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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2016-01-10 한 자유인의 고백 (롬8:1-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02-24 | 조회: 1643

한 자유인의 고백 8:1-4. 2016. 1/10 주일 예배

 

여러분, 혹 짓다가 만 건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작년에 설교자 세미나에 가기 위해 수안보 쪽으로 갔다가 참 마음이 아픈 현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10년 만에 가는 길이기에 호기심도 있었지만, 막상 관광 개발을 위해 온천 사업을 엄청나게 투자했는데 사람들이 기대만큼 오지 않으니까 빈 건물이 생기고 심지어 짓다가 그대로 방치가 된 건물도 눈에 들어 왔습니다. 이런 건물들은 흉측스런 모습으로 인해 미관을 해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공사현장에서 날아오는 먼지로 인해서 주변 주민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고, 심지어 폐자재까지 인가로 날아오면서 큰 위험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방치된 건물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청소년들의 탈선 장소로 변하기도 합니다. 짓다가 만 건물은 그냥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흉물로 변해갑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성장이 멈추어버리면, 신앙이 그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멈춘 신앙은 그 때부터 부패하기 시작합니다.끊임없이 성장하는 신앙일 때에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갑니다. 성장해갑니다. 그런데 멈춘 신앙은 퇴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냄새가 납니다. 마치 죽은 물고기가 부패하면서 썩은 냄새가 나듯이, 성장이 멈춘 신앙인에게서는 세상적인 냄새가 풍겨지기 시작합니다. 내 삶과 생각을 말씀에 맞추려하지 않고 세상에 적당하게 맞춰 살기 때문에 세상의 냄새가 납니다. 변화보다, 오히려 신앙의 퇴보는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 리 주위에도 보면 예전에는 주님을 위해서, 또 교회를 위해서 아주 열심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주님을 등지고, 교회를 등지고 세상으로 들어가서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옛사람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퇴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빨리 믿음을 회복해야 할텐데.’ 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그 신앙의 열심이 사라져갈 때에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의 열심과 구원의 감격이 점차 사라져 가면 언젠가 우리도 신앙에 낙오자가 될 수 있고, 퇴보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신앙을 단번에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구멍을 냅니다. 그 작은 구멍을 통해서 신앙이 조금씩 새 나갑니다. 내게서 신앙과 열심과 감격이 사라져가고 있는 줄도 모르게 그렇게 신앙을 빼앗아갑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다시 한번 신앙의 열심을 회복하지 않으면 아주 큰 곤경에 빠지고 맙니다.

 

올해 우리교회 표어는 자라나는 신앙으로, 성숙해지는 신앙으로, 열매맺는 신앙으로 로 이젠 주의 은혜로 건강한 교회로 나아가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이 잘 자라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데 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어떻습니까? 성장이 멈추거나 자라지 않으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여러분, 신앙은 멈추면 안 됩니다. 자라나야 합니다.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라나지 않는 내 자신도 문제이지만,내 주변도 함께 고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자주 이야기 하지만,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 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찮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를 살펴보는데 특히 7장에 보면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살았던 사람으로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사도 바울이 폭탄선언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소위 신앙인의 양심선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탄식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불신자의 탄식이 아닙니다. 이미 신앙생활을 그 누구보다 열정을 가진 바울의 고백입니다. 예수를 만난 이후 평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모든 세상 것을 포기했던 바울의 고백입니다.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기에 자신이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고 탄식을 하며 고백하는 것입니까?

 

지금 자신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또 선을 행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지내고 보면 자신이 원하는 선을 이루기보다는 악의 결과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7:14절에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려가서 23절에도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의 이 표현을 잘 읽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사도 바울 당시 횡행했던 노예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죄 아래 팔렸다.’는 표현은 노예시장에서 팔려가는 노예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노예시장에는 팔려나갈 노예가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노예를 사려는 사람은 그 수많은 노예 중에서 자신의 맘에 드는 노예를 선택해서 돈을 지불하고 그 노예를 삽니다. 노예는 자기가 주인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상이 험악하게 생겨서 그 아래 들어 가 죽도록 일만하고, 걸핏하면 채찍으로 맞을 것만 같을지라도, 나 그 사람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팔린 노예는 그 주인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 주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팔린 노예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그렇게 노예시장에서 팔려가는 노예의 모습이 꼭 자신의 모습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죄 아래 끌려가고 싶지 않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죄의 자리에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예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주인에게 끌려가듯이 자신이 죄 아래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가슴 아프게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수도 없이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도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다른 법이 자신을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역시 노예로 끌려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당시 노예가 되는 경우 가운데 하나가 전쟁에서 패해 노예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나라의 힘이 약해 전쟁에서 패하면 많은 사람들이 적군의 포로로 잡혀갑니다. 줄줄이 밧줄에 매여 끌려가는데, 그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습니다.

