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09-09-06 |
조회: 2519
아름다운 동행 행18:1-4. 2009. 9/6.
우리는 가끔 사랑엔 국경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지난 번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암 초기로 수술을 받고 있는 병원에 갔다가 고 장진영씨가 그곳에서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투병하다 끝내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의 연인이 보여준 모습은 정말 인생에 있어서 아름다운 동행이 어떤 건지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말기 암으로 뼈만 앙상한 한 여인을 그 곁에서 끝까지 지킨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다선 국회의원 차남에 자신도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그가! 했던 일들은 삭막하기만 이 세상에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부모의 반대를 무릎 쓰고 결혼과 혼인신고까지 해가는 그 과정은 정말 인생의 참된 동행이 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신한테 평생 동안 붙어다니는 이혼한 남자라는 낙인을 감수해가며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장진영씨 말기 암환자입니다. 항암제가 얼마나 사람을 비참한 모습으로 만드는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예쁘다 해도 처절한 질병 앞에는 아름다움도 고운 모습도 다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집안의 결혼 반대를 무릎 쓰고 죽어가는 사랑하는 한 여인 앞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 것은 혹시 생명을 포기할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기쁨을 주었겠습니까?
흔히 우리 인생을 길로 혹은 여행으로 비유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인생길이 어떻습니까? 뭐, 항상 우리가 생각한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외롭고 고독하고 고달프고 어떤 때 인생의 막다른 골목길이라도 만나게 되면 어찌 할 바를 몰라 당황하게 되고 방황을 갖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럴 때 나의 아픔을 이해해주고 또 그 길을 함께 해주는 동행자가 있으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정말 소중한 아름다운 동행자였습니다. 함께 2절을 보겠습니다. “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자!! 여기 누가 나옵니까? 자!! 여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 부부 역시 상처가 많은 인생들입니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광장히 강하고 또 대단한 것 같지만, 그 속을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참 약한 존재란 것을 알게 됩니다. 주체하지 못하는 슬픔 앞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서운 고독 앞에서 밤을 세우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각한 질병 앞에서 하얗게 질려버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나 가여울 정도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특히 한번 상처라도 받게 되면 상처의 자국이 시라져야 하는데 점점 더 깊이 패여서 조금이라도 그 상처가 건드려지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리는 게 인생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소아시아 본도에서 출생한 유대인 부부입니다. 그들이 로마로 이주해서 로마에 살았으나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 명령에 따라서 고린도로 거주지를 옮겨서 살다가 거기에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로마에서 모든 것을 잃고 ?겨 났으니 한마디로 부도가 나서 망했다고 할 수가 있는데 그들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장막 치는 일이었는데 이들과 동일한 일을 했던 사도 바울을 고린도에서 만난 것입니다. 이곳에 1년 6개월 머물면서 그들은 복음 앞에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한 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우리 중에 가장 으뜸 되는 부부의 이상형이었다." 성경에 이 부부의 이름이 여섯 번 기록되었는데 그 중 네 번은 부인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었고 두 번은 남편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인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은 부인이 더욱 더 헌신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또한 부인의 활동을 이해하고 함께 삶을 나누었던 남편의 이해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부부는 교회에서 좋은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가 입니다. 만약 부부가 믿음으로 하나 되지 못할 때 신앙생활에 참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뭐, 교회가 헌신을 해야 하는데 부부가 한 마음이 안되면 이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일어나게 되지 않습니까?
바울은 롬16장에서 이들 부부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아주 의미 있는 메시지 하나를 남깁니다. 16:3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 여기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권적인 사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동업자라고 말하고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을 동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동역자라 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 부부는 디모데처럼 목회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목회자였고 바울의 후계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동역자라는 말이 통합니다. 그러나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평신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동역자를 영어로 ‘fellow woker' 혹은 'helper’라고 합니다. 돕는 사람, 측근에서 손을 서로 맞잡은 사람을 동역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로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 함께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인물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일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제부터 실로암 대학을 개강했습니다. 여기에는 대부분 지체장애를 가진 분들입니다. 교회 한번 나오는 걸음이 쉽지는 않지만, 문제는 이 분들을 섬기는 봉사자들입니다. 해마다 봉사자들이 적어집니다. 물론 시간 내기도 어렵고, 또 무엇보다 많은 수고가 있어야하기에 선뜻 그 자리에 들어가기가 힘이 들기에 주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제 보니까 그 봉사를 다 마치고 여러분의 점심을 위해 김치를 담그는데 그 양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 일을 오후 5시가 넘도록 하는 모습을 보니까 안스러울 정도입니다. 여기 예배드리시는 여러 교우들 가운데 여기에 관심을 갖고 함께 일을 섬겼으! 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일할 때보다 함께 일할 때 훨씬 ダ舅 감당할 수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의 헌신을 기뻐하시는데 교회 안에 헌신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격려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 교회는 친교 단체가 아닙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 앞에 감동을 입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과 또 내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거기다 내 삶을 올인하는 열정이 일어나는 현장이 바로 능력있는 교회입니다. 여기 부리스가와 아굴라는 어쩌면 이 땅의 것들을 많이 빼앗긴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함께 한 생을 변함없이 아름다운 동행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을 최우선에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장사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로 자리를 옮기자 같이 짐을 싸고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이 부부가 바울보다 먼저 로마로 이사를 간 것은 바울이 그 곳에 올 것을 대비하여 미리 갔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아무튼 이 부부를 보면 마치 집시생활을 보는 듯합니다. 그들은 주의 복음을 위해 떠돌이생활을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거주지를 자주 옮겼고 자기의 가정을 개방하여 바울의 안식처가 되게 했습니다. 복음이 그들에게는 ! 翎耳굼潔享윱求. 그들에게 직업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사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사를 해야겠다고 할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일을 합니까? 올바를 신앙생활을 우선에 두고 이사 갈 곳을 준비합니까? 아니면 단지 살기 좋은 주거지만 찾아서 옮기는 사람입니까? 물론 살기 좋은 주거지를 찾아서 옮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복음을 위한 동역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기를 원합니까? 이사하는 것까지도 복음의 동역자가 되는 문제와 연계시켜 ! 珝▤ 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중심한 신앙생활에 지장이 없겠는지를 우선에 두고 생각하면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신을 주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는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습니다. 