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 빌3:1 2015년 10월4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10-05 |
조회: 1233
오늘은 우리가 한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전도 축제를 선포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간이 얼마나 얼마나 긴장이 되고 또한 흥분이 되는 시간이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신앙인에게 있어서 기쁨이 넘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도 잃었던 한 생명이 주 앞에 나오는 것을 너무너무 기뻐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기쁨도 슬픔도 다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오늘은 ‘기쁨’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미 ‘기쁨’에 대해서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이런 제목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는 예수 믿는 사람만이 아는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설교를 들으면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묵상하면서 ‘나는 이 기쁨을 알고, 이 기쁨을 누리는 사람인가?’를 자문자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중 기쁨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쁨’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 기쁨을 얻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은 매일 기뻐하고 계십니까? 무엇으로 기뻐하십니까? 또 지금 내가 기뻐한 내용이 며칠 지난 후에도 계속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까? 우리가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기쁨이 계속적인 기쁨이 되지 못하고, 너무나도 자주 아픔과 괴로움과 슬픔이 우리의 삶을 휩싸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이 기쁨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1절은 비록 한 절밖에 안 되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 전체의 문제요, 또한 빌립보서 전체의 주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본문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이슈가 되는 이 기쁨의 문제를 놓고, 깊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말씀은 먼저 ‘끝으로’ 하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끝으로’ 하는 말씀은 이제부터 앞으로 하게 될 말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평생 부모님의 말씀을 안 들었다고 해도, “이게 내 마지막 당부이다” 하며 하시는 말씀만은 잘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남기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끝으로’ 하는 말은 ‘이제부터 하는 말이 아주 중요하다’ 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끝으로’ 하는 강조형을 쓰셨는데, 이제 그 강조하시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기뻐하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빌립보서는 모두가 넉 장밖에 안 되는 분량이지만, 이 속에 ‘기뻐하라’는 말이 무려 19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 기쁨이란 주변 환경이 평탄하고 평안하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죄수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제한된 작은 공간에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야 할 어떤 죄를 지은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도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해서 로마로 오게 되었습니다. 언제 로마 황제 앞에 가서 재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재판 받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불명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감옥에 갇혀 있다면, 그리고 언제 재판을 받게 될지, 어떤 판결이 나올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남들보다 더 누리고 거머쥐고 살아도 진정한 기쁨을 갖지 못할 때가 많은데 도대체 감옥이 빼앗아가지 못하고 죽음의 위협도 빼앗아가지 못한 그의 기쁨의 인생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기쁨의 삶을 사는 비밀, 그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상상도 못하는 탁신과 고통이 베어 나오는 암울한 환경에서도 바울은 이 기쁨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의 기쁨’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첫째, 구원 얻은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절대적인 기쁨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정말 이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구원은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시큰둥해지고 복음에 감격하는 삶이 식어지는 순간 신앙의 활동은 인간적인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무덤덤해집니다. 좋은 집에 이사를 가도 세월이 지나면 식상해집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구원의 감격이 식을 때 삐걱거립니다. 신자로 오래 믿었고 직분은 있어 봉사해야 되지만 내면에는 열정이 식어졌고 구원의 감격은 없고, 직분자로서 행동을 해야 하니까 자신을 포장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외식주의, 형식주의자가 되어 자신을 미화시킵니다. 신앙에 감격 없이 신앙생활하면 그것이 오래 못 갑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어려워지고, 상처를 받거나 시험에 들게 됩니다.
다윗을 보면 그가 범죄한 후에 그는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는 것 그 이상의 것을 구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전 존재가 회복되어서 다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시51:12절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자를 붙드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구원의 즐거움’이라는 단어는 [깊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기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가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배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이런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가 회복되었다는 증거는 바로 구원의 즐거움입니다. 다윗은 잃어버린 주님의 기쁨이 자신 안에 다시 넘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새롭게 일으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찬송가 151장에 보면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감격이 불일 듯 일어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펄펄 날아다닙니다. 수가 여인처럼 동네에 지탄의 대상인 그 여인이 십자가 앞에 죄사함과 구원의 기쁨을 누릴 때, 자신을 괄시하고 무시하던 그 동네에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달려가 자신이 만난 그 예수를 기쁨으로 전합니다.
