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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3 자라나는 신앙으로, 성숙해지는 신앙으로, 열매 맺는 신앙으로 (엡4:13-15)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02-24 | 조회: 1682

자라나는 신앙으로, 성숙해지는 신앙으로, 열매 맺는 신앙으로 엡4:13-15. 2016/1/3 주일예배

여러분, 유토피아라는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토피아는 이상향이라는 단어로 번역됩니다만, 그러나 이 단어의 어원은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본래 이 단어는 1516년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가 쓴 책의 이름에서 기원한 것으로 그리스어에서 유(eu)는 ‘없다’는 뜻이고, 토포스(topos)는 ‘장소’라는 뜻으로 ‘그런 곳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 책을 쓴 토머스 무어도 헨리 8세가 통치하던 당시의 세상에서 대법관까지 지냈지만 결코 유토피아 지향적이 아닌 현실을 비판하다가 반역죄로 투옥되고 사형언도를 받고 참수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인간이 그렇게도 이상향을 열망하면서도 그런 이상향을 실현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새해가 되면 지나간 시간에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 그리고 뭔가 새롭게 할 일들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한해를 꿈꾸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운 목표와 그 기대감이 쉽지 않다는 것을 살면서 겪어오지 않습니까? 우리의 이런 열망이나 이상이 성취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입니다.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죄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갈등과 분열의 시끄러운 모든 문제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의 해결을 시도 때 그것을 밖에서만 해결하려고 하는 어떤 시도도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죄인 된 인간의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죄와 정욕을 잘 다스리기만 하면 문제를 해결하고 이상향은 아니더라도 보다 낳은 세상, 보다 낳은 현실을 꿈꿀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보여주는 보다 낳은 세상을 향한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자라나는 신앙으로, 성숙해지는 신앙으로, 열매 맺는 신앙으로 라는 목표를 가지고 한해를 출발하려합니다. 이 표어의 진정한 가치는 여려분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겸손하게 내려놓고 그 은혜를 힘입고 나아가는 변화의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베소 교회는 사도바울이 그의 사역에서 아마 가장 오래 머물러서 목회를 하던 장소입니다. 바울은 목회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에베소 교회 성도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가에 대해 갈망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1. 건강한 교회는 새로운 변화가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14절) 

집안에도 결혼한 부부가 아이를 갖고 그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린 아기를 키울 때 얼마나 힘이 드는지 한 아이에 온 가족이 다 메달립니다. 그러나 힘만 드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도 대단합니다. 아기를 키우면서 가장 큰 즐거움은 날마다 아기들이 자라간다는 사실입니다. 누워 있기만 하던 아기가 어느 날부터 몸을 뒤집고 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첫 걸음마를 내 디딜 때 심장이 무너질 것 같 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온 식구들이 박수를 칩니다.  

