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산할 때가 있음을 아십니까? 고전3:10-15. 2015년 12월 13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12-13 |
조회: 1322
금년도 어느덧 막바지에 들어섰습니다. 앞에 주어진 일들을 쫓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날은 추워지고 아름답게 물들었던 단풍잎도 한 잎 두 잎 떨어져 바람과 함께 거리를 뒹굽니다. 겨울이 오면 나무도 그 활동을 중단하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냅니다. 모든 화려했던 옷을 벗고 앙상함을 드러내는 계절, 지나간 모든 자욱들이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이렇듯 춥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청년에게도 나이 많은 어른에게도, 부자에게도 가난한 자에게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건강한 사람에게도 아픈 사람에게도, 준비한 사람에게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어느누구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이런 겨울이 자연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도 있습니다. 인생의 겨울도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인생의 겨울, 화려하고 아름답던 치장들은 모두 하나둘씩 벗겨져 그동안 감추어 왔던 지난날 삶의 흔적들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때는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씨앗을 뿌릴 수도 없습니다. 새로운 기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단지 삶에 대한 평가만이 남을 뿐입니다. 자연에서 겨울은 봄여름 가을 다음 순이지만 인생에서 겨울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칠지 예고가 없습니다. 바로 그때를 위하여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모든 활동이 중단되고 더 이상 인생의 기회가 없는 그 마지막 때를 위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이 우리 인생을 가리켜 건축가로 비유합니다. 인생 건축가! 인생은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특별히 기억할 것은 평생을 살면서 단 한 채만 짓는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별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그 모든 삶이 하나하나 쌓여서 인생 전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한다면 아마 인생을 함부로 살아갈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인식을 하지 못한 채 인생을 엄벙덤벙 살아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생의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10절하반절에. “ ...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be careful)” 여기서 조심하라는 것은 신중하고 진지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왜 신중하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결산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아주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가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후회 없이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을까요?
Ⅰ. 무엇보다 먼저 기초공사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는 초고층 빌딩이라도 겉에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기초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의 높은 빌딩들이 많이 들어섭니다. 그런데 여의도에 위치한 63층짜리 빌딩은 한국의 대표적인 마천루 중 하나가 아닙니까? 1980년대에는 아시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63빌딩을 지을 때 당시 여의도는 한강변 모래땅이잖아요. 그래서 암반이 나올 때까지 모래를 걷어내고 기초를 든든히 했다는 겁니다. 무려 기초공사만 3년가량 걸렸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에 보이는 소유나 지위, 권세 등이 아무리 화려해도 기초가 중요합니다. 기초가 부실하면 집 전체가 무너져 버립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인생의 기초공사가 어떻게 돼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유일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 10-11절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정말 그렇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인생이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모래 위에 세운 집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무리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렸어도 마지막 인생을 결산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면 그 인생은 실패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16: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천하를 호령한 왕후장상이라도 죽음 이후 영원한 사망,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무엇보다 인생의 기초를 잘 놓으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인생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 같은 죄인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이 세상에서 저 천국까지 나를 인도하실 예수! 오직 그분만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Ⅱ. 다음으로, 인생의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재료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인생의 건축 재료에 두 종류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불에 타는 일시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에 타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런 재료를 사용해서 짓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지으라고 말씀한 것은 실제로 그런 재료를 사용하라는 뜻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들로 정성을 모아 인생의 집을 지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아시지만, 금이나 은, 그리고 모든 광물도 땅에서 그것을 캤다고 해서 다 보석이 아닙니다. 연단을 통해서 귀하게 쓰임 받는 광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금광에서 캐낸 금덩이라 하더라도 용광로에 들어가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연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 금덩이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갔다 와야 하는 고통이 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야만 합니다.
