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2016-02-14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1-3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02-24 | 조회: 1452

넉넉히 이기느니라 8:31-39. 2016. 2/14. 주일 설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마가의 다락방에서 음식을 나누면서 조금도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16:33절에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십자가 이후 부활의 승리를 있음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위험에 직면하자 제자들은 모두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실 때 모두 기겁을 하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담대하라고 당부하셨지만, 내가 이미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도 세상을 이기리라고 승리를 약속하셨지만, 그러나 막상 시련에 부딪히자 제자들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위로와 평강과 놀라운 하나님의 언약들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세상 속에서 환난과 역경을 당하게 되면, 그 모든 말씀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채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별로 다를 바 없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너무나도 쉽게 희망을 잃어버립니다.주님께서 세상을 이미 이기셨다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세상에게 패하면서 살아야만 합니까? 주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 우리는 왜 매순간 실패를 거듭하며 한숨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까? 소위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우리는 왜 그렇게도 맥없이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3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세상 앞에 선언합니다. 지금 바울은 5가지 질문형식을 빌어 넉넉하게 우리 인생을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는가⑤?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얼마나 벅차고 얼마나 확신이 가면 이 같은 감격의 외침을 할 수 있을 까요? 여러분에게도 바울이 이처럼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고백이 있습니까?

 

오늘도 이 예배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나를 사로 잡아오는 그 은혜 때문에 내 인생을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열망들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도 내 목숨, 내 인생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드릴만한 믿음도 열심도 사랑도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내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가면서 까지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헌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는 38년된 병자처럼 자신의 병을 고치려는 의지는 접어둔 채 점점 무력해가는 만성 의욕상실증에 빠져있고 심지어 자신의 침체된 원인을 남에게 돌리려는 비굴함과 어두움들이 깔려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이 바울의 확신된 고백을 들으면서도 때로 당황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세상을 이긴다고, 그것도 넉넉히 이긴다고 했는데, 세상을 정복한다는데, 그런데 나는 왜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기는커녕 날마다 무력하리만큼 나약하고 가련한 모습처럼 세상 속에서 몸부림쳐야 합니까? 오늘 우리 안에 구원의 기쁨이 없어지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식어지고 있다면 본문은 그 이유에 대해서 3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의 윤기나는 신앙을 흔들어 놓는 적이 있다면 무엇보다

 

.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31)

그런즉 이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기 위한다 것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데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이 없는 한, 그 사랑 때문에 죄와 사망에서 건져 놓으신 우리를 포기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는 악한 구석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끝까지 나를 사랑해 주실까? 나같이 이기적이고 하나님의 기대에 못미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는 나를 받아주실까? 하는 의심을 가질때가 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든지 또는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던 사람에게도 그 정도의 차이는 다를지라도 가끔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며 의심의 독버섯이 솟을 때가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풍랑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건강을 자신하는 사람에게도 뜻밖에 중한 질병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사업이 탄탄한 궤도에 오른 사람에게도 먹구름이 덮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설계하고 오손도손 서로 사랑하며 살다가도 갑자기 위기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생하기도 합니다그런데 우리가 이런 비극을 당하여 몸부림 칠 때 하나님께서는 무관심한 것처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 같이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 누구나 ! 정말 모르겠다 하고 말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잘 모릅니다. 사실 인생의 사사건건에 대하여 ?”는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요구한다면 약간의 대답은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온전한 진리는 될 수 없습니다.

 

욥의 아내를 보십시오. 자식도, 재산도, 멍에도, 집도 다 잃은 채 잿더미 위에 앉아서 기왓장을 가지고 몸을 긁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2:9에 보면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현대의 번역은 이 본문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믿음을 지키고 있단 말이요? 참 속터지는 양반 다 보겠네. 차라리 하나님한테 욕이나 퍼붓고 죽는 편이 더 늑 않겠소!” 욥의 아내뿐만 아니라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어떤 어려움에 부짖힐 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올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빠져 나올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논리를 가지고 마귀가 아무리 유혹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1959년대 한창 전도자로서 활동할 때입니다. 가는 곳마다 집회를 하고, 가는 곳마다 전도를 해서 수많은 사람이 돌아오게 되자 매스컴을 타고 그 젊은 청년 목사가 미국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던 때였습니다. 그때 템플턴이라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도 가슴에 불을 안고 전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유럽으로 순회하며 전도할 때도 같이 가서 교대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템플턴이 빌리 그래함보다 더 유능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전도하면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불과 얼마 되지 않아 1200석 교회당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기를 만났습니다.