 

가기 싫다고 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다 풀어헤치고, 온 몸에는 채찍에 맞아 피멍이 들고 피가 줄줄 흐른 모습으로 적군에 끌려갑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죄 아래 사로잡혀 가는 자신의 모습이 꼭 그런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에 휘둘리어 온 몸에 멍이 들고 핏자국이 가득한 모습으로 죄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된 사람은 그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죄는 우리를 쇠사슬에 묶어 죄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죄를 즐기는 것 같지만, 죄의 덧에 걸린 이후에는 내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 덧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 노예가 되어 죄의 종노릇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 곤고한 사람이란 말은 유진 피터스는 벼랑 끝에 선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인간의 힘과 가지고 있는 경험으로는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의 상황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면에서 바울은 자기의 치부를 드러낼 정도로 매우 솔직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의 한경에 부딪히는 숱한 문제로 인해 얼마나 갈등이 많습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때로 세상의 유혹 앞에서 나약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도 믿음의 길에서 이탈된 채 살 때도 있습니다. 내 안에서는 의롭게 살고 정직하게 살려 하는데, 자꾸만 거짓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내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목사이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목사다운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 때도 있습니다.

 

자신이 실수했을 때 실수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실수했음을 알고 고치려하는 것에는 하나님께서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실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수했음에도 실수인줄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문제이고, 실수하지 않았다고 우기며 자기를 합리화하며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실수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실수하며 사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마귀가 이용을 합니다. 정죄를 합니다. 다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도록, 그리고 여지없이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인생을 허무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여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무너집니다. 신앙의 성장이 멈춰지게 됩니다.

 

그런데 보세요. 여기 바울은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8: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무슨 말입니까?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마침내 이 치명적인 딜레마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늘 먹구름이 드리운 것 같은 암울한 삶을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힘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세찬 바람처럼 불어와서 하늘의 구름을 모조리 걷어 주신 것입니다. 죄와 죽음이라는 잔혹한 폭군 밑에서 평생을 허덕 거려야 할 우리를 해방 시켜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귀한 복음인지 모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억누르며 과거로 이끌고 가던 그 모든 것의 줄을 딱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너는 무죄다. 너는 깨끗하다. 너는 이제 해방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로마서 8 1절은 그러므로 고 시작됩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동안 설명해온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를 하면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사실, 1절의 그러므로 5장의 내용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5: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 그러므로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5:1-2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8장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그 구원의 삶을 누릴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8 1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1절의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에서 결코는 바울의 강조를 나타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보면 결코 절대 불가능하다는 아주 강력한 강조의 의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정죄를 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것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죄인으로 취급할 법조문 자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2절은 1절에 대한 보조설명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8:2) 그동안 우리를 지배하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법 위에 다른 법이 생긴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 위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게 되어, 율법보다 더 큰 은혜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을 떼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나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놀라운 선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이 서신서에서 수없이 강조하는 문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곳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를 사용합니다. 주석가들은 119번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며,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흘러넘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말은 신약성경 안에서 드러난 비밀 열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놓치면 우리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약화시키는 경향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행위와 노력, 열심들이 강조될 때가 많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확신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뜨겁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 안에서 우리를 책임져주시며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 삶의 어떤 것도 받아들여주시겠다는 강력한 문구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과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믿음이 좋다해도 인생길에서 우리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인도 때로 범죄할 수 있습니다. 쓰러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예수 안으로 오십시오. 예수 보혈의 피를 의지하십시오. 그분 안엔 정죄함이 없습니다. 마귀란 놈은 참 어이가 없는 존재입니다. 죄를 짓기까지는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합니다. 세상엔 달콤한 일이 많이 있다. 세상에 죄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타협하며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야. 너무 혼자 순결한척 한다고 누가 알아 주냐. 이 정도는 죄가 아니야. 유혹합니다.그러다가 막상 범죄하고 나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패배의식, 정죄의식을 심습니다. 큰일 났다. 하나님은 너를 떠났어. 내가 그런 죄를 짓다니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너는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게 돌아가도 받아 주시지 않을 거야. 네가 무슨 염치로 또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말할 수 있겠니.’ 이것이 마귀의 수작입니다. 작전입니다. 죄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분 의 놀라운 선언을 들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그의 책 파우스트에서 껍질을 벗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뱀은 정기적으로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뱀이 자신의 껍질을 벗지 못하면 그 껍질이 칼과 같은 날카로운 도구가 되어 자신의 살을 찌릅니다. 그러면 뱀은 자신의 껍질 안에 갇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지난날의 珦 벗어야 합니다.

 

이제 새해부터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내려놓고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이 나를 당당한 삶으로 살아가게 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늘 무기력한 모습으로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사는 인생이 되었는가?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자기희생의 댓가를 치루고 이루어진 사실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하시면서 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은혜의 열매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우리를 불러 주셨는데,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채 오히려 이 세상이 추구하는 일에 동화되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이제 세상 방법대로,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세상에 사는 동안 때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다하더래도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그분께서 내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세신바되신 그분께서 내 신음소리마져도 응답하시는 그분께서 당신의 방법으로 나를 향한 어떤 기대가 있기 때문에 지금 잠깐 고난이 있지만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여러분을 누가 정죄 하겠습니까? 성령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정죄함을 당할 수가 있습니까? 아무도 우리중 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 중 하나님 앞에서 고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보시고 죄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당당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1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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