다. 초연할 수가 있잖아요.
‘제임스 그레이‘ 라는 유명한 신학 학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길 도상에서 조그만 어려움이라야 내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 추석날 때보면 이 고속도로가 꽉 메워 지잖아요. 고향 가는 사람들 아마 그 고생을 하면서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결심을 할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고향에 가나 봐라. 금년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가요. 고생 고생하면서 막상 고향에 딱 도착하는 순간 다 잊어버리거든요. 고향에 찾아 온 기쁨. 우리가 확신한 본향. 저 천국에 영원한 소망이 확실한 것이라면 그 길 도상에서 우리가 겪는 작은 어려움 견딜 만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사는 동안 세상의 환호와 박수소리를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우리는 어떤 영접을 받을까요? 세상의 그 어떤 환대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런 모습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나그네 인생입니다. 나그네 된 우리의 삶이 때로는 힘들고 어렵고,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 아픔과 고난의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본향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쉬운 길로 가라고 유혹하는 사탄의 공격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본향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세상에 빠지지 않고 믿음의 길, 승리의 길, 천국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소망 중에 인내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받는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다가올 영광과 족히 비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16절 하반 절에도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여기에서 말하는 ‘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줄 아십니까?
히11:35절 이하를 보시면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받았던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본향으로 삼고 살아가는 나그네의 길은 때로는 어려움이 있고, 때로는 고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살기 위해서는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때로는 불편할 수도 있고, 때로는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가기 위해서 때로는 환난과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시84:10) 처럼,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고,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훨씬 나은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땅에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성장한 고향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명절을 맞고 기족과 친지를 만날 때, 정말 우리 성도들이 땅에 것에 매여 내가 만난 예수 한번 전하지 못하는 천국 신앙을 담대하게 표현 하지 못하는 그런 인생이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지켜주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한 성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이미 그 성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이란 병으로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고통 속에서 소리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예리하게 파헤쳤던,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습니다. 그는 당시 계약 결혼이라는 당시 상상을 초월한 문제를 사회에 던지고 그 유명한 시몬느 드 보브와르와 정말 젊은이들의 가슴에 전통적인 결혼관을 무너뜨리고 계약 결혼을 함으로 소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기도 했던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입원한지 한 달 만에 육신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그때 한 독자가 신문사에 이런 기사를 투고했다고 합니다. "....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죽어서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고, 마지막에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 것입니다. 이처럼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돌아갈 육신의 고향이 없는 사람도 불쌍하지만,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돌아갈 영혼의 고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고향에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 땅을 떠나면 가게 될 더 나은 고향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2015년도 한국 전통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있어도, 아무리 값비싼 명품을 걸치고 있어도, 아무리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녀도, 아무리 화려한 집에 살아도, 일단 죽으면 대부분은 영안실로 실려 갑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놓아두고 땅 속에 묻히게 됩니다. 오직 우리들이 사모해야 할 것은 영원한 본향,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화려하고 행복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 길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땅에 있는 것에 너무 미련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환란이나 핍박이 와도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고, 오직 믿음의 길을 걸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유업으로 상속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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