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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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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따라 사십니까? 갈6:14-17절 2015년 12월6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12-07 | 조회: 1318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로써 일본 도자기 계의 대명사인 사쓰마야키의 15대 주인인 심수관씨가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지 40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긍지가 그대로 있는 가문입니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 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 아들을 작업실로 불렀습니다. 그가 보는 앞에 구슬만한 흙덩어리를 뭉쳐 도자기를 빚는 물레 위에 올려놓고 바늘 하나를 조심스레 그 중심에 꽂았습니다. 그리고 물레를 돌리면서 무엇을 느끼는 지를 물었습니다. 아들은 ‘물레는 도는데 바늘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자’ 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습니다. "움직이는 물레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찾는 것이 앞으로 너의 인생이다"

그때 이 아들은 아버지의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장한 뒤에는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야 그것은, 자신이 일본사람이 아닌 조선임임을 항시도 잊지말라는 가르침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의 패자로 눈물을 흘리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무려 400년 동안이나 타국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이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움직이는 물레 속의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찾으라'는, 이 한마디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2015년도 첫 주일을 맞는 이 시간 여기 모인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일에 자신을 드렸는가를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요즘 제 주변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장례식에 있을 때마다 그 사람의 결산을 생각해 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인지, 아니면 그저 생활 속에 갖혀서 그 소중한 시간을 정신없이 살다가 놓쳐서는 안될 예수를 놓치고 산 모습인지를 보게 됩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중심을 찾아야 하는 것이요,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인식과 확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마 오늘 여긴 모인 여러분들도 이 각오와 자세를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헌신도 우리의 열정도 이 혼탁한 세상 탁류 에 묻혀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의 신앙관을 다시 한번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가져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1. 십자기만을 자랑한다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14절
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이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원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인간적인 지혜나 지성에서 나온 자랑들을 늘어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지식을 쌓으면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지적 허영이 있습니다. 또 남보다 좀 가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깨닫지만,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사의의 지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여 죽을 수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말입 니까? 누가 그 역설을 우리 마음에 흡족하도록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어령 교수를 아시죠. 이대 명예교수이며 전 문화부 장관으로 한국 최고 지성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분입니다. 몇해 전에 일본에 동경에서 있던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과거에 기독교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분입니다. 그런데 따님이 시력을 잃어가고 외손자가 과잉행동장애를 겪는 극한 고난 속에서 자신의 그 대단했던 지식과 학문이 아무 것도 아님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지식이 전혀 쓸모없고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한평생 지식의 탑을 쌓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시다시피 그는 누구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운 핍박자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가 어떻게 변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참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고 유대전통과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성장했기에 헬라의 문화와 철학, 그리고 로마의 정치와 법에 익숙한 ?을 살았습니다. 또 그는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시민권을 돈으로 사기도 했지만 태어나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말은 대단한 가문의 배경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집어넣고 교회를 핍박하게 된 것은 그냥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과 신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앞장을 섰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일에 모든 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예수 믿는 사람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러한 열심은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생을 송두리째 변케 한 사건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이 가졌던 세상적인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 온갖 고난, 수모를 겪었습니다. 결국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순교를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객관적으로 바울을 따져 보면 그에게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돈이 있었습니까? 가족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건강이 있었습니까? 외모도 시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을 묘사하는 글을 보면 머리는 대머리였고, 얼굴도 못 생긴, 볼품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나마 좀 가지고 있었다고 할 만한 그의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 마져 그는 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섬기지만, 우리가 노력을 하고 애를 쓰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세수 좀 해라, 이 닦아라, 옷을 깨끗이 입으라고 잔소리를 해도 듣습니까? 안 듣습니까? 안듣죠? 근데 언제 바뀌어 집니까? 안 듣다가, 여자친구가 생기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하루에 열두 번도 씻습니다. 신앙의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미쳐버립니다. 그 열정이 이 주변을 예수의 사랑으로 적셔나가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직전에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억지로 누가 하라고 해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자발적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여인입니다. 그 값비싼 향유옥합을 깨뜨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제자들은 조건으로 바라보니, 그것은 미친 짓이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나 삶 속에서 헌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의 헌신은 어색하지가 않습니다. 사랑스럽고 멋집니다. 기쁨의 품격이 있습니다.

