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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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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8 십자가와 나 (막 8:27-3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02-28 | 조회: 1559

십자가와 나 막 8:27-38 2016. 2/28 주일 설교
 
영국의 전설적인 육상선수 가운데 에릭 리델(Eric Henry Liddell, 1902-1945)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 가정에서 출생한 그는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한 후 본격적인 육상선수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22세 때인 1924년 파리에서 열린 제8회 파리 올림픽에 영국의 육상 대표선수로 출전하게 됩니다. 당시 그는 100m 경기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선 첫 경기 일정이 7월 6일 주일 오후 3시와 5시에 잡혀 있다는 것을 알자, 100m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그는 ‘주일을 하나님의 날로 지키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에릭 리델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아주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를 가리켜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이라느니, ‘신앙을 소매 끝에 달고 다니는 신앙심 깊은 척 하는 위선자’라느니, ‘조국의 명예를 버린 배신자’라느니 하는 비난이 계속되었습니다. 심지어 영국의 황태자도 에릭 리델에게 마음을 바꾸라고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런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일생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기회입니다. 조국 영국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강력한 금메달 후보입니다. 금메달을 따면 조국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국가적인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경기가 주일이라는 것 때문에, 주일은 하나님을 위해 지키는 날이기 때문에 경기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에릭 리델은 그날 평소와 같이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주일을 보내게 됩니다. 그날 100m 경기에서는 동료인 헤롤드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 후 에릭 리델은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200m에 나가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400m에서는 2위를 15m나 앞서며 결승선에 통과함으로 금메달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세계 신기록으로 말입니다. 그는 경기 후에 우승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처음 200m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달렸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욱 힘껏 달렸습니다.”
 
그렇게 그는 영국의 영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스포츠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는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딴 스포츠 영웅인데, 그 모든 명예를 뒤로 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금메달을 딴 다음해에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중국 선교사로 떠나고 맙니다. 그는 금메달이라는 명예와 국민적인 영웅이라는 찬사보다도 중국의 가난한 농부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더 없이 귀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군에 의해서 熾堉奴 수용되어 있다가 43세가 되던 해인 1945년 2월 뇌출혈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여러분, 에릭 리델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선택한 길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그렇다면 여러분에게 그런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그 길을 가시겠습니까? 낯설고 먼 타국의 가난한 한 영혼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명예와 영광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구별하여 당신의 백성 삼아 주셨습 求 .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당신의 자녀요 당신의 백성으로 불러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신앙인이 되어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세상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일을 합니다. 그럼 우리 신앙인들도 행복이 인생 최고의 목표이고 삶의 목적이어야 하겠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가치로 생각하고, 신앙의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고통과 고난 없이 살아간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고통을 원하지 않지만, 또 아무도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고통과 고난은 늘 우리네 인생의 길목을 가로막고 서서 우리를 힘들게 만들곤 합니다. 그건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셨고,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생애는 ‘고난’으로 운명지워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물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라고 하는 가장 가혹한 처형방법에 의해서 처절하게 죽어가야 하는 그 길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내용처럼‘할 수만 있으면’ 그 길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고 이유였기에 예수님은 결국 그 길을 따르게 됩니다. 그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죄에 종노릇하는 우리네 인생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흥미를 끄는 말 가운데 하나가 “비로소”라는 단어입니다. 본문 31-32절의 말씀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이 말씀을 뒤집어 읽으면, 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고난으로 인해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에야 비로소(처음으로) 드러내놓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제 와서야 ‘비로소’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으셔야 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까? 왜 지금까지는 당신이 가셔야 하는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라고 따라다니기는 하는데, 그분이 어떤 분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큰 이적과 능력을 행하셨는데도, 그 예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걸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의 여러 마을을 다니시던 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각각 자기들이 들은 정보대로 예수님께 대답합니다.‘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라기서에서 마지막 때에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엘리야일거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의 대답을 보다 분명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제야 제자들의 입에서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이 고백은 참으로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주님은 메시야이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고백을 들으시고는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의 그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기뻐하시면서 베드로를 칭찬하셨는지 아십니까? 지금까지 제자들에게서 그런 고백을 들어보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정확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게서 행하신 수없이 많은 이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수많은 말씀들을 들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바르게 깨닫지 못했습니다.오늘 본문 이전까지의 말씀에서 그것을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왜 그리 마음이 둔하냐?’고, ‘왜 이렇게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마가복음 8:21절에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고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가 아주 정확하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이제야비로소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부터 분명한 신앙고백을 들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이제야 내 제자들이 나를 바르게 이해하는구나!’라고 생각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메시야이신 당신이 앞으로 가셔야 할 길에 대해서 가르쳐주어도 되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처음으로 당신의 가슴에 담긴 이 구원 사역의 일,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면 가장 먼저 그분이 당하신 고난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그건 주님의 고난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주님의 고난의 자리에 서게 될 때에 시작됩니다. 아무리 오래 동안 교회를 다녀도 주님의 고난이 나와 상관이 愎 것으로 생각된다면, 우리는 아직도 신앙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 내 죄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이 곧 나를 위한 고난임을 처절하게 깨달을 때에 우리는 신앙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나이 많은 할머니가 평생 예수를 모르고 살아다가 늘그막에 며느리의 전도로 교회에 다 構 되었습니다.교회에 등록한지 1년이 지난 후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례를 받기 전에 세례문답 공부를 해야 하는데, 워낙 연세가 높으셔서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전도했던 며느리가 세례 문답을 받으러 가던 중에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어머님, 목사님께서 ‘예수님께서 누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느냐’고 물으시면 무조건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대답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할머니는 며느리가 시킨 대로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문답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할머니께 묻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슬쩍 저 멀리 앉아 있는 며느리의 눈치를 보더니 “예, 제 며느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데요.” 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혹 이런 분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이 나와는 상관없고, 다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혹 없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알겠는데, 그게 내 죄 때문이라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고난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고, 나를 위한 것이라고 뼈저리게 가슴에 저리도록 느껴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몇해 전에 화재가 난 현장에서 소방관 6명이 아까운 목숨을 던져 순직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지켜보면서 우리 모두가 가슴을 치며 괴로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방화범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정신적으로 약간 온전치 않은 사람인데 정신병원이나 기도원을 전전하면서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날도 새벽 2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다투다가 어머니를 때리고 홧김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급히 밖으로 뛰어 나와서 소방관을 붙들고 아들이 아직 못 나오고 있으니 살려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소방관 6,7명이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르르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불더미에 힘없이 쏟아져 내리는 벽돌더미 아래 그 고귀한 생명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방화범은 오히려 멀쩡하게 살아서 밖에 그 처찹한 광경을 고스란히 보았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죽어야 될 사람은 저 사람인데 너무나 아까운 사람들이, 처자가 딸린 6명이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저 방화범이 평생 살면서 자기가 6명의 소방관의 생명을 대신해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빚진 감정을 가지고 살까? 정말 사람이 좀 달라질까? 인간다운 존재로 바뀔 수 있을까? 자기를 위해 희생한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던져 사람답게 살아 보려고 애를 쓸까?' 하는 생각을 안 가지겠습니까?
 
