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내 인생의 연주자 롬6:3-13. 2015년 11월21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11-22 | 조회: 1287
오늘 우리 교회는 먼저 믿은 우리와 함께 한생을 믿음 안에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자세로 성례식을 거행을 합니다. 정말 뜻 깊은 일이고 자신을 한번 더 말씀 앞에 비취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 땅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분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우리나라 땅에서는 1886년 노춘경이라는 분이 최초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유학자였던 노춘경은 우연히 한문으로 된 기독교 배척문서를 읽게 되었고, 기독교를 배척하는 문서를 읽으면서 오히려 기독교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양종교인 기독교를 알기 위해서는 서양인과 사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알렌 선교사를 찾아가 그의 어학선생이 됩니다. 그러다가 알렌 선교사의 방에서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한문으로 쓰여진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몰래 가져다가 밤새도록 읽게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노춘경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두 개의 복음서를 들고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가 의문 나는 것을 질문하면서 신앙에 대해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사복음서를 비롯해서 여러 권의 책자를 얻어 읽게 되었고, 결국 완전히 기독교인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신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문답을 받았습니다. 세례문답을 마칠 즈음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노춘경에게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법이 아직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으며 한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 돌아서면 안 된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었습니다. 노춘경은 ‘ 세례 받기로 한 자신의 결심은 분명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이 세례문제에 아주 민감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풀고 난 후 며칠이 지난 1886년 7월 24일자 일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로서는 그 (세례)의식이 대단히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매우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 분께서 그를 지키시리라고 확신한다.” 이런 논의와 기도의 과정을 거쳐서 1886년 7월 18일 주일에 헤론 선교사의 집에서 노춘경은 세례를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 땅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최초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례는 목숨을 건 세례였습니다.

오늘 특히 학습과 입교자, 그리고 세례를 받으시는 여러분!!지금까지 걸어왔던 삶의 사고방식이라든지 습관들을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혁명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는 변화가 내게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세례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계를 맺어주는 예식입니다. 죄를 따라 죄의 종노릇하며 살던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사랑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예식이 세례입니다. 세례는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 아래서 죽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진짜 예수 믿는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 바울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보시면 '합하여' '연합한자'라는 단어가 5번이나 등장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고 또한 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죽고 이제 새로운 생명, 영생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 동“ 영적으로 연합된 것입니다. 이 연합되었다는 말은 무엇보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철저히 죽은 자들이란 말입니다. 나 혼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죽었어요. 십자가을 쳐다 볼 때마다 나는 죽어지는 거예요. 혹시라도 꿈틀거리거나 무엇인가에 집착하려 하다가도 십자가만 보면 나는 죽어요.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라오는 제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 핍박과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 자존심이 무너지는 아픔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누리고 싶은 것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방해, 핍박, 어려움이 있어요. 그러나 결코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런 고통이 있어야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면 우리에게는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듯이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고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죽었다면 부활의 모습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죽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언제나 손해만 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남이 나를 못살게 구는데 그에 맞서지 않고 죽은 것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말 죽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는 않았으면서 잠깐 죽은 것처럼 위장하며 살고 있습니까? 왜 교회에 와서는 죽은 척하고 살고 세상에 나가서는 기고만장하게 살아갑니까? 죄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듯이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은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이고, 구원을 얻고 목사가 된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 안에 죄성이 작동되고 있는 사실을 보면서 저는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냥 신앙 생활한 것이 아니고 열심히 했습니다. 신학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 나름대로 좋은 목사가 되려고 애를 썼습니다. 수많은 성경공부를 하고, 수많은 집회를 하고, 수없이 말씀준비를 하고, 좋은 책들을 읽고, 노력을 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잔재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것을 볼 때, 기가 막힙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욕심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하게 정리된 삶을 살아간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굉장히 끈질긴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내가 죄인이고, 그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1년만 다녀도 주일에 다 참여하면 52번입니다. 10년을 다니면 520번,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참회를 하고, 기도를 하면서 20년을 다니면 1,000번입니다. 주일 한 번만 참여해도 천 번의 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수요예배에 새벽기도까지 포함해서 그 무릎 꿇은 시간, 찬양한 시간, 회개한 시간, 말씀 들은 시간을 다 모으면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악한 생각이 있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은혜가 떨어지면 예수 안 믿는 사람과 흡사한, 아니 능가하는 옛날 가락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내가 예수 믿는 사람 맞나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한 두 번 한 것이 아닌데, 은혜를 한두 번 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그들은 출애굽의 여정 속에, 광야를 지나는 동안을 거의 2백만 명이, 매일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것들이 내리는 하늘을 생각해보십시오. 장관일 것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으며 살았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마셨습니다. 그러니까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시간만 나면, 사흘만 물이 없으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며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안 믿어질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이 목이 곧고 패역한 백성들아”라고 하셨습니다. 강력한 표현입니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는 다른 사람인가 하면, 아닙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닮았습니다. 하나님이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의 조건을 찾으셨다면,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사랑할 때도 조금이라도 사랑할 구석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주면 사랑을 받아들일 줄도 알고, 사랑을 이해해야 안 되는 노력이라도 할 것인데, 사랑이라는 반응과 감정과 이해가 전혀 없는, 아니 수준과 자격은 고사하고 반역을 일삼고 욕을 해대는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멈추어서 숨을 고르고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기독교 베스트셀러 작가인 필립 얀시는 “불교의 팔정도, 힌두교의 업(karma), 유대교의 언약, 이슬람의 코란은 모두 신에게 인정받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는 IS테러단이 왜 자기 몸에 폭약을 감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어가 자폭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이런 그들이 말하는 이런 죽음이 알라에게 인정을 받아 천국에서 엄청난 보상이 있다는 교리 때문입니다. 그들의 그러나 오직 기독교만이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씀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보지 못한 사랑,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왜 이토록 힘들고 고통하고 상처받는지 아십니까? 조건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조건 없이 사랑해본 적이 없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사랑해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들어가 보니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결혼도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서로에게 조건을 비교해보고 따집니다. 조건 없이 결혼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조건을 가지고 결혼했으니 끊임없는 긴장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동안만 관계가 유지되지,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건은 또 다른 조건을 넘나들면서 서로가 끊임없는 팽팽한 전쟁을 치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 어디에서도 조건 없는 사랑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격이 없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 편에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며 자격을 만드시고, 우리에게 안겨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거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봇물처럼 터지고,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도 영적 거장인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도무지 측량할 수 없고 어마어마하니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아침!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 은혜 앞에 살아간다면, 더 이상 지난날에 나의 연약함에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 "여길지어다"는 이 명령형의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 말은 본래 회계사들이 전문적으로 사용하던 말입니다. 나의 통장 계좌에 돈이 입금되었을 때 그것은 현금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라'고 할 때 씌여진 것입니다. '여기다'는 말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카드'가 저에게 있습니다. 저의 통장에 돈이 있을 때 비록 조그마한 카드지만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기다'는 '생기 있게' 살라는 말입니다. 얼마든지 통장 안에 돈이 있습니다. 부도나는 통장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찾아 쓰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이나 능력이나 감격적인 삶이 없습니까? 이는 말씀을 듣기만 할 뿐 확신이 없어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입니다. 이 연합된 자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젠 값으로 메길 수 없는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성어거스틴은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는 죄를 안 지울 수 없는 자였으나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주님이 내게 성령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 도우심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이제 우리는 죄의 지배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죄에서 승리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려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바치지 않고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 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의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서 나타나는 무기라는 단어는 영어의 (웨폰)가 아니라 도구라는 뜻의 (인스트루먼트)입니다. (인스트루먼트)라는 단어는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에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를 제가 연주한다면 바이엘 10번 정도 그것도 서툴게 연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 교회 성가대 반주자가 연주하면 동일한 피아노이지만 소리가 달라집니다. 원리는 이와 같습니다.

