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 미친 사람 고후 5:13-16. 2015년 12월 27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5-12-29 |
조회: 1461
지난 해인가요!! 우리교단에 속한 신학교에서 합신 주간에 삼일 교회를 시무하는 송태근 목사님과 더 사랑교회 이인호 목사님 그리고 저를 강사로 세운 적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제안을 받았을 땐, 나 같은 무명의 목사가 한국 교회에 알아주는 목사님들에 끼어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잠시 고무풍선처럼 내 자신이 굉장한 줄 착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설교 준비를 하다가 시간이 가까울수록 고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계 5:3-4절 말씀 가운데 ‘내가 크게 울었더니....’ 라는 말씀에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가장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때 늘 지근거리에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삶속에서 얼마나 진리를 의지했는지를 잘 아는 제자입니다. 그 역시 배운 데로 살았습니다. 그가 밧모섬에 유배 되었을 때, 그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들려진 책을 보았습니다. 그 책은 안팎에 계시를 기록하고 있었고 아무나 볼 수 없도록 일곱 개의 인으로 봉함되어 있었습니다.
힘 있는 천사가 요한의 눈앞에서 말하기를 “누가 이 인을 떼어 하나님의 계시를 알리기에 합당한가”라고 외칠 때에, 불행하기도 이 인봉된 계시의 책을 열어 요한에게 그 내용을 알려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요한의 태도가 어떠하였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계 5:3-4).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 주는 책이 봉인되어 그 계시를 깨달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 그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게 된 자신의 무지한 처지를 숙명처럼 받아들였습니까? 그의 태도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크게 울었더니...." 원어 상으로 보면 이 울음은 단지 흐느낌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리를 내어 엉엉 우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이, 혹은 크게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된 요한의 울음이 단지 한 번의 부르짖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깊은 통곡으로 이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깨달을 수 없는 계시의 말씀 앞에서 그는 무엇으로 달래도 도저히 그칠 수 없는 통곡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 무릎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평생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왔던 백발의 노사도가 파도 소리밖에 들리는 것이 없는 외로운 섬에서 피 어린 통곡으로 어린 아이처럼 목 놓아 울고 있는 모습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는 수적으로 늘어나지 아니하는 교회를 보며 울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위에 어울리는 좋은 승용차를 타지 못해서 속상해서 흐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명성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교인들의 곁을 떠난 외로움 때문에 울고 있는 것 아닙니다. 그가 울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계시를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진리의 전달자로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비록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받아 외로운 섬에 유배되었으나, 그의 사명은 다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세상과 교회에 하나님의 뜻과 복음의 계시의 풍부함을 말씀으로 전해 주는 사명을 띠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의 사명은 갈 수 없는 사랑하는 교회들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계시를 편지로 적어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요한은 이처럼 외딴섬에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요한의 절규를 보십시오.
저는 오늘 2015년도 주일 마지막 설교를 하려 이 강단에 섰습니다. 올 한해만해도 이 강단에서 주일 낮 설교와 수요 예배, 그리고 철야, 새벽 예배를 다 합치면 아마 350편 이상을 설교를 한 것 같습니다. 작은 분량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 설교를 하고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정말 후회가 더 많은 목회를 해 왔습니다. 이제 이 한해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번 회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해를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사셨습니까? 그리고 그 관심은 정말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몇해전에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배우인 미녀 스타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한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한 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어요.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뿐이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7명의 남자를 거치며 8번의 결혼과 이혼을 하는 등 화려한 남성편력과 사생활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재산도 6000억 원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우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으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인기가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고백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 얼마나 갈증이 일어났으면 이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하다고 외쳤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는 달리,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도 오히려 행복하게 살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울이었습니다. 로마의 옥중에서 쓴 편지인 빌립보서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6-7).
사도 바울은 또 며칠 후면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그리고 죽음을 코앞에 두고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미친 사람처럼 한평생을 그 예수를 위해 뛰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옥에 갇혀 억울하게 죽게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은 후에 받게 될 의의 면류관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면서도 불행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는 달리,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행복해했고, 감옥 속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장차 받을 상급을 그리면서 기대에 찬 삶을 마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14절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기 ‘강권’이란 말은 둘 사이에 꼭 끼여서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헬라어로는 ‘힘 있게 꽉 잡힌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랑하는 주님께서 자기를 아주 꽉 잡아 주셨습니다.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붙드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구속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붙드시고,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 것은 주님이 자기를 엄청나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행복한 고민이 아닙니까? 바울이 왜 행복했습니까? 사랑하는 그분께 꽉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또한 그분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은 그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이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이사랴의 베스도 총독은 바울의 변론을 듣다가 너무 박식한 것에 놀라서 말했습니다. 행 26:24절에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오늘 보문에도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 바울을 대적하던 몇몇 사람들이, 바울이 미쳤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적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들의 말처럼 나는 미쳤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하는 말처럼 잘못 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똑바로 미쳤습니다.”
