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노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09-08-30 |
조회: 2420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노라 수24:14-18
지난 26일 수요일 새벽에 77세의 나이로 뇌종양으로 고생하던 케네디가의 마지막 수장이던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의 죽음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케네디 가문이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케네디가는 미국 정치뿐 아니라 격동의 20세기 세계사의 산증인이었다는데 이견을 달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케네디가의 화려함 뒤에는 ‘케네디가의 저주’라는 말이 나올 만큼 지독하고 끈질긴 불운도 따라다니지 않았습니까? 맏형인 조지프 케네디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사했고, 차남 존 에프 케네디는 대통령 재직 중, 삼남 로버트는 대선 유세 중 암살당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장래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존 에프 케네디의 아들인 존 케네디 주니어도 1999년 비행기 사고로 숨졌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인생이 이런 건가??하는 허무함이 깃들여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완벽한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저것 다 갖춘 것 같지만 잘 살펴보면 뭔가 부족한 게 있고,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별 수 없는 인간?입니다. 그런대도 그것을 모르는 듯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에 젖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한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는 인생의 석양에서 그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설교를 외치게 됩니다. 그가 역사의 무대에 섰을 때,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미래에 대해 얼마나 두려워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말씀하나를 붙잡고 그는 가난안 땅에 들어갑니다. 난공불락이라고 여겨졌던, 여리고성이 무너졌고, 가나안을 정복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 올 시간이 가까웠습니다. 그의 삶은 모두가 닮고 싶은 깊은 영성을 갖고 있었고, 신실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대하게 되면, 매우 무거운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기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무슨 말입니까? 지금 숨을 거두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지도자가 마지막으로 후손들에게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왜 이런 불길한 말을 할까요? 한 시대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의 마지막 절규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볼 때 자기와 함께 생사고락을 했던 기성세대가 영적으! 로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110세까지 살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애굽에서 태어나 40년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올 때 거의 40세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두에서 지휘할 때에는 거의 85세에 가까운 노인이었습니다. 이 노인이 가나안 정복을 끝내고 세상을 떠날 때가 110세이므로 가나안에 들어온 지 약 2, 30년 정도 됩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태어나 광야에서 2, 30여년 살던 사람은 가나안 전쟁을 치를 때 20대, 30대의 전사들이었을 것입니다. 손에 ! 칼을 들고 선두에 서서 나라를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110세가 된 시점이므로 약 30년이 지났습니다. 손에 칼을 들고 싸우던 20대, 30대가 이제는 50대, 60대로 다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이 해이해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겠기에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불안이 여호수아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수24:23) 기성세대가 집안에 우상을 갖다 놓고 살았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눈이 파랗게 살아있는데도, 주변에 있는 잡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받아 자기 집에 갖다! 놓았던 것입니다. 옛날에 광야에서 전쟁을 한참 치르는 긴장된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만하자, 배가 부르자, 돈이 많아지자 점점 해이해져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을 받아들여 우상을 집안에 갖다 놓고 남몰래 섬기며 가나안 잡족들이 하는 대로 부패한 행동을 모방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나안 땅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과연 무엇을 보고 자라겠습니까? 또 그들이 이끌어야할 다음세대는, 뭐, 이야기를 안 드려도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일제 36년 동안 뼈저린 고통을 겪었고,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는 광야와 같은 고난을 치른 세대입니다. 극심한 가난을 딛고 일어나 그래도 세계에서 11위 안에 들어가는 경제대국으로 발돋움을 할 수 있도록 한 썩는 밀알과 같은 세대였습니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면서 일만했을 뿐 여가가 없었습니다. 언제 취미생활을 했습니까? 언제 세계를 호흡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까? 일만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도 2, 30년 전부터 살만하고 여유가 생기고 사는 재미를 맛보자 변질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시인합니다. 신앙이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칙이 되지 못했습니다.