내 인생, 내 삶을 누가 잡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붙잡고 사용하시면 내 인생은 걸작의 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세상의 학문이, 재물이나 인기가 내 인생을 붙잡고 연주하면 내 인생의 소리는 그것밖에 안 될 것입니다. 누가 나를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께서 자기를 써 주심을 날마다 감사했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여! 어찌하여 나를 초지에서 불러내어 이처럼 존귀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나이까” 푸른 초장에서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을 하나님이 붙잡고 연주하니까 그의 생이 달라졌습니다.

오래 전 영국의 한 악기점에 배가 고픈 거지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낡은 바이올린이 들려 있었습니다. 거지는 악기점 주인에게 “이 바이올린을 5파운드에 사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프지만 먹을 것이 없어 바이올린을 팔려고 했던 것입니다. 거지를 불쌍히 여긴 주인은 좋은 일 하는 셈치고 5파운드를 주고 바이올린을 샀습니다. 5파운드를 손에 받아든 거지는 빵을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머금고 악기점을 떠나갔습니다. 악기점 주인은 별 생각 없이 먼지와 때에 절은 낡은 바이올린에 활을 당겨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바이올린에서 이루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답고 깊은 소리가 났습니다. 깜짝 놀란 주인은 자세히 바이올린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이탈리아 출생의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가 1704년에 만든 몇 개 안된 바이올린 가운데 하나였던 것입니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바이올린은 지금도 바이올린 연주가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이고, 지난 1998년 영국 런던의 한 경매장에서 그가 만든 바이올린이 약 20억 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귀한 것인데도 거지는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겨우 빵 몇 조각 살 수 있는 작은 돈과 그 바이올린을 바 꾸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은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보다 훨씬 더 값지고 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가치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거지처럼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 성례식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내 인생의 연주자이신 예수, 그 분 앞에 나의 삶을 맡기십시오. 그분만이 내 인생을 가장 잘 아시고 나를 통해 정말 멋진 연주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나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사탄의 노예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제 나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내 삶을 아낌없이 주님 앞에 드리겠습니다하는 결의를 가지고 감격하며 고백하는 시간이 바로 이 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 앞에 가는 그날까지 이젠 더 이상 땅에 속한 인생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과 동시에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가진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을 누가 연주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주께 내 드리십시오. 우리 삶의 새로운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주의 뜻대로 행하겠다고 드리는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