오늘 이제 2015년도를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저도 목회를 하지만, 정말 복음에 미치지 않고 어떻게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나요? 여러분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목회는 자기의 상식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 여기 자신의 경험과 상식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세를 들어 이야기해 봅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갑니다. 모세가 자기 상식을 가지고는 애굽으로 못갑니다. 이제 그의 나이가 팔십입니다. 또 그곳은 사람을 때려죽이고 도망 온 곳입니다. 거기가면 당장 맞아 죽을텐데 제정신 가지고는 애굽에 못갑니다. 만약에 애굽의 사람들이 모세가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뭐라 했을까요? 모세는 진정 미쳤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갑니다. 제정신이 아니라 어떤 미친 힘에 의하여 애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습니다. 모세는 마른 막대기를 들고 홍해 앞에 섰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놈의 영감이 미쳤구나!”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른 어떤 힘에 의하여 막대기를 들고 고함을 쳐 홍해를 갈랐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이 말씀을 드리면서 내 자신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나를 책망하는 마음입니다.골리앗 앞에 나타난 다윗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제정신 가지고 골리앗 앞에 다윗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골리앗은 육척 거장이요, 다윗은 20세 미만 소년입니다. 몸으로도 비교가 안 되고, 무기로도 비교가 안 되고, 고함소리로도 비교가 안 되는데 제정신 가지고는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때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저 녀석 미쳤나?” 했을 겁니다. 다윗은 진짜 미쳤습니다. 다른 강력한 어떤 이유 때문에 다윗은 미쳤습니다. 골리앗이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의 무기가 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윗이 골리앗을 때려눕히고, 이스라엘을 위기로부터 구했습니다.미친 사람이 사건을 일으킵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칼을 갈고 있는데, 바로 그 앞에 엘리야가 나타나 “너희들의 신이 참신이냐? 우리의 신이 참신이냐?” 내기를 겁니다. 산꼭대기 제단을 쌓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홀홀단신 외롭게 싸웁니다. 엘리야는 진정 미쳤습니다. 제 정신이 아닌 다른 어떤 힘에 의하여 미쳤습니다. 미친 그는 마침내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숙청했습니다. 메마른 땅에 비를 내리는 기적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 여러분, 이 미친 모세와 다윗, 엘리야가 부럽지 않아요? 미치게 만들어 일을 시키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미친 사람을 통하여 기적을 나타내시려고 미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여기서 안드레와 빌립을 생각합니다. 5000명의 무리를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저녁을 먹이라 했습니다. 빌립은 제정신으로 아주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정확하게 계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와서는 예수님께 이것도 도움이 되겠냐고 합니다. 빌립이 안드레를 보고 조롱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정신을 가진 합리적인 빌립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미쳤다고 조롱당하는 안드레를 붙잡았습니다. 이것밖에 없지만 힘껏 주님께 드리니까 5000명의 양식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한국교회에 이 미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빌립과 같은 목회를 했습니다. 말 한마디라도 교인들에게 부담될까봐 성령이 저에게 말씀하신 것도 확신있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붙잡으시고 기적을 나타내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된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붙잡으시고 기적을 나타내십니다. 여기서 미친다는 말은 맹목적으로 열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감정이 흥분해 열광하는 것이 아닙니다. 견고한 신앙, 확실한 교리, 정리된 바른 신학 위에서 열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확신을 갖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해 경지에 오른 사람을 우리는 달인, 고수, 장인 마니아 등으로 부르지 않습니까? 이는 모두 한 분야의 전문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 바로 '광인'(狂人)입니다. 광인이란 문자 그대로 '미친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 앞에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신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몽땅 다 쏟으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16절을 보시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여기 ‘이제부터는’ 두 번이나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난 날 자신의 지식과 이성으로 살 던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부터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신의 관심과 모든 것을 주를 위해 자신을 드리겠다는 삶의 고백입니다.
