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라,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말라 욥1:13-22 2016. 2/21. Ⅰ
우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생을 일컬어 수수께끼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몰라. 크면 다 알게 돼!” 하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살다보니까 더욱 모를 것이 인생이요, 안다고 하는 그 자체가 사실은 모른다는 것을 다른 면에서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그 인생의 한 복판에서 좀 더 나은 행복을 다들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행복이 우리에게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조용히 들여다보면 행복보다는 불행한 모습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형통함보다 고난이 더 가득한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 누구도 고통과 고난의 자리에서 예외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지 않 습니까? 사실, 인생의 문제 가운데 고난의 문제만큼 신비스럽고 심오한 것은 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고통의 문제에 대해 크고 작은 책들을 수없이 썼지만, 아무도 그 고난의 깊이를 파헤치지는 못했습니다. 의인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거나, 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실패하고, 남들에게 천대를 받으며, 인생을 어둡게 지내는 것을 볼 때, 고통에 대한 신비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고난돌파”라는 주제로 욥기서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뭐, 이 가운데 욥에 대해서 모르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욥은 우스 땅(지금의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 국경 부근)에 살고 있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 즈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가정으로 보나, 재산으로 보나, 신앙으로 보나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2절 보면 그의 가정에 관한 소개가 나옵니다. 그는 슬하에 7남 3녀를 두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놀랄 일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다복한 겁니다. 그리고 3절 보니까. 재산목록이 나옵니다. 양이 칠 천, 약대 가 삼 천,소가 오백 겨리, 암나귀가 오백 등이 있었고, 일하는 종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갑부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신앙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습니다. 1절 후반 절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4-5절을 보면, 얼마나 철저했는지 자식들이 잔치를 치르는 날이면 혹시라도 실수를 하거나 신앙이 해이해지지 않았을까 염려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의인이었습니다. 욥은 재산도 많고, 가정도 다복하고 신앙도 좋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오래 오래 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은 그런 게 아닙니다. 험한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닥쳐오기 마련입니다. 욥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욥에게 엄청난 재앙이 닥치고 말았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가지고 있던 그 수많은 재산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0명의 자녀들이 한꺼번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재산 가운데 일부라도 남겨지면 그래도 좀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넘겨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변 나라 사람들이 쳐들어와서는 다 약탈해 가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마저 벼락에 맞아 다 죽고 말았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열 명의 자식 가운데 하나나 둘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집이 무너지면서 한꺼번에 10명의 자식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찰 노릇입니까?
고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장으로 넘어가면, 몸에 악창이 생깁니다. 얼마나 괴로웠던지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시련의 상황입니다. 욥은 자신의 비극적 상황을 스스로 이렇게 묘사합니다. 욥19:9-10절에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 립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 ” 한 마디로 말해서 소망이 뿌리째 뽑힌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욥을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면 욥에게 어떻게 그런 재앙을 허락하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하나님께서 욥을 참 훌륭한 신앙이라고 사단 앞에서 자랑할 정도로 욥의 신앙을 인정하셨다면, 그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욥에게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실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하고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고 그런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욥이 고난을 당합니다. 처참한 고통을 당합니다. 마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듯한 고난을 당합니다. 욥이 당한 고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인도 고난에는 예외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이 가지는 보편적 성격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으로부터 안전지대는 이 땅위에 없습니다. 성도일지라도 고난을 당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당합니다.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일지라도 고난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흔히들 인생을 바다로 많이 비유를 합니다. 이 인생의 바다는 불안과 공포를 안고 있습니다. 유리같이 맑은 바닷길을 순풍의 돛을 달고 힘차게 달려가면서도 선원들의 마음속에는 “폭풍이 불어 닥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을 안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재 우리의 생활이 편하고 걱정이 별로 없어도 마음 한 구석에는 형통한 것이 오히려 불안의 요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인생의 바다 한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바다의 풍랑에 시달리며 멀미를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잘 아는 목사님 한분이 메일을 보내 왔습니다. 정말 건강하시던 분인데 병하고는 담을 쌓을 정도로 운동과 모든 것을 당당하게 살았던 분인데 위암이 몸에 들어와 수술하고 투병을 하는 분입니다. 제가 그 글을 보면서 이분에게 이런 아픔이 없었다면 이런 글이 나오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봄은 늘 변덕이 심하네요/ 지난주에 봄기운이 두터운 옷들을 벗게 해놓고 나서 느닷없이 덜덜 떨게 하기도 하고, 썰렁하게도 하구요./그래서 철없는 식물들은 ... 세상을 못 믿는 약삭빠른 사람들처럼 재빠르게 잎보다 먼저 대뜸 꽃을 피웠다가 활짝 필 겨를도 없이 당해서 쓰러지기도 하지요.
