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로의 초대 마11:28-30 2015년 11월1일. 터치 153 새생명축제 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11-01 |
조회: 1135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교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곳까지 오시느라고 많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가족의 권유로, 친구 또는 이웃의 전도로 여기까지 오셨지만, 이 분위기가 아주 낯설게 여겨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참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걸음이 인생의 가장 값진 걸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구나 한생을 살면서 오늘보다 내일을, 그리고 그 삶이 보람차기를 어느 누가 부인할 자가 있겠습니까? 여기 모인 여러분도 예외는 아니라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늘 한사람을 소개함으로 말씀을 시작을 하겠습니다. 제가 소개하는 이 사람 역시 어떤 기대감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하고 살아갔습니다. 그가 추구한 직업의 다양성과 주거지의 다양성만으로 해도 기네스 북에 오를 만 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에서는 투우사가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전선에서는 구급차 운전병으로 일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 전장에서는 종군기자로 일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사자와 코끼리를 사냥했습니다. 쿠바에서는 군수 공장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수완을 발휘하며 틈틈히 바다 낚시를 즐겼습니다. 파리에서는 특파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파리와 스페인을 무대로 한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역사적인 놀만디 상륙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탄 비행기는 두 번씩이나 떨어졌지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결혼에 실패했고 네 번이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는 마침내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62세가 되던 해 1961년 7월 미국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그가 애용하던 사냥총으로 자신의 이마를 겨냥하고 당긴채 쓰러져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잘 알려진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평생 인생의 기쁨 곧 스릴을 찾아 도전했고 또 어느 정도 그 행복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찾던 행복이 모래성을 쌓는 것 같은 허무감이 밀려오자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채 엽총으로 인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무거운 짐, 뼈아픈 아픔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상처가 있고, 그 어떤 누구에게도 없는 자기만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기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 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계 정복을 꿈꾸던 나폴레옹도 세인트 헤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나는 지금까지 단 일주일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 저기 바닷가에 넘실거리는 물결은 세상 사람들의 눈물이요, 저기 부는 바람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한숨소리로구나?라고 한탄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왕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살면서 그가 원했던 모든 것을 소유 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전도서 2:22-23절에서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했습니다.
요즘 보십시오. 무언가 남보다 더 가지고 있고, 더 배우고 더 높은 자리에 있으면, 행복할 것 같은데 과연 그렇습니까? 움켜잡을수록 더 갈증이 일어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선진국일수록 왜 자살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왜 마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그리 많습니까? 왜 밤이면 진정제나 수면제를 먹어야 자는 사람이 그토록 많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어도 그것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오늘 이런 인생들을 향해 성경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수고한다"는 말은 원문에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사서 고생하는 능동적인 고생을 의미합니다. "무거운 짐"은 원문에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피동적인 고생입니다. 원치 않는 환경 속에서 수난을 겪는 그런 고생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고난을 취하든지, 원치 않는 고난을 받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바로 행복으로의 초대입니다. 성경 28절에"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여기"다"라는 말,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라는 말은 제한이나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오라. 많이 배운 사람은 오라. 건강한 사람은 오라 하셨다면 어떤 사람은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에게 초대장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초대에 나온 자들에게 쉼을 보장을 해 준다는 약속입니다. 사실 쉰다는 단어는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단어는 아닙니다. 세상에 휴식과 안식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휴식과 안식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미국 인구조사국의 발표를 보면 우리와 별반 다른 것이 없습니다. 국민들이 여가의 절반을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보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러는 여행이나 캠핑 등을 하기도 합니다. 어제 우리도 보다 나은 쉼을 얻기 위해 마지막 단풍을 보기위해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쉬어도 쉰 것 같지 않다고들 합니다. 나들이를 다녀오면 마음만은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휴식과 안식의 방법에 문제가 있고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쉼을 추구하면서도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 원인이 영적인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쉼을 상실한 원인이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영적인 해결 없이는 진정한 쉼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생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참된 쉼, 곧 안식의 처방은 무엇일까요? 여기에 수고의 짐은 죄의 짐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수고는 죄와 더불어 인류의 삶에 장에 주어진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첫 사람 아담에게 “네가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고 했고, 하와에게는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창3:16)고 했습니다. 타락이후 러시아의 기독교 작가 도스토엡스키의 말처럼 “이제 죄인에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수고로운 짐이 된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 수고로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인간이 만일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 수고로운 인생의 짐을 벗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 오신 그분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도대체 예수는 누구이신가? 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 고립되고 상처 나고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에 눌려 사는 인생들의 문제를 해결 해 줄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은 인생들이 예수를 만남으로 그들의 삶이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없이 많은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이 예수님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예수가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바로 그분은 우리에게 참된 인생의 안식, 이 자유함, 행복의 초대장을 주시기 위해 오셨는데 한 가지 조건을 말씀을 합니다. 바로 주 앞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1. 여기서 우리가 “주께 나온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를 나의 종교로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종교를 갖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종교는 또 다른 짐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당시의 바리새 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신 이유이시기도 하였습니다. 마태23:4에서 그는 당시의 대표적 종교인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성경이 증거 하는 복음적 신앙은 종교에의 예속이 아닌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는 짐을 지워주시는 분이 아닌 자유를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한8:32,36)
