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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31 고난에서 영광으로 (롬8:18-25)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02-24 | 조회: 1634
고난에서 영광으로 롬8:18-25. 2016. 1/31. 주일 예배 

  

얼마 전에 폐암으로 씨름하다 하나님 품에 안긴 옥한흠 목사님이 있습니다. 제자훈련을 통해서 우리나라 토양에 영적 소망을 불러일으킨 분이 아닙니까? 이 분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처음으로 쓴 책 한권이 있는데 그 제목이 “고통에는 뜻이 있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대할 때마다 남다른 감회가 오는 좋은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분이 서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사실 고통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겪으며 맛본 고통이란 실은 고통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이 빠져 있는 고통의 심연은 죄악의 심연만큼 어둡고 깊어서 그 밑바닥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욥의 고통을 맛보지 못한 자가 어찌 그를 두고 한마디인들 할 수 있겠는가? 예례미야가 마셨던 쑥과 담즙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 그의 고통을 논할 수 있겠는가?” 참 솔직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책의 내용을 보면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고난이 왜 오는지 우리는 그 답을 다 담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현장 앞에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지, 아니면 다시 일어날 것인지는 그 판단 여하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고통은 누구나 동일하게 당하는 것이지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즉 고통은 누구에게 다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자세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고통 중에서도 마음가짐이 달라야 할 것입니다. 이 고난이 어떤 이유에서인가? 이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등을 생각하면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소개되는 바울은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 그의 생애에 3차례나 전도여행을 하게 되었고, 이제 그는 자기의 동족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떠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체포당하여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자신 앞에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길을 걸어갈 때 밀려오는 고독과 고통을 이해하겠습니까? 어찌 그 뿐입니까? 바울을 아끼는 믿음의 동역자들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합니다. “선생님, 제가 예루살렘에 갔었는데 예루살렘에서는 선생님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자지도 않겠다고 결심한 특공대가 조직되어 있습니다 . 선생님,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라며 만류합니다. 



행20:22에 보면 그 당시 바울의 심정을 어떠한가 보게 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불길한 예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차라리 못이기는 척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고난이 있고, 핍박이 있고, 심지어 죽음이 있다할지라도, 이 가는 길이 하나님 뜻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 사명을 위하여 주변 만류도 뿌리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갑니다. 바로 이 시기에 고린도 도시에 잠시 머물던 바울은 이 로마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이때가 AD 58년경이고 이 편지를 롬 16:1에 뵈뵈자매의 편으로 붙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교지를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핍박과 고난이 그를 괴롭혔겠습니까? 보십시오. 고후 1:8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 엄청난 고난의 현장가운데 바울은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살아날 희망이 없는 이 절망감! 보통 사람 같으면,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에 고백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 “생각하건데”,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생각은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심사숙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고난이 자신을 겹겹이 에워쌀 때 주변 여건이나 환경에 메이지 않았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께 그의 시선을 맞추었습니다. 

  

바울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의 인생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날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내 인생 한복판에 오셔 서 한번 택한 내 삶을 결코 놓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고난 가운데 처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 자체를 주고자 하심이 아니라 다른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같은 미물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나를 사랑하심에도 내가 지금 괴로움의 현장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한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갓난아기를 목욕시키면, 처음에는 아기가 십중팔구 자지러지게 웁니다. 엄마가 씻겨 주는 것인데도 자기를 죽이려는 것이 아닌지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울음을 멈추고, 오히려 물에 젖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기의 수준에서도 엄마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9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5-16) 우리 주님은 나를 보시는 주님입니다.  그 주님을 생각하세요.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과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어마어마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고난을 넘어 영광이 보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도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신음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까요? 그러나 바울은 단호합니다. “현재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 고난이란 우리에게 문제가 아니라 기회가 됩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고통을 비관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밝은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럴 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한가운데서도 찬송할 수가 있습니다. 고통 한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자세입니다. 실낙원을 썼던 존 밀톤은 그의 나이 40세때 앞을 못 보는 맹인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이때 그는 고백합니다. ‘오 주님! 이런 고통을 통하여 내 영혼이 수그러짐은 나의 창조자를 섬기기 위함이니이다.’ 고난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인격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는 가장 절망적인 그때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인격을 바로 닮을 때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나눈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집은 가벼움이라“ 



주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전에 한 가지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내 멍에를 메라” ‘멍에’란 어떻게 보면 고통일수도 있고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 멍에를 멘 후에야 비로소 그 아래서 인격이 형성됩니다. 예수님이 그 고삐를 잡고 조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서 하나님의 성숙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 멍에를 지기 싫어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준다면 하나님의 품이 있는 자녀가 아니라 훨훨 날아가는 들새같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근심을 너무 잘 아십니다. 사 48:10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 풀무에서 택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다” 

  

그런데 여기 23절에 보시면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고난이 장차 영광으로 변화될 것을 믿지만 그 과정 속에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이 있습니다. 23절을 같이 보십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여러분, 여기에 ‘탄식’의 의미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산모가 겪는 산통은 결국에 가서는 기쁨을 가져오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아픔이긴 하지만 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고통이며,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쁨 기대 속에서 마지막에는 신생아가 태어남으로 그 고통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통은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탄식합니다. 