안 목사님! 봄은 어느 날 갑자기 덜렁 오지 않고 올 듯 말듯 내줄 듯 말듯, 멈칫 멈칫 오는군요. 그래서 더욱 간절하고 매력이 넘치고요. 그런 변덕을 탓하지 말고 조금 느긋하게 기다리면 어느 날인가는 완연함 봄볕에 흐드지게 핀 개나리를 한웅큼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 재물, 사랑, 행복, 회복의 기회도 이런 봄과 같지 않을까요?” - (그도 문제를 만나니까 이제까지 알지 못했더, 그리고 쉽게 지나쳤던 그것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고난은 더욱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그 모습을 드러 낼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고난이 갖는 예측불허의 성격입니다. 여기 13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이라고 시작됩니다. 이 말은 대단한 무게를 가지는 말입니다. "하루는"이라고 한 바로 그날은 욥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엄청난 날이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그날에 일어났습니다. 그날은 욥의 자녀들이 맏형의 집에 모여 잔치하는 날이었습니다.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행이 예고없이 그 집에 찾아 왔습니다. 갑자기 스바 사람이 칼로 종들을 죽이고 하늘에서는 불이 내려와 그의 모든 재물을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거친들에서 부터 대풍이 불어와 잔치집의 네 기둥을 쳐서 집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들이 갑자기 일어난 일입니다. 예고가 없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15절에 "갑자기"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하루는"이라는 그 하루는 "갑자기" 찾아온 것입니다. 욥도 몰랐고 욥의 모든 가족들도 몰랐습니다. 이 뿐입니까? 2장에서는 욥 자신마저도 병이 들고 맙니다. 이 모두가 졸지에 당한 일입니다. 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비극의 스토리입니까? 재난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것입니다. 29장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하리라 나의 날은 모래같이 많은 것이라" 여기 선종이라는 말은 착하게 살다가 복되게 임종을 맞이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0장 26절을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이것이 고난의 성격입니다.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장 1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시작되고 있습니까? "또 하루는"이라고 시작합니다. 이제 이 표현은 욥에게 있어서는 끔직한 표현입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는 말처럼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히드라>와 같은 것이 고난의 정체입니다. 이 괴물은 머리를 칼로 잘라버려도 또 머리가 나옵니다. 요즈음 아이들이 보는 로봇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잘라도 또 머리고 나오고 잘라도 또 머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도무지 죽지 않습니다.
이날은 욥의 육신에 질병이 찾아 왔던 날입니다. 악창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악창이란 병을 구약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으로부터 작은 종기에 까지 넓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욥이 당하는 고통의 정도를 보면 이 병은 단순한 피부병은 아니었습니다.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했습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성한대가 없었습니다. 앓는 소리가 마치 물이 쏟아지는 것같다(3장24절)고 했고 밤이면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7장4절) 종기에는 구더기가 우글거렸으며(7장5절)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19장20절) 뼈를 애이는 통증이 잠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30장17절) 19장17절에는 그의 아내가 욥의 숨소리조차 듣기를 싫어했다고 하였습니다. 종들도 그를 없신 여기고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았으며 친구들조차도 그를 버렸습니다.(19;15-16, 18-19)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고난을 당해 보셨습니까? 우리 중에는 마음에 근심과 괴로움을 안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말할 수 없는 진통을 겪는 분들도 있습니다. 푸른 꿈이 산산히 깨어지고 허리가 잘리듯이 괴로운 날들이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고통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자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잘못하면 우리도 욥을 찾아와서 괴롭히던 친구들처럼 되기 쉽습 求. 우리에게는 종종 마음대로 주석을 달고 판단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사실 고난당하는 당사자만큼 괴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마음을 알아 줄 사람이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욥기를 대하면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고난이 왜 오느냐는 이 원인에만 매달리지 말고 고난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떤 자세,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괴롭히는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난을 가지고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욥이 처한 것 같은 극단적 상황에 마주치게 되면 대개 원망, 불평, 저주, ... 결국은 자살 소동까지 벌입니다. 그런데 욥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배하고 찬송하며 감사했습니다. 20-22절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보십시오. 이 절망의 자리에서 그는 예배자로 그의 시선을 하나님께 향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인생의 가장 축복의 현장입니다. 그는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결코 지금의 자신의 처참한 환경 앞에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고난의 잿더미 속에서 찬양을 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것이 고난 앞에 선 욥의 모습니다.