단언하지만,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솔직하고 분명한 자기 신앙 고백이 없는 한 교회를 다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전도를 하는 분들은 복음을 분명히 경험하고 인생을 바꾼 경험이 있는 분들입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으로 인해 인생이 변한 사람이 아니라면 전할 것이 없습니다. 건강한 신자는 내가 얻은 구원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도 일어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전도는 복음이 그 안에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전도를 한다, 안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복음을 경험했느냐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을 끊임없이 선포하는 곳입니다. 복음에 반응함으로 구원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교회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회심자가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구원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복음이 내 삶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우리 공동체 안에 날마다 일어나기 바랍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심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아무리 망가지고 깨어진 인생이라도 회복시킵니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고 굿 뉴스입니다. 혹시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나 혹은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십자가 사랑 앞에 서야 합니다. 오래 다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이나 고려사항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심하다 할 정도로 십자가를 강조하지 않으면 십자가로부터 멀어지고 영적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십자가만이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은 이 십자가외에 자랑하지 않겠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2. 지금 바울은 자신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지금 바울이 이렇게 피를 토하듯 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외치고 있는가 말입니다. 여기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는 말은 ‘자신이 예수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인식표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여기 ‘흔적’이라는 말은 낙인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노예가 되면 주인은 자기의 노예에게 ‘이 노예는 내 것’이라는 표시로 이마에 낙인을 찍었습니다.

노예는 그 낙인이 이마에 찍힌 채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 낙인이 찍힌 노예는 어디로 도망을 갈 수 없습니다. 도망가더라도 이마에 찍힌 낙인으로 인해 금새 어디서 도망쳐온 노예인지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의 책 『주홍글씨』에 나오는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이 그의 가슴에 ‘간통녀’라는 뜻을 가진 A자를 평생 달고 살아야 했던 것처럼, 옛날의 노예들은 평생 이마에 주인의 것이란 표시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낙인이 자랑스러운 것이겠습니까? 부끄러운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부끄러운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낙인을 지워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 낙인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내 몸에 예수님의 낙인이 찍혔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 낙인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낙인(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자랑스럽게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낙인)이 찍혀 있다’고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지금 바울이 이렇게 피를 토하듯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 있노라”고 외치고 있는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그가 처음 이 갈라디아 지역에 와서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그는 당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자신의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갈3:14절에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강력한 지도자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한번 결심하면 앞만 보고 전진하는 유형의 지도자입니다. 그런 바울에게도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느껴야 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여기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바울에게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질병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 병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 때문에 바울에게 몹시도 큰 고통을 주었음에는 틀림이 없었고 또 성도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울을 거절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천사같이, 바울의 약함을 감싸주었고 오히려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 줄만큼 바울을 사랑하는, 어떻게 보면 사제지간의 사랑이 담뿍 담긴 아름다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다음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간사한 것입니다. 바울이 떠난 2,3년 후 이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이 아닌 거짓진리를 가지고 들어와 대 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아픔입니까? 이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사제지간의 사랑이 넘쳤던 교회, 가르침의 열정 앞에 단순히 배우는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성장하던 교회가 이젠 변질된 타락의 길로 가게 될 때 가르치는 자의 그 고통을 여러분, 그 심정을 아십니까? 얼마나 통증이 컸으면, 그는 갈3:3절에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이 가르쳤던, 성도들이 하나 둘 진리에서 떠나고, 변질되어 가는 안타까움 앞에 그 상황을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찹찹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바울은 자기변명이나, 자신의 입신양면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이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본질, 자기의 정체성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자기의 의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여전히 잠시 있다 사라질 육체의 자랑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비록 사도들이나 순교했던 분들 같은 흔적은 남기지 못할 지라도 무릎을 꿇고 기도한 흔적은 있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얼굴에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손에 열심히 교회에 충성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내게 주신 행복한 환경과 재물에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당장 힘들고 어렵다고 쉬운 길로, 넓은 길로 가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의 말씀을 붙잡고 좁은 길로 가는 자들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삶의 자리에서 피하고, 따르고, 싸우고, 취하는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맛깔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자입니다.

이제 우리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아프카니스탄에서 순교한 배형규 목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2007년 7/25일 그분이 책상에 붙여 놓았던 것인데 “완전한 헌신은 나의 마지막 것을 드리는 것이다” 영원한 진리,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마지막 것까지 바칠 수 있는 헌신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책상머리에는 무엇이 붙어 있습니까? 혹 책상 앞에 아무것도 붙여두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늘 생각하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바쳐서라도 꼭 이루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늘 생각하고 꿈꾸는 간절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세계일주 한번 하는 것입니까? 지금보다 더 크고 근사한 집으로 이사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소망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생을 걸쳐서 생명 바쳐서라도 꼭 이루고 싶은 일, 바로 그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참으로 가치 있는 것,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 그것을 발견해야 하며 또 그것을 위해 내 삶을 드리는 헌신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을 따라 사십니까? 내 심장에, 내 삶에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계기판을 점검하십시오. 혹시 내 영혼의 배터리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내가 주님의 십자가보다 더 소중하게 붙잡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이 시간 다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어야합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손을 펴야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 안에 다시 살아나십니다. 손에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자랑으로 방전되었던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충전하는 비결입니다. 고갈되어 말라비틀어진 우리 영혼의 저수지를 풍성하게 채우는 비결입니다. 그 십자가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영광스런 새날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내 안에 이 은혜의 흔적, 십자가의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고 새날을 열어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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