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가? 눅10:29-37절. 2015년 10월18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10-18 |
조회: 1248
몇 해 전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광짜우의 불산 시의 한 시장 골목에서 혼자 놀고 있던 두 살배기 여자 아이가 승합차에 치어 앞바퀴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운전자는 아이가 치어 바퀴에 깔려 있는 것을 알고서도, 잠시 멈칫거리는 듯하다가 그냥 도주하는 바람에 아이는 뒷바퀴에 다시 한 번 깔리고 말았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가 길에 쓰러져 있는데도 그 주변을 지나던 18명의 행인들은 아무도 그 아이를 돕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7분 후에 한 화물차가 이 아이를 치고는 뺑소니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때까지 아무도 이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에 폐지를 줍던 한 여성이 이 아이를 길가로 옮겨놓고 부모를 찾아 나섰고, 병원으로 옮겨진 아이는 결국 8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인데, 중국에서는 그런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흔히 ‘비에관셴스(別管閑事)’라고 해서 ‘남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다가 오히려 곤란한 일을 겪게 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도 심방을 마치고 교회로 오던 길에 자동차 폐타이어를 가지고 놀던 4,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아이가 타이어에 넘어지면서 정강이 골절이 되고 울부짖는 현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갑작스런 사고로 같이 놀던 아이들과 형이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아이를 차에 태워 가까운 아는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업무를 마치고 병원에 들렀다가 낭패를 본 것입니다.
그 병원에는 노동일 하시는 아빠와 파출부하시는 엄마, 친지들이 와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형편이 참 어려운 집이었습니다. 위로차 병원에 들렀다가, 그날 저녁 평생에 잊지 못할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에 의해서 짜여진 각본에 따라 어이없는 교통사고가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목사님은 아이를 제 차에 태우고 병원에 데려다 준 도의적인 책임 때문에, 합의금을 주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뭐, 이런일이 사회에 다반사로 일어나니까 갈수록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모른 척 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 이와 비슷한 일을 당하신 분은 없습니까? 본의 아니게 오해받고, 손해 본 적은 없습니까? 아니면,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그 현장을 외면하신 적은 없습니까? 외면하셨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비유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정통한 학자와 더불어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타락한 이래로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제기 되어온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질문,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율법에 정통한 학자가 예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묻습니다. “율법에는 무엇이라 적혀 있느냐?” 율법 학자는 자신감을 가지고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그렇게 살아라.” 라고 하십니다. 그 때 학자에게는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제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알겠는데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 입니까? 또 내 이웃이 누구 입니까?” 이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우리가 왜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지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여기 비유를 보세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고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강도 만난 자를 보고는 피하여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그곳에 이르러 강도 만난 자를 보고는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말합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이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본 세 사람 제사장과 레위인, 사마리아인 모두가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아니면 사마리아 사람 외에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아무런 마음에 부딪힘도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급히 그 현장을 도망치듯 사라지는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정말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동일한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부득이하게 그 사건 현장에서 급히 도망쳐 가곤 있지만, 그 발걸음이 무거웠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그 현장을 피하여 강도 만난 자를 버리고 그냥 갔느냐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이 사건과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복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나 맞아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를 돌보아 주지 않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그 행위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강도만난 자를 버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넘어서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보는 그들의 아픈 마음과는 달리/ 그를 버리고 죽게 내버려둔 채 도망가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약 레위기에서 말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켜야 하는 제의적 정결/ 성결의 문제/입니다(레 21, 1-2과 11). 구약의 정결법에 따르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질 수가 없습니다. 접촉하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백성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 레위인의 직무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 앞에서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그를 도울 것인가? 아니면, 못 본 척하고 지나칠 것인가?”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실존적인 문제였습니다. 율법을 지킬 것인가, 사람의 생명을 구할 것인가의 문제 앞에 직면한 것입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오늘 제가 1부 예배시간에 임박하여 차를 몰고 오는데 앞에 어떤 차가 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손을 내젖고 한 사람을 목격했다고 가정 해봅시다.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너무 안됐다. 내가 도와줘야 할 텐데! 하지만 다른 사람이 와서 도와주겠지. 그 바쁨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와 앉은 성도들이 말씀 듣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시간이 없다! 빨리 가야지.’ 분명 이러했을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이 무어냐?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이 사람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대제사장이 저와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지나치자니, 양심의 방망이가 가슴을 두드리고, 그를 돕자니 그 지엄한 정결의 규례를 파기하는 꼴이었습니다. 죽어가는 그 사람을 살리려면 당분간 성직자의 신분과 길을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도망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베푼 단순한 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비복음적인 제사장과 레위인의 삶의 방식을 꾸짖는 말씀입니다.