 

한 장의 사진 때문에 그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 사진은 북아프리카의 여인이 굶어 죽은 아기를 무릎에 앉혀 놓고 하늘을 향해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사진이었습니다.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진을 얻었나 봅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엄청난 가뭄으로 사람들이 고통 당하며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고, 많은 짐승들은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면서 템플턴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여인에게,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비인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여인에게 비를 주시지 않겠는가? 그 하나님이 그렇게 자비하시고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시다면,어떻게 죽어가는 이 아이에게 비를 주시지 않겠는가?' 그 다음부터 그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 예수님도 포기해 버렸습니다. 전도자의 삶도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로 갔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는데, 이 사람은 한 순간에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없는 불가지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믿어?' 하고는 다른 길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여기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로마 군인이었습니까? 아니면 빌라도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기에 내여 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끼던 독자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어두움의 권세에 내 놓고 채찍에 맞게 하고 수모를 당하게 하고 죽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우리를 구원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간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 몸이 흠뻑 젖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그 아들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실 만큼 사랑을 넘치도록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나 같은 것을 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랑하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대신 나를 끌어 안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나는 주님을 때로 잊어버리지만 때로 원망도 부정도 해보지만 심지어 주님을 배신을 하였지만 그 분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독생자까지 내 놓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들 못 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이 은혜, 이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 또한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죄책감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충만하다가도 구원의 감격, 구원의 기쁨을 상실하는 것은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이 죄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남의 눈에 뜨이게 , 뜨이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가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한 두 가지 죄를 짓게 되면 용서받았다, 구원받았다 하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흔들리게 됩니다.

 

마귀는 우리의 이러한 약함을 지렛대 삼아  가 이러고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그래? 그런 위선이 어디있어!”라고 침을 튀기며 우리를 정죄하려고 달려듭니다.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어떤 말로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알든 모르든 죄는 그대로 엄연히 있습니다. 그 결과 죄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또한 두려움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듯이 네가 선을 행하였으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는냐(4:7)”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이요, 얼굴을 들지 幣求 이유가 있다면 그것도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3-34에 보시면,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아무렇게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는 빽이 든든하니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은혜받고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하늘의 비밀한 것들을 체험하며 살아도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자신도 보지 말고 우리의 언행에 모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활이 비록 깨끗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말고 시종일관 예수님에게만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되 회개의 영을 부어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시고 당신의 보혈로 우리의 연약함을 씻기워 우리로 정결케 하시고 깨끗게 하십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왕은 실로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물론 기타의 많은 죄도 있겠지만 대표적인 죄가 밧세바와 통정한 것으로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그의 남편을 죽였으며 그리고 깊이 숨겨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이 와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 할 때 그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다윗의 참회록을 보면 계속되는 그 많은 회개의 말 가운데서 밧세바를 원망하거나 책망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은 그 요사스러운 여자 때문이었는데 하는 원망의 소리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세상을 탓하지도 환경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하는 간사함이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자백할 뿐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죄에 대한 바른 자세입니다. 세상은 그를 정죄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그를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전에는 무섭기만 하던 하나님이 이제는 반가운 하나님이요, 전에는 진노의 하나님이더니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이요 지난날의 음성은 두렵고 저주스럽고 낭만적이었으나 이제는 자비하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임재 앞에 나의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토록 자신에 대해 자학하고 자신을 경멸하던 자리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지불한 십자가의 대가! 나를 위하여 지불하신 그 엄청난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내가 죄를 지을 때에 또 하나님은 참아주셨습니다. 내가 형편없는 길로 갈 때에 당장 벼락이라도 치셨더라면 그것을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아 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까이 오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정죄하고 누가 나를 송사합니까? 여러분 이 죄사함의 은혜를 입게 되면 모든 사람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적이 있다면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시험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무서운 시험이 덮치면 평안할 때 가졌던 확신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35절을 봅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 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리라 이 얼마나 무서운 단어들입니까? 세상에서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것들이 여기에 다 나옵니다.

환란은 원래 로마시대에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트리볼륨이라는 타작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도리깨와 같은 것입니다. 땅에 곡식을 깔아 놓고 도리깨로 힘껏 내리치면 곡식알들이 전부 떨어집니다. 환란은 마치 신자들을 땅에 눕혀 놓고 도리캐로 내리치듯 호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곤고는 정신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운신 할 수 없도록 좁은 감방에 갇혀서 옴싹달싹 못하는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터질 것 같은, 미칠 것 같은 정신적 고통을 곤고하고 합니다. 핍박은 노골적인 박해입니다. 기근은 굶주림이요, 적신은 헐벗음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들고 살던 그 대에는 예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많은 성도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곳으로 쫓겨 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굶주림과 헐벗음에 견디지 못해 죽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무서운 시련을 당하게 되면 우리의 확신은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끊을 수 없습니다. 곤고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핍박도 끊을 수 없습니다. 배고픔 기근도 끊을 수 없습니다. 적신이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위험한 일을 당해도 끊을 수 없습니다. 칼과 총과 원자폭탄이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끊으리요.’ 여기 그리스도의 사랑란 말이 나오고 39절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사랑에서 아무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사랑을 아무도 끊을 자가 없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얼마나 방해를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지 못하도록 사탄은 방해를 했습니다. 그가 태어날 모든 여관을 채워버리고 말았습니다. 헤롯을 동원하여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동원해서 십자가를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가롯 유다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 주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영원한 승리는 자기 것이라고 쾌재를 불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부셔뜨려 주셨습니다. 그분은 무덤에 갇혀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승천하셨습니다. 무덤이 그를 가두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승리한 분이십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실패하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비틀거리고 쓰러지고 넘어져도 당신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무서운 죄악에 빠졌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당신을 구원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랑의 힘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당당하게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