실제로 금으로 집을 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 집을 짓는 사람이 대충대충 짓진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싼 재료를 사용해서 집을 짓는데 얼렁뚱땅 대충 지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누구든지 자신의 집을 짓는 데 대충 짓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만, 정말 귀한 재료로 집을 짓는다면 더더욱 대충 지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숭례문 화재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우리나라 국보 제1호인 숭례문(남대문)에 지난 2008년 2월 11일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6년이 지나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복원공사가 왜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돈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재료를 구입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을 대충 복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원에 쓰이는 나무가 소나무입니다. 그런데 일반 소나무가 아니라 금강송이라고 불리는 소나무만을 사용해서 복원을 합니다.
금강송은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어 함부로 채벌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런 나무로 숭례문을 복원하는데, 복원작업을 할 때에도 전동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기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쉽고 빠르게 복원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힘들게 복원을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건물은 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요되는 비용도 많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시간도 많이 필요합니다. 또 노력도 그만큼 많이 해야 합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이 그렇습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짓기가 쉽습니다. 대충 기둥만 세워놓고 나뭇잎이나 풀 등으로 지붕을 덮기만 하면 금새 집 한 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손쉽게 지은 집은 가치가 없습니다. 또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제 집을 지은 것에 대한 결산의 때가 있는데 그 결산의 때 무엇으로 판단하죠? 13절입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3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공적’이란 노력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영어 성경에는 ‘work’, 헬라어로 ‘에르곤’이라는 말은 ‘수고’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수고하는 것이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이, 어떤 이는 나무나 풀이나 짚 같은 것으로 수고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수고를 시험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적에 따라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구원과 상급은 다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는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생명책이고 다른 하나에게는 성도들의 행위가 적혀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구원을 받아도 책에 기록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심판의 불에 공력이 나타나면 상급을 받고, 공력이 타버리면 구원은 받되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마귀가 사람을 유혹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 4개가 있습니다. ①이 정도는 괜찮겠지 ②딱 한번인데 뭘 ③너는 아직 젊어 ④누구나 이렇게 사는데 뭘, 이것입니다. 이런 유혹을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면 이런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Ⅲ. 반드시 평가의 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적의 가치 판단을 하는 기준이 ‘불’인데 이 불은 심판을 가리킵니다. 마치 집을 짓고 나면 준공검사를 받아야 하듯이 인생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에 따라 인생 건축의 질이 평가됩니다. 마치 집을 짓고 나면 준공검사를 받아야 하듯이 인생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에 따라 인생 건축의 질이 평가됩니다.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었던 건축의 진가가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불에 타는 재료로 건축한 집은 기초만 남고 불타버리게 될 겁니다. 12절에 나온 대로, 나무, 풀, 그리고 짚 같은 재료입니다. 이런 재료는 일시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본문 15절을 보시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그 공력이 불타면 15절에 해를 받는다 했어요. 상상하진 마세요, 이 해가 어떤 해인진 몰라요. 카톨릭에서는 이런 구절을 지나치게 해석 해 가지고 나중에 연옥의 논리까지 끌고 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진 않아요. 어쨌든 혼난다, 이런 사람 혼날 날이 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래서 주 앞에 서는 날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사람이 많다 그랬어요,
부끄러운 구원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성경에 보면 불 가운데 구원을 얻은 대표적인 인물이 있죠. 누구인가요?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창19:12~29 참조) 벧후2:7 보면 그도 기본 신앙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그를 가리켜 ‘의로운 롯’이라 부름) 그런데 그는 신앙인이면서도 영원한 가치보다 세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가 소돔성에 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돈도 벌고, 권세도 얻고, 쾌락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유황불 심판이 내려졌을 때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불 가운데서 맨몸만 황급히 빠져나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행이긴 하지만 불 가운데서 얻은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또 한 사람 십자가상에서 겨우 구원받은 강도입니다. 물론 조크입니다만, 천국에 가면 벌거벗은 채 팬티 한 장 걸치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텐데, 그 사람이 바로 롯입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면 항상 생각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동네에 대중목욕탕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 거기서 불이 났습니다. 어떻게 됐겠습니까? 빨리 빠져 나와서 살 수 있으니까, 한참 목욕하던 사람들이 벌거벗은 채 막 뛰어나오는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불 가운데서 살아나서 좋기는 좋은데,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이게 바로 불 가운데 얻은 구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기에 일시적 세속적 가치만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남 보기에 화려하게 살았어도 일시적 세속적 가치만을 추구했다면 다 불타버린다는 겁니다. 