카피라이터로서 뒤늦은 나이에 예수를 만난 후 '막 쪄낸 찐빵'이라든지 '예수 안 믿으면 손해보는 77가지 이유'라는 책으로서 우리에 게도 잘 알려진 이만재라는 분이 거듭나고 나서 쓴 글이 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그는 성경말씀이 하나도 믿어지지 않답니다. 자기의 상식이나 철학으로 예수 믿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결혼할 때 교회에 나가겠다는 조건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끌려서 교회에 다녔지만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순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 뻥도 심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물위를 걷는 기적에 대해서 들으면서 "목사 양반이 멀쩡한 것 같은데 참 거짓말도 잘하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를 향해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이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 먹이는 것이야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 순간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그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자기 인생의 구원자로 만난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한 찬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50여 년이 다 되도록 자신이 한 것은 세상에 속해서 세상 방법대로 세상에 취해서 살아온 것뿐인데 자기가 어디가 예쁜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은혜를 주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때는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자기가 이제는 자신의 인생 송두리째로 다 하나님께 드리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자기모습이 너무나,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목사로서 가장 큰 기쁨이 있다면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뭐, 이것을 내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보아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이런 기쁨을 안겨 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싶어서 애를 쓰는데도 결국 믿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에 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만재 카피라이터가 받은 선물, 그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아내가 자기에게 나누고 싶어 절규했던 선물-이 구원의 선물을 여러분도 받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이런 안식, 영혼의 쉼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그러면 당신은 무엇보다 먼저 인생의 구주요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오셔야 합니다.
2. 그리고 이제 편견을 버리고 배워야 합니다.
마태11:29의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게 배우라”. 여기 ‘배우라’는 말이 다시 여러분에게 스트레스를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배우라’ 이 말만 들어도 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공부를 좋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배우라, 저 같은 사람은 배우라는 이야기만 들으면 심장이 뜁니다. 사실 저도 공부를 그렇게 잘 했던 사람은 아니예요. 그래서 배우라 그러면 스트레스가 생겨요. 제가 워낙 특공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공대는 특별히 공부 못하면서 대가리가 돌인 사람을 특공대”라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새는 날개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지한 예수의 제자들은 그래서 그분에게 배우는 훈련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특권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일은 무거운 짐이 아닌 날을 수 있는 날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히4:3에 보면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고 했습니다. 이런 영적 안식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선물로 받음으로 주어진 마음의 평화요 안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그 안식이 우리 안에서 계속 유지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안식의 선물이 지켜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적 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배움’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30절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운 것이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내 멍에다.’란 단어는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 땅에 가면 두 마리의 짐승이 한 멍에 아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멍에라는 말을 달리 표현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배우고 훈련하는 것을 멍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고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멘 것이 됩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이 안 맞는 고통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요즘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몸살을 앓고 있습니까? 서로 맞지 않아서 오는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부간에도 맞지 않아서 사네 안 사네 고통하지 않습니까?.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이혼률이 높은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한국입니다. 이혼사유 1위가 성격차이입니다. 까다로운 성격을 누가 맞추면서 살겠습니까? 안 맞아서 못살겠다는 것이 이혼입니다. 그러니까 70이 다 된 부부가 황혼 이혼을 하겠습니까?
또 어렵게 들어간 직장인데 막상 들어가 생활해 보니까 도저히 맞지가 않아요. 그러니 그 순간부터 일하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갓 입사했다가도 안 맞으면 금방 나옵니다. 뭐, 교회도 예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 성도 한 분은 이곳에 이사를 와서 6달 동안 이 주변 교회를 다 다녀보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인생을 맡기고 또 그곳에서 자신의 사명을 기쁘게 감당할 만한 교회에 대한 신중함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은혜가 맞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의 친구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를 만나면 끝이 나지만,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난다고 했습니다. 뭐, 틀인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좋은 교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좋은 교회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여긴 모인 여러분과 함께 이 시대 앞에 우리 동성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가진 상처와 고통, 그리고 죄 문제가 이곳에 와서 치유와 회복이 되는 축복의 현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우리 인생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가벼우니 내 멍에를 메라”. 지금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짐은 무슨 짐입니까. 경제의 짐입니까? 질병의 짐입니까. 미래의 짐입니까? 영적인 짐입니까? 왜 짐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그 짐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왜 그냥 지고 있습니까? 좀 벗어 던져야 하지 않습니까? 왜 속수무책으로 혼자 지고 있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외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애를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행복에로의 초대를 하고 계십니다. 삶에 지치고 목마른 자들을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을 초청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십시오. 그리고 무거운 짐들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영접하십시오. 만일 이 예수를 우리의 인생의 축제의 주인으로 모신다면 이제 곧 여러분에게도 행복의 잔치가 시작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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