  

보 십시오. 우리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지만 동시에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둘 사이에 끼어 사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왜 고통과 아픔이 옵니까?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하니까 세상이 우리를 놔두지를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있어요. 직장에서 술자리에 함께 앉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나중에는 근무평가에 직원들간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그럴싸한 이유 때문에 진급마저 잘 안돼서 만년 계장 노릇 하는 가장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하는 투기성 재회에 덤벼들기만 했더라면 그런 대로 한 재산 모았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하다 이제는 자녀들이 크면서 더 빠듯해진 살림을 꾸려야 하는 부분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나이는 차서 시집은 가야되겠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고집, 그것 꺽지 못해서 혼기를 놓친 채 아직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자매들 그렇다고 믿는 것 따지고말고 조건보고, 결혼하자니 신앙양심이 허락지 않아 남들로부터 이 눈치 저 눈치 받아가면서 지금까지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의 청년들 모습 속에서 저들의 아픔을 봅니다.  이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탄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나 체념의 탄식이 아니요, 진리를 가슴 안에 끌어안고, 장차 내가 누릴 소망을 기다리며 결코 세상방법으로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을 피조물이 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니니”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자연만물은 창조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께서 만물까지 인간과 똑같은 저주의 자리에다 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피조물은 허무한테 굴복하게 되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허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21절에는 썩어짐이 종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 피조 세계가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인간이 벌이는 허망한 짓들에 피조 세계가 굴복당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연이 인간의 허망한 욕망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훼손되고 오염되고 파괴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 죽음 가운데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열매 맺는 것이 전부 죽음의 열매입니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야 할 피조 세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죄의 삯에 대한 법칙을 그렇게 주셨습니다. 

  

세계 최대의 환경 운동 단체라고 하는 ‘월드 워치 자구 감시 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는 오늘날의 환경위기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지구 환경위기는 이제 과학기술의 발달이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혁명적인 기술진보가 없는 한 인류는 다가오는 굶주림’ 시대를 필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전 세계 인구는 매년 거의 1억명씩 증가된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와 같은 추세가 계속될 전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의 곡물 생산량이 84년 이래로 급격히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농업용수의 오염은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도시화로 인해 농경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하루에 굶어 죽는 사람이 세계에서 3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3초에 한 명 꼴이요, 1년이면 1000만 명이 되는 우리 지구인의 숫자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 까? 무분별하게 자연을 착취하고 훼손시킨 데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면 우리나라도 환경문제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산업화’라는 허울 좋은 이유를 내세우며 산지와 농지를 함부로 파헤치고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고 죽음의 폐수를 제대로 처리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하청으로 흘려보낸 결과 땅과 강, 바다, 공기 그 어느 것 하나 병든 지 않고 남아 잇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많은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에 다라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엄청납니다.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폐수를 흘려보내고 공해를 일으켜 가면서도 공장을 가동합니다. 왜냐하면 공해도 공해지만 당장 내 이익이 생기니까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그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나라가 중국입니다. 스모그는 그들의 경제 성장의 결과입니다. 심각한 대기오염인 스모그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에서 특히 작년 하루 평균 2천명의 폐암 환자가 새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작년 한해에 폐암으로 사망한 암 환자가 61만 명이 넘어 섰다고 합니다. 이는 재앙입니다. 자연을 파괴한 댓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는 셈입니다. 

  

인간의 욕심이 주장하게 되면 누구도 잘못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욕심대로 살면 이 세상은 파괴되어가고 불균형과 갈등으로 파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피조물이 다 압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세상이 파괴되어가고 갈등이 생기고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는 단 하나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을 포기하고 제 마음으로 대로 제욕심대로 살기 때문에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19절에 보면 이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대하는 게 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두 말 할 것 없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이 자신을 회복시켜 줄 사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피조물은 어느 정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에 의한 파괴가 심각해지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기능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회복할 능력이 없어서 회복시켜줄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답지 못하여 피조물까지 함께 고통을 받으며 탄식하게 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사람과 함께 고통을 받으며 탄식하는 것은 피조물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니 허무한 것입니다. 허무한 데 굴복한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한다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그 본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유익하고 사람의 삶이 보다 행복해지는 데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사람에게 유익하고 사람의 삶을 보다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피조물 자체의 뜻이 아닙니다. 사람 때문에 다른 모든 피조물이 힘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자유롭게 영원히 복된 삶을 살아야 할 사람이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피조물도 덩달아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었기에 피조물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며, 그래서 함께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피조 세계를 살리는 구원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24-25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어떤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소망을 품고서 참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 여기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소극적으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망이 있으면 기다림도 기쁩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기다림처럼 지겨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또 사랑이 있으면 기다림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비록 현재의 고난 중에서도 사랑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마음속에 주님을 바라보는 <기다림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질투, 욕심, 고독, 우울, 자폐, 미움, 냉소 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들은 누구를 기다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기다림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사랑하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에 사람들에게는 참아내는 여유가 없습니다. 싫으면 싫다고 금새 갈라섭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했다가도 금방 돌아서서 실망했다고 합니다. 실망(失望)이란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망이란 최후로 하는 말입니다. 실망했으면 더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더 소망이 없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의 삶속에서 십 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용의가 있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장차 있을 영광을 바라볼 수 있다면, 현재의 고난은 능히 이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이세상의 유혹과 환경 앞에 허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삶의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단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고난이 오고, 핍박이 와서 자신이 무시되고, 오래되고, 멸시가 되어도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비록 고난이 그의 인생을 휘감고 있었지만 현재 받는 고난이 하나님께 미래에 주실 연장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그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며 소망의 관을 부여잡고 기꺼이 그의 삶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탄식이 있고 힘듬이 있어도 결코 흔들림이 없이 주의 영광을 보고 당당하게 나아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이 은혜가 우리 안에도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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