가난할 때에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사는 어떤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큰 집을 짓고, 여유 있게 살고, 여가를 즐기며, 재산을 축재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만이 나의 삶을 유지한다는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이 따로 노는 모순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우리의 아이들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고백하며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주님께 헌신하며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국 갤럽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당신이 장차 종교를 선택한다면 무슨 종교를 선택하겠느냐?"고 질문한 결과 대다수가 불교였고, 그 다음이 가톨릭이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니세프에서 조사한 기록을 보셨을 것입니다. 아세아 지역에서 17개국을 조사한 결과, "정말로 부모를, 어른을 존경하느냐?"고 물었더니, 존경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우리 나라 젊은이들 가운데 17%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평균 수치가 72%에 이릅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를 믿든 믿지 않던, 우리 기성세대는 다음세대에게 아무런 감동도 못 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뭔가 모순을 안고 있는 세대로, 변화의 대상으로, 개혁의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성세대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말씀을 통해 진단 받으면서 부끄럽게 생각해! 야 합니다. 우리를 비판하는 젊은 세대를 놓고 나무라기만 하면 안 됩니다. 섭섭하다는 말만 하면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가 청장년 예배와 자녀들의 예배를 같은 시간에 따로 드려지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절기를 지키는 주일에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보지만, 아이들이 참 힘들어하고 우리의 예배에 익숙치 못한 아이들이 많아요. 물론 이유야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수용할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의 자녀들이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고 예배의 소중성과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이 분명한가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자! 여호수아 시대를 보십시오. 지금 이 가나안에서 태어난 2세들을 보세요. 이들은 광야의 살벌한 생활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어 본 일이 없습니다.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구경한 일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적다운 기적을 체험한 일도 없습니다.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전쟁을 아는 세대인 그들의 부모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안정된 생활을 했습니다. 농사를 짓고 양을 치는 평화로운 목가적인 분위기에 젖어 아름다운 꿈을 먹으면서 자란 세대였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땀과 피를 흘려 뿌린 씨앗을 거두면서 행복하게 자라고, 신나게 젊음을 구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자신이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커다란 통증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러분! 왜 여호수아가 이런 비통한 심정을 가지고 이렇게 외치는가를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이런 원인이 바로 그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상에 젖어 사는 삶 때문임을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세워 오랫동안 종살이하면서 고통당한 자기 백성을 불러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셔서 그! 들을 애굽에서 끌어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을 애굽 사람과 구별하여 그들의 죄를 씻으시고, 모세를 앞장세워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것입니다.
애굽을 떠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혹독한 더위와 햇살을 피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홍해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길을 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다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지나자마자 영원히 애굽과 결별하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애굽 사람을 다시 만날 필요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출애굽사건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광야 40년을 살수가 있었겠습니까? 거기에는 먹을 것, 마실 것도 없습니다. 더욱이 200만 명이 넘는 숱한 사람들과 수백 마리나 되는 가축들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만나라는 귀한 음식을 제공해서 40년 동안 먹게 하셨습니다. 또 큰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갈라놓으시고 그 틈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40년 동안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 윱求. 그러나 가나안 땅에 머무는 동안 그 엄청난 은혜를 잊어버리게 된것입니다. 급기야 한 세대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들 속에 지난 날 애굽에 우상들, 그리고 지금의 가나안의 풍속과 세속에 물들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나 여러분에게는 우상이 없습니까?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입으로는 대단히 요란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찬송하지만, 마음속에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우상들이 자리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돈입니까? 쾌락입니까? 야망입니까? 아니면 이 인간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목적입니까?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우상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면 나도 모르게 잘못되고, 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켜 보면, 오늘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악한 세대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끔 이-메일을 체크하기 위해 컴퓨터를 열어 보았을 때, 아주 점잖아 보이는 메일을 클릭했는데, 여자의 알몸이 그대로 뜹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당하는 세대입니다. 악한 세대입니다. 이 마수에 걸려들어 구원받았지만, 그의 자원과 세월을 낭비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여기 ‘섬기라’는 단어가 곳곳에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 이외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이 다 그렇겠습니다만, 특별히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버리셨어요. 그 희생, 그 대가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라!!"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드리며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응접실이나 현관을 쓰는 빗자루를 안방 장롱 안에 잘 간수하고 있는 분은 없을 겁니다. 왜? 빗자루는 귀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다이아몬드 반지라면 끼지 않을 때 함에다 넣어서 안전한 금고에 보관할 것입니다. 귀중하기 때문이지요. 여자들에게 여러 가지 귀중한 것이 있지만, 아마 화장은 생명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화장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지요? 30분이고, 1시간이고 거울 앞에 앉아 있어요. 그것도 매일 말입니다. 화장할 때 몇 초만에 끝내지는 않습니다. 루즈를 정성껏 바르며 온갖 신경을 다 씁니다. 왜냐하면 화장이 중요하니까요.