본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도저히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도와줄 수 없는 원수 같은 관계에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강도만나 죽어가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는 그 자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인간가치, 생명가치를 귀히 여기는 바로 그 자비로운 마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생명가치와 인간가치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부활로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내 인격이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인생은 생명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을 가장 귀히 여기는 생명가치를 가진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가치이고, 생명가치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사마리아인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엄청 괄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했습니다. 남 유다가 멸망한 이후 바벨론이 정책적으로 사마리아 지역에 이방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방인들과 뒤섞여 살면서 사마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결혼하는 일들이 생겼고,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었다는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보다 더 미워했습니다. 멸시했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면 부정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개나 돼지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들을 그렇게도 미워하고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유대인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이런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은 위대하고,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베푼 사랑은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로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시고, 당신의 자녀를 삼으사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에 빠져 죄 중에 헤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크고 고귀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지금도 그런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내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한 그 사람이 나에게 저주를 퍼붓는 사람이든, 나에게 큰 상처를 주거나 손해를 입힌 사람이라 하더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5:46-47절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의 제자인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예수의 제자인 우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강도 만난 사람을 본 사마리아 사람은 정성을 다해 그를 치료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자기 나귀에 타우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주막 주인에게 자기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1회성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사랑입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자기도 하루 벌어 먹고 살기가 벅찬 이 사람이 이 엄청난 희생으로 강도만난 사람을 살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니까? 33절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라는 말씀에서 거반 죽게 된 이 강도만난 유대인을 보자 -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단어의 원어 표현을 보면, 내장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괴로운 심정을 가지고 아파하며 그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를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마9:36절에 보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저희가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고생하며 유리함이더라.’ 백성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이 "민망히 여기시니"라는 말씀은, "애간장이 녹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들은 그대로 방치하여 둔다면, 목자 없는 양이기에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아사직전상황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에 깊은 통증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나온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나 하나를 구원의 자녀로 삼기 위해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 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대로 방치해 놓으면 곧 사탄의 끌려 사망의 덫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에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 것입니다. 여기 사마리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마음이 오늘 그에게 있었기에 자신을 괄시하고 천대하는 유대인이 강도만난 그 현장에서 자신의 수고와 그 희생, 그리고 저건 없는 사랑을 통해 이 한 생명을 살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내 이웃이 누구냐”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냐를 말씀하지 않으시고,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을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강도 만난 사람이야말로 이웃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강도를 만났습니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빼앗겼습니다. 그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이웃이 없다면 그는 얼마 있지 않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이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이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가 대답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그냥 지나쳤던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들이 진정한 이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너도’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여기 한 생명을 다시 살린다는 것은 분명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간도 써야하고 돈도 들여야 하고 또 지극한 관심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강도만난 사람을 어떻게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한 생명을 주께로 인도하는 일 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한 생명을 주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외아들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어떻게 희생하셨습니까?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대신 바친 것입니다. 이것만큼 큰 희생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끝날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 안에 함께 계십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희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은혜를 깊이 알았다면 우리 역시 어떤 희생을 치루어서라도 내 이웃에게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희생 없이 생명을 건지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희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희생을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어떤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마치시고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누가 이웃인지 찾지 말고,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인지 따져 묻지 말고 네가 그의 선한 이웃이 되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주길 원하셔서 우리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는 나의 작은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내 이웃이 보이십니까? 우리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때로 그들 중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지경 빠진 사람처럼 정말 간절하게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내가 섬기고 도울 이웃이 보일 것입니다. 나보다 더 힘들고 어려움에 빠져 있는 이웃이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조건을 따지지 않고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팔을 뻗어 주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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