혹자는 이렇게도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런 욥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의아해집니다. 아니면 그가 목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욥은 정신도 멀쩡하고 목석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슬퍼하고 있습니다. 괴로워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20절 보십시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이것은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극도로 슬프고 애통할 때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는 초인도 아니었고, 목석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금니를 깨물면서 그 마음을 다잡은 겁니다. 그리고 예배합니다. 찬송합니다.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연약하지만 힘들지만 신앙을 지키고 마음을 지킨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욥은 지금 거대한 고난의 파도 앞에 그냥 맥없이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운명론처럼 모든 것을 체념하며 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독한 불만의 화살을 퍼붓고 원망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문제를 만날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최악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려우면 대개 근시안이 되어, 어려움에서 빠져나가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그래서 당장 쉬운 길을 찾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마다 겪는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적조 현상입니다. 요즘 적조 현상으로 바다의 물고기 떼들이 몰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적조 현상이 일어나니까 생명체들이 숨을 쉴 수 없고 흙을 붓지만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죽음의 힘이 임하니까 아무리 몸부림쳐도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면 한 순간에 해결이 됩니다. 우리가 이런 고난 앞에 왜라는 원인 규명에 메달리지 말고 비록 힘들지만, 고통스럽지만, 우리의 시선을 문제에다 맞추지 마시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번 부흥회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요. 태도입니다.
그래야 욥기서를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게 됩니다. 인생의 갈림길은 바로 이때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룻을 보세요. 자신의 선택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나는 죽어도 어머니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서>에서 에스더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 선택은 옳았고 민족의 운명을 바꿔 놓았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도 다양한 신들 앞에서 우물쭈물 하고 있는 백성에게 너희가 섬길 신을 선택하라고 단호하게 외칩니다. 인생의 갈림길에는 생명을 건 선택과 결단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변화는 생명을 건 선택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런 의지적인 선택은 우리가 가는 길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행동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절망할 수 있습니다. 요즘 나라가 정말 힘든 시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경제 역시 수출이 곤두박질을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이런저런 대안을 쏟아 내보지만, 답이 없습니다. 이제 이 나라를 짊어져 가야할 우리 청년 실업률은 장난이 아닙니다.졸업을 마치고 나오는 청년들의 발걸음이 정말 무겁습니다. 누군가가 대한민국의 현실을『절벽사회』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인구 절벽, 재벌 절벽, 교육 절벽, 취업 절벽, 임금 절벽, 금융 절벽, 창업 절벽, 주거 절벽 속에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 속에 자칫하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음을 맛볼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진단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 고통과 고난 없이 살아간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아무도 고통을 원하지 않지만, 또 아무도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고통과 고난은 늘 우리네 인생의 길목을 가로막고 서서 우리를 힘들게 만들곤 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는 고통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C. S. Lewis 교수는 옥스퍼드 대학의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나올 때, 한 학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증거 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이런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겁니까?? 그 때 루이스 교수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이 있어도 교만한 인생인데, 만약 인생의 길에 고통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교만하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확성기)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커갈 때, 남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잘 할 때, 손대는 일마다 잘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폭풍이 불고, 풍랑이 밀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히2:18절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리라” 예수님은 완벽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인간을 위로하시고 도우시기 위해 친히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자리까지 가셔서 그 고난의 잔을 다 마셨습니다. 그 주님은 여러분의 탄식도 여러분의 상처와 아픔을 아십니다. 그 주님 앞에 바짝 다가와 앉으십시오. 지금 바로 이 시간,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을 시간입니다. 그 슬픔과 절망의 가슴을 끓어 안고 여호와 앞에 엎드리십시오. 여러분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슬픔을 받으실 여러분의 여호와가 계십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분명하다면, 여러분이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시선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보십시오. 욥이 우리가 평생 겪지 못할 그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눈물과 탄식이 나를 억누를지라도 나는 오직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이것이 욥과 같은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축복하십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고난중에 있습니까? 그럼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문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러져 있습니까? 주님을 보십시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