롬16:4절에 보면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이 부부가 얼마나 바울을 사랑하였는지 바울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면서 많은 핍박과 위협을 당하였으며 생명을 잃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번 이상 그들 부부가 목숨을 걸고 바울을 구출한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죽게 되었을 때 목숨 걸고 구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에게 알려져서 모든 주변의 교회들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감사했던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위대한 것도 있었겠지만 바울이 얼마나 위대했으면 이들 부부가 바울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겠습니까? 바울 곁에는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정신이 사도행전 교회 성도의 의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들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함께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누가 이들의 앞길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20%가 넘는 숫자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의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잠재된 빛의 기능이 있고, 소금과 같은 맛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왜 세상 앞에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까? 저는 그 원인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부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렉산더가 4만의 군대로 이수스에서 당시 40만의 다리우스 군대를 쳐부순 것도, 중국 공산당 의 초기멤버인 정강산의 23인의 동지가 장개석의 국민당을 제압하고 10억 중국을 접수할 수 있었던 비결도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그들이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는 세상의 기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 보혈의 능력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영광과 능력과 권위는 초대 교회 교인들의 헌신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글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입은 절대적인 헌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 교회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저는 40주년을 맞은 우리'동성교회'가 지금 이대로 '좋은 교회'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동성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이 시대적인 교회 중 하나인가?는 저와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동성교회를 목회하면서, 요즘에 와서 솔직히 많은 걱정과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우들 중에는, 보혈의 능력을 붙잡고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매일 매일,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헌신하기보다는, 이미 형성된 여러! 나름대로의 가치와 전통,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 신앙이 기준이고, 바른 신앙이라는 것을 고수하고, 그것을 주장하려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고, 주님을 또 다시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카피라이터로서 뒤늦은 나이에 예수를 만난 후 ‘막 쩌낸 찐빵’이라든지 ‘예수 안 믿으면 손해보는 77가지 이유’라는 책으로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만재라는 분이 거듭나고 나서 쓴 글이 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그는 성경말씀이 하나도 믿어지지 않답니다. 자기의 상식이나 철학으로 예수 믿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결혼할 때 교회에 나가겠다는 조건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끌려서 교회에 다녔지만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순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 뻥도 심하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물위를 걷는 기적에 대해서 들으면서 "목사 양반이 멀쩡한 것 같은데 참 거짓말도 잘하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를 향해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이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 먹이는 것이야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 순간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그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자기 인생의 구원자로 만난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한 찬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50여 년이 다 되도록 자신이 한 것은 세상에 속해서 세상 방법대로 세상에 취해서 살아온 것뿐인데 자기가 어디가 예쁜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은혜를 주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때는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자기가 이제는 자신의 인생 송두리째로 다 하나님께 드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기모습이 너무나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삶의 주인이 바꾸어졌는데 어떻게 인생이 바꾸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회심의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옛날 방법, 옛날 모습 그대로 삶의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회심이 한 순간 사람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했던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원했던 사람, 그리고 자신들의 섬김을 통해서 그 섬김 속에서 세워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부리스가와 아굴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라면 자기는 조용히 사라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인생의 무대 위에 서서 주연이 되고 싶어 합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청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인생 무대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 무대를 밝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주연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아도 조연이 되고 싶은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조연 없이 감동적인 영화를 만들 수 없으며, 훌륭한 연극, 탁월한 드라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대가 빛나는 것은 주연을 위해 헌신하는 조연과 엑스트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안도현이라는 시인은 다른 사람이 빛나도록 배경이 되어 주는 ‘안개꽃과 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안개꽃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장미나 다른 화려한 꽃을 돋보이게 하는 데 있습니다.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이들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안개꽃 같은 사람입니다. 모두들 자기를 나타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시대에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돋보이도록 뒤에서 이름 없이 받쳐주는 안개꽃 같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한번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넘어진 자였습니다. 모세도 쓰임 받기 전에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넘어진 경험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았던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진정한 동행자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동행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직역하면 '옆에 서서 도우며 동행 하시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왜 보내셨는가?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함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공하는 목회는 얼마나 많 은 사람이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가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일에 헌신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동행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 함께하는 그 동행의 기쁨이 있나요? 정말 내 한목숨을 송두리째 드려도 아까움이 없는 그런 동행인가요? 여러분! 이들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함께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누가 이들의 앞길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역을 하면서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 일에 우리가 바로 내가 드려질 생각은 없는지요? 기도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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