그런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은 겨우 받겠지만, 해를 받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상급을 받지 못하고 부끄러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결산의 계절, 어떤 삶을 살아야하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가치가 아닌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결산할 때’는 반드시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중간정산을 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에만 결산의 때가 아닙니다. 때때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에도 결산하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준비할 여유도 주지 않으시고 결산하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결산하자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쉬운 길로 가고 싶어 하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에 따라 살라고 하는 세상의 압박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죄 가운데로 끌고 가려 하는 옛사람의 성품을 벗어야 합니다. 여러분, 결산의 때를 잊고 살 때에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살게 됩니다. 내 욕심껏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산할 때가 있음을 아는 순간 우리는 우리 인생을 헛되이 살 수 없습니다. 곧 결산의 때가 다가오는데 어찌 헛되이 살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도 곧 결산할 때가 임박했음을 알고는 사치하며 낭비하던 삶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결산한 이후 자신이 살아갈 삶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대비해야 했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며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살던 불의한 청지기도 결산할 때가 임박했음을 알자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결산하자고 하실 때가 곧 임박해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 때가 오지 않을 것처럼, 그 때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산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어느 목수가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사장 밑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제는 일을 그만 놓고 싶어서 사직 의사를 밝혔습니다. 사장은 너무 섭섭해서 만류해 보았지만, 그의 뜻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사장은 정 그러면 마지막으로 집 한 채만 지어 주고 떠나라고 부탁합니다. 목수는 그러마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목수는 일을 대충대충 했습니다. 인부도 자재도 대충대충 골라 쓰면서 집을 급히 지었습니다. 드디어 집이 완성되던 날 사장이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수고했습니다. 오랜 세월 나를 위해 일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집은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받으십시오.” 그 말을 들은 목수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자기 집을 짓는 줄 알았더라면 최선을 다해 일했을 텐데 하고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말합니다. 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로 비유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의 삶을 헛된 것을 위해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전 20:24) 이것이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선언한 ‘인생사명선언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고한 터를 닦아 주었습니다. 그 위에 아름답고 멋진 신앙의 집을 짓도록 터련 마련해 준 건축자로 살았습니다.그리고 그의 인생을 다 마쳤을 때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그는 복음 증거 하는 일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그런 믿음을 변치 않고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책망이 아니라 칭찬과 함께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그런 삶을 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결산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남은 이 기간에 우리는 다 은혜 가운데 살지만, 늘 어리석을 때가 않습니다. 정말 예배자로서 내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기를 힘을 썼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내게 베푸신 그 사랑의 빚진 자로써 헌신과 물질생활에 최선을 다 했습니까? 지금 경제 사정이 안좋습니다. 모두가 내일에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소식으로 불안해하는 것보다, 주께 믿음으로 더 가까이 나가는 이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저녁에 벧엘전에서 9시에 모든 성도가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나를 인생의 건축자로 삼으신 그 분은 아낌없이 내 인생의 기초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오늘 10절의 말씀을 보세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그가 고린도 교회에 그리스도의 터를 닦아둔 수고를 한 이유, 그의 공적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입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구원받은 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의 삶 속에 떠나지 않고 늘 기억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오직 사랑에 매여 죽도록 충성했으며, 주의 은혜에 겨워 매를 맞았습니다. 그가 주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열정으로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평가를 하나님께 받으시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왜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어윈 루처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을까요? 칼럼니스트 암브로스 비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낙타들은 무릎을 꿇고 그들의 짐을 받는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해야 할 것이 생각나고, 그렇게 살아간 인생이라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게 펼쳐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구원의 감격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삶을 살아가고 증명되는 것이야말로 가슴 뛰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요? 이 은혜가 우리 안에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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