어느 날부터 자기 식구들을 알아보고 방긋방긋 웃습니다. 엄마 아빠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부터 조금씩 말을 하고, 흥얼흥얼 노래를 합니다. 온 가정이 웃음바다가 됩니다. 그러더니 마침내 한글을 깨우칩니다. 버스나 전철을 타고 가면서 간판을 척척 읽어냅니다. 엄마 아빠는 우리 가정에 천재가 났다고 너무 신나서 온갖 그림책, 동화책을 사들이기에 바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입을 열었다 하면 손자 자랑에 바쁩니다. 자랑하려면 만원씩 내라고 해도 만원을 내고라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자랑하기도 아깝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생명의 탄생은 온 가족의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은 그 아이가 자라가는 모습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뒹굴다가 앉고 서고 걷는 모습을 보는 것은 환희입니다. 생명은 자랍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라가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라가는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영적으로 이제 막 출발했다면 영적 어린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아도 영적으로는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최고의 지성인이라 일?는 이어령 교수가 어느 석상에서 식사를 하는데, 이제 예수를 믿게 되니 기도하는 것도 감사하는 것도 아직 익숙하지 않아 아내에게 혼이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어른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영적세계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교회가 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물이나 사람이 많아지는 것도 성장이지만, 보다 깊은 의미로 들어가면 교회에 출석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자라가는 것이 성장입니다. 어떤 교회를 보면 건물을 잘 지어놓고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건물은 지었지만, 교인들은 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가 성숙해진다는 것은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외적인 성장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진정한 내면의 성숙이 일어나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신앙이 미성숙한 상태에 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가 오늘 본문 14절에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어린아이는 속임수와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걸음을 걸어도 뒤뚱뒤뚱 불안합니다. 좋은 길인지 죽는 길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온갖 풍조에 밀려 요동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합니다. 장성하기 전에는 말과 행동이 유치하고 때와 장소에 따른 분별력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떼를 씁니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말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어린 아이의 행동을 버리지 못하면 퇴행이라고 합니다. 영적 퇴행도 있습니다. 유치함은 어릴 때에만 용납되는 것이지 자란 다음에는 사라져야 할 모습입니다. 히 5:13절에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어린아이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아주 편협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만을 찾습니다. 그런 성도는 축복에 관한 것에는 은혜를 받지만, 헌금 이야기에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깊이 있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깊은 진리의 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없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적 성숙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성숙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자라가는 성도들은 변화에 대한 갈망이 강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저절로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많은 분들이 앉아 계시지만 어떤 분들은 말씀 속으로 뛰어들 듯 한 자세로 말씀을 듣습니다. 성장이 멈춘 아이들은 먹고자 하는 욕구가 없어서 아무리 좋은 것을 식탁에 올려놓아도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자라는 아이들은 먹성이 좋아서 일주일이 다르게 자랍니다. 아기가 젖을 빨 때도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전심전력을 다해 먹습니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식욕이 중요합니다.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자라가는 신자들은 영적 변화에 대한 욕구가 강합니다. 자신의 삶에 부족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룩한 불만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13절을 보세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 여기 ‘온전한 사람’ ‘온전해진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온전하다’, ‘완전하다’라는 표현을 우리 인간은 쓸 수가 없습니다. 이 온전하다는 말의 본래 뜻은 ‘뼈를 맞춘다’는 말입니다. 탈골된 사람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가 어떻게 몸을 제대로 움직여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먼저 뼈를 맞추고 치유되는 일이 선결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 회복의 징후가 보이면 그는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할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아름다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 있습니다. 영어로 mature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인이 성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숙의 목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라는 표현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삶이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그 인격의 삶은 바로 섬김과 나눔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를 생각해 보세요. 우선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된 자리를 포기하시고 사람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주인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종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받으실 수 있는 대접을 포기하셨습니다. 대신 가장 낮은 사람인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때로는 오해를 때로는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신이 흘린 그 보혈은 온 땅에 생명의 샘이 되어 흐르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성숙은 축복입니다. 영적으로 계속 자라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일평생 영적으로 자라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흥분되는 일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성화되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풍기는 향기와 기품이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이상 그때부터 시간은 부담이고 책임입니다. 내 뒤에는 믿음의 길을 시작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쭉쭉 뻗어 자라서 그 사람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하는 얄팍한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어린 신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도전이 되는 믿음의 수준으로 날마다 자라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열립니다. 관계에도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품이 넓어져 사람과의 관계가 넓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영향력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런 영적인 변화가 세상에도 역사가 일어나게 합니다. 영적 변화에서 멈추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세월이 흐 를수록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으로 우뚝 서고 교회 밖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앞에 설 만한 모습, 너무 남루하지 않은 모습으로 서서, “그래도 네가 노력을 많이 했구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홀로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랄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영적 교제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공동체 안에 들어가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단들도 홀로 있는 사람을 노립니다. 많은 성도들과 연결되어 깊은 교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손을 못 댑니다. 손가락이 몸에 붙어있다면 손가락만 데려갈 수 없습니다. 강한 결속감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점으로 교회를 설명하는 것은 각 지체들이 공동체 안에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결합은 소그룹입니다. 교회 안에 목장이라든지 전도 기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소그룹에서는 생명의 능력이 있고 치유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할 때 치유 絳求.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 성도들을 세워가기 원하십니다. 주일 예배에만 참석하면 영적 교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소그룹에 참여하면 도와주는 손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현대인들은 외롭습니다. 내가 힘들 때 언제든지 연약함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이 없어서 자살하는 것 입 求. 내 문제를 들어주고 함께 기도해 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요즘 세간에 화제가 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히말라야라는 영화인데 8,000미터급 16좌를 완등한 산악인 엄홍길의 이야기를 그린 실화입니다. 자신과 함께 칸첸중가와 K2, 시샤팡마, 에베레스트를 차례로 함께 등반하게 되며 고산 등정의 동반자가 된 자신의 동료가 에베레스트을 하산하다가 목숨을 잃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시신을 나두고 내려왔는데 그 죽은 동료의 시신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산에 오르는 원정대는 자신들도 죽을 수 있다는 그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기록과 명예와 보상도 없는데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목숨을 거는 가슴 뜨거운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히말라야 산맥 가운데 최고의 고봉이 에베레스트입니다. 이 산은 1953년 5월 29일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이 지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산 정상이 정복되었습니다. 이 쾌거의 주인공은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문드 힐러리경 이었습니다. 그가 하산했을 때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이들 에게 힐러리경은 자기 옆에 선 네팔출신의 셀파 텐징 노르게이를 바라보며 "이 사람 때문이지요" 하면서 그가 정상 정복을 마치고 내려오다가 경험한 위기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벼랑을 타고 내려오다가 자기를 맨 밧줄이 끊어지고 비상 로프마져 놓치는 순간 노르게이가 자기의 비상로프를 던져 둘이 함께 몸을 엮고 무사히 내려 올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들이 노르게이에게 힐러리경을 구출한 소감을 묻자, 조금의 미동도 없이- "뭘요, 우리 등산하는 사람들은 항상 서로 돕지요.--우리는 어차피 운명의 끈으로 묶여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라는 말입니다. 죽음의 자리까지라도 마다하지 않는 그 자세가 세계 최고의 산을 정복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3. 자라남과 성숙의 가치는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15-16) 