저도 목회를 하는 힘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 그 힘이 저를 사역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백번 천 번이라도 주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은, 쓸모없고 소망 없는 나를 구원하신 은혜가 살아나면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복음을 경험하시기 바라고, 이미 예수를 믿은 분이라면 복음의 감격이 내 안에 식어지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모든 힘들이 나올 줄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입니다. - 할렐루야!! 저도 영적으로 다운될 때 십자가 찬송만 불러도 불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십자가만으로 충분합니다. 이 복음의 감격, 구원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장을 날마다 뛰게 합니다. 바울에게 십자가의 복음은 교리적으로 머리에서만 맴돈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바울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습니다.
둘째, 바울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기쁨은 성령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 성령의 인도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는데, 보혜사라는 말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인도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인도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에서 그분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영적인 소경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보내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로 기쁘게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마음에 큰 기쁨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 15: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기쁨이 충만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도 당신처럼 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기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누가복음 10:2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예수님은 성령 충만하셨기 때문에 기뻐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성령을 보내주시면서 주님처럼 기쁘게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기에 성령 충만한 사람은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 우리에게 돈이 없어도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혹 건강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환경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힘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력을 하고 애를 쓰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세수 좀 해라, 이 닦아라, 옷을 깨끗이 입으라고 잔소리를 해도 안 듣다가, 여자친구가 생기면 말할 것이 없어집니다. 내적 동기가 생겨서 하루에 열두 번도 씻습니다. 신앙의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내 인생을 붙잡고 그 은혜 앞에 서게 되면 내 삶에 새로운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사랑해주실까, 이렇게 하면 기도에 응답해주실까 하면서 포인트 쌓듯이 합니다. 그러므로 기쁨이 내속에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직전에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억지로 누가 하라고 해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자발적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여인입니다. 그 값비싼 향유옥합을 깨뜨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제자들은 조건으로 바라보니, 그것은 미친 짓이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나 삶 속에서 헌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의 헌신은 어색하지가 않습니다. 사랑스럽고 멋집니다. 기쁨의 품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헌신을 해도 어색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 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 속에서 나온 헌신이 아니면 힘들고 지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우리 힘이나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면 끝까지 가기가 힘듭니다. 핵심은 성령을 깨닫고 경험하는 것, 먼저 성령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이 우리 안에 생수처럼 터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볼품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도,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왜소하게 보일지라도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 살아가면 거기에 능력이 나타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 한복판에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자신 있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봉사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봉사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봉사하고 우리 힘으로 신앙의 삶을 살아가려 하면 힘만 들고 기쁨이 없습니다.
셋째로,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기쁨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와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생애를 보십시오. 고전 11: 23-27절에 보면, 그는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고, 사십에 하나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을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 가운데서 보냈으며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와 광야와 바다의 위험, 여러 번 자지 못했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고생스런 삶을 살았습니까? 사도 바울의 그와 같은 삶을 그 당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까?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는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에는 내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그 때는 정말 어리석게도 잘못 알고 악을 저질러 왔다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할 정도로 잘못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긍휼하심으로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하심으로 참아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잘못 살던 인생을 바꾸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기를 구원의 자녀로 삼아 주셨고 또한 사도의 직책을 감당케 하는 이 황홀한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신 하나님 앞에 적당히 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수고와 헌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희생과 수고 없이 생명을 건지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희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희생을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한 산동네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시고 신학을 마치신 젊은 목회자가 달랑 가방 하나들고 산 동네에 온 것입니다. 다 쓸어져 가는 허름한 집 하나를 개조해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사모는 굶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동네는 그를 환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은 그 동네에 살고 있는 희망을 잃은 수많은 실패자들, 내일을 체념한 채 사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내 놓았습니다. 그 눈물겨운 희생은 생명을 낳게 하는 참 기쁨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뭐, 여기 모인 여러분들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올 때 반드시 누군가의 배려가 없이 어떻게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은 외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여기 같은 말을 쓴다는 것은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란 우리가 반복하여 마음에 받아들이며, 또한 반복하여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굳건히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때문에’ 기뻐합 니다. 그러나 성경은 ‘때문에’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의 삶이 최악의 환경으로 바꿔질 수 있고, 인간관계의 어려움으로 배신당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위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슬리 웨더헤드는 "기쁨의 반대는 슬픔이 아니라 불신앙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터치 153 새 생명 축제에 비전 선포식을 가졌습니다. 전도가 되니 안되니 하는 현실에 메이지 말고 하늘의 기쁨을 가지고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좀 힘이 들고 어려움이 있어도 날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세상적인 시각이 아닌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항상 동행함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날마다 기쁨을 세상에 빼앗기지 아니하고, 복된 삶, 승리의 삶, 기쁨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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