하물며 인생이겠습니까? 구원받은 우리의 삶이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막살 수 있는 겁니까? 왜 인생이 불행해집니까? 왜 구원받았는데, 우리의 가정과 부부사이는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지 않는 겁니까? 이유는 하나님의 지혜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으면서도 내가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마구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하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참으로 나에게 복을 구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너희 인생 가운데 한 가지 해야 할 것이 있다. 앞으로는 지혜 있는 삶을 살아라!"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자세하게 주의하며 살아가거라!" 말 한 마디를 해도, 사람을 만나도, 돈 한 푼을 써도...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이제 이 피맺힌 설교 앞에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16-18절입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의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세겜에 모여 여호수아의 말씀을 듣던 모든 백성들은 말씀 앞에 결단을 합니다. 이는 엄청난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또 이미 젖어있던 우상을 다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결심을 해도 그 결심이 쉽게 무너지곤 합니다. 그래서 결심에 대해 계속적으로 상기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재차 그들의 결단을 확인한 여호수아는 그들이 자기들의 결단을 잊지 않도록, 증거를 세웁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 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여기 보면 지난 날 요단을 건너올 때 12돌을 취하여 기념비를 세웠던 것처럼, 또 돌 하나를 큰 돌을 세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모두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케네디가를 마지막 형제인 에드워드 케네디의 죽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권력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백년 갑니까? 부귀와 영화가 백년 가겠습니까? 명예가 백년 가겠습니까? 좋은 가문 얼마나 가겠습니까? 수세기, 몇 세기 가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절대적이고 나머지는 다 상대적인 것! 都求. 우리가 정말 우리 자녀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무엇을 물려줘야 되겠습니까? 신앙의 유산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전 인생 속에 이 증거의 돌을 세우십시오. 정말 우리 자녀들이 나를 보았을 때 '하나님을 저렇게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저렇게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위기를 당할 때 저렇게 기도해야 되는거지..' 이런 신앙의 증거의 돌, 기념비를 우리가 매일매일 보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습니까? 잠언 14장 26절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꿈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우리의 자녀들이 인생을 살면서 폭풍우와 비바람을 직면하게 될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삶의 폭풍우와 삶의 파도 앞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보라고 가르쳐야 합니까? 탈무드에는 이런 흥미 있는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기고 양식 있는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지식을 남기고, 지혜로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남긴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결단을 가지고 삶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미래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결단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의 삶을 일관되게 헤쳐나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 너머 부활의 영광을 보시고 그 고난의 길을 당당하게 걸으셨습니다. 세상은 그를 십자가로 내몰았지만, 십자가는 실패의 자리가 아니요 패배의 자리가 아니라 승리의 자리였습니다. 이제 후반! 기를 시작하는 자리에서 누가 무엇을 말했고, 지금 세계는 어떨 것이다라는 수많은 예측이 일어난다 할찌라도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내 인생의 결산 때 정말 후회 없는 자리에 설 수 있는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호수아의 마지막 따나가는 뒷모습이 ...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 ?아! 나도 저렇게 살다가 저렇게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에 솟구치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한 해의 후반기를 시작하면서, 지난 전반기의 나의 뒷모습이 어떤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그것이 장차 하나님이 부르실 때 떠나갈 ?나의 뒷모습?에 대한 예고편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여기 여! 호수아처럼, 아니 비슷하게나마 아름다운 뒷모습입니까? 그렇다면 더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 자신조차 안타깝게 여길 만큼 부족한 모습입니까? 그래도 아직은 괜찮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시간을 더 주셨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있고, 남은 생애가 있습니다. 우리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 하리라 새롭게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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