어느 성도님이 요즘 크리스천들이 마치 “햇빛에 끌려나온 지렁이 같이 힘을 못쓰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표현의 적나라함 때문에 웃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하여 가슴에 남는 말이 되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친절하고 신사적인 것은 꼭 필요한 면모이지만 그렇다고 햇빛 앞에 노출된 지렁이처럼 어찌할 줄을 몰라하며 숨을 곳을 찾는 존재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에서 사단을 물리치고 죄의 값을 다 치러주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꿀릴 것이 없고 겁날 것이 없는 승전한 군대의 병사 같아야 하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그분이 마귀 권세와 사망의 지배를 다 멸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겁없이 살아야 하는 천국 시민들입니다. 그것이 예수께 미친 인생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크리스천들이 제일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세상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야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여러분 가운데 신앙 경력이 오래 되어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청산유수처럼 말하지만,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십시오”라는 말은 부담스러워 하는 분이 계시다면 저는 감히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안 믿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세상 끝 날까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십시오”
구원받은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롬8:5-8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하심으로 주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육신을 따라 사는 인생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마귀에게 질질 끌려 다니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두 아들과 함께 공원을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공원 안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어있었습니다. 서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벌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벌은 큰 아이의 얼굴 주변을 맴돌면서 윙윙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큰 아이는 무심결에 손을 들어서 벌을 떨쳐내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벌은 갑자기 큰 아이의 눈언저리에 따끔하게 침을 쏘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큰 아이는 퉁퉁 부어오른 눈언저리를 손으로 쥐고서 아파 죽겠다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런데도 벌은 성에 차지 않는 듯이 이번에는 작은 아이의 얼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아이는 지레 겁을 먹고서 아버지 뒤에 숨었습니다. "아빠! 벌이 나를 물려고 해요. 살려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작은 아이를 토닥거려주면서 이렇게 달랬습니다. "얘야, 겁먹지 말아라. 이미 저 벌은 네 형을 쏘았기 때문에 그 벌에는 더 이상 침이 없단다. 너를 쏘려고 해도 쏠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큰 아이의 얼굴에 박혀있는 벌의 침을 뽑아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작은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아라. 여기 벌의 침이 있잖아! 저 벌이 너를 위협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침으로서 너를 해치지는 못한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의 침은 사망,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죄는 무서운 침을 이미 쏘아버렸습니다. 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침을 쏘았습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사망의 침을 이미 쏘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망의 침으로 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것 하나 잊지 마십시오. 마귀는 이 한해의 끝자락에서 지금도 나를 정죄하고 흔들어 놓습니다. 너 같은 주제가 뭘 할 수 있다고, 넌 안돼!!, 그리고 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을 과소평가 합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멈추게 만들고, 자꾸 퇴보의 신앙으로 가게 만듭니다. 여기에 속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어떤 형편에 와 있던지, 여러분의 신앙이 얼마만큼 성숙했든지,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얼만큼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든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만큼 자라서 놀라운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든지 간에 현재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현재에 안주하면 영적으로 비만증에 걸립니다. 몸이 무거워지면 달리지를 못합니다. 포기하셔야 됩니다. 앞만 쳐다보셔야 됩니다. 2015년은 2015년으로 접어 두고 2016년은 앞을 내다보고 뛰어야 합니다.
올 한해 우리가 늘 듣는 이야기가 뭡니까? 경제가 휘청거린다고 합니다. 정부를 믿을 수가 없고,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불신의 덩어리로 화해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미칠 듯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앞에는 무언가 밝은 미래를 점칠 수가 없는 답답한 환경만이 놓여 있지만 그러나 감옥과 같은 이런 환경도 우리를 절대 꺾지 못할 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두기만 하면 주님이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병이 있습니까? 여러분, 남이 모르는 개인의 상처와 고통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무거운 십자가의 짐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열정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주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이기고도 남은 새 힘을 날마다 주십니다.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열정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주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이기고도 남은 새 힘을 날마다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는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꺾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힙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 이것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어디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 세력이 있고 권세가 있고 고통이 있습니까? 바울이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이제 지난 것들에 짐에 눌리지 마십시오. 다시 강권하시는 주의 사랑에 붙들려 예수님께 미쳐버리는 열정으로 이 한해 마무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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