과일나무는 심어만 놓는다고 해서 좋은 열매를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이른 봄부터 가지치기를 해야 하고 거름을 주어 가꾸어야합니다. 나무의 모양을 만들고 열매가 충실히 맺힐 수 있게 곁가지는 모두 잘라야합니다. 비록 제대로 심겨진 나무와 같다고 할지라도 자라면서 필요 없는 곁가지는 잘라내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불필요한 가지들은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농업에서는 이것을 <적과(摘果)>라고 합니다. <열매솎기>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열매를 솎아내지 않으면 열매의 크기도 작을뿐더러 많은 열매들의 무게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가지치기>와<열매솎기>는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들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필요 없는 곁가지들은 어떤 것인지를,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모양을 해치는 삐져나온 가지는 없는지를... 좋은 열매를 위해서는 좋지 않은 열매를 과감하게 솎아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자라남과 성숙은 반드시 두 축의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방편은 진리와 사랑입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사랑이 없는 진리는 결코 상대방을 감화 시킬 수 없습니다. 15절은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설수 있도록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14절의 말씀처럼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이어지는 말씀 16절에서 사랑의 균형을 강조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고 말합니다. 사랑 없이는 어떤 사역도 열매 맺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실 교인들 가운데 이단에 빠지는 분들을 보면 교회생활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이단이 가르친 진리 때문에 이단으로 간 것이 아니라 이단 단체에 가보니까 그들이 찾던 사랑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직 성경을 조금 몰라도 사랑이 있다면 사람을 세우는 사역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변화시킨 리빙스턴의 전기를 쓰던 전기작가가 리빙스턴이 가르친 설교말씀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한 추장이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우리는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다 기억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그는 우리를 사랑했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한해를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결심이 있다면 아름다운 교회, 칭찬받을 교회, 모범적인 교회를 만들어야 하고, 세워가야 합니다. 좋은 교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좋은 교회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교회 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각 사람이 좋은 신자가 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의 전제 조건은 우리 각 사람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주님이 칭찬하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교회의 공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한번 태어나 행복도 맛보고, 고생도 맛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개인의 행복과 인생의 의미가 어떤 교회를 다니느냐에 의해 상당부분 좌우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 은혜를 받았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삶의 의미를 발견했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뒤돌아보아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에 다닐 바에야 좋은 교회에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동성 교회에 몸담고 있는 이상 이 교회를 좋은 교회 만들어야 내가 삽니다. 이와 같은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다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성숙한 제자로서 살아가시고, 주님의 몸을 세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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