오늘 이 아침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 사람은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이지만 6명의 생명을 희생하고 대신 살아남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 역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하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몸을 던지신 것이 아닙니까? 그 은혜 앞에 나는 살면서 내가 때로는 그 은혜를 저버리고 살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여러분, 이 십자가 앞에서 정말 떳떳하십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 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 앞에 서 나의 모습은 어떠냐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나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신 분입니다. 하늘 영광을 포기했죠.이땅에 오셔서도 제대로 된 방에서 태어나지도 못한 채 구유에 나셨고, 어릴 때부터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고 지내셔야 했습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공생애를 감당하실 때 한번은 제자들에게 이런 탄식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즉 죽도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습니까?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에게는 둘이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살집이 좀 작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찮습니다. 고생을 해도, 욕을 먹어도 견딜 수기 있습니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지금 결혼한 제 딸이 얼마나 예쁘게 사는지 모릅니다. 전에는 과연 시집을 가서도 철이 들까 했는데 얼마나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신앙생활도 같은 원리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행복이 마음속에 담겨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의 출발점에만 서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가르쳐주셨는데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고난의 길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본문 32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항변했다’는 말은 ‘책망하고 꾸짖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책망했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말입니다.‘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신 후에 이렇게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007년 7월 샘물교회 단기 선교단 23명이 아프간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중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었습니다. 인솔자인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성도님 두 사람이 순교를 했습니다.나머지 21명은 피랍된지 42일 만에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 배형규 목사님의 순교 신앙이 전해졌습니다. 탈레반에게 피랍되었을 때 인솔자 배형규 목사님은 한두 사람의 죽음을 예견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우리 중 한두 사람을 죽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선전효과를 위해 비디오를 찍으며 총상을 할 것입니다. 그때는 제가 먼저 앞장을 서겠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으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때 연장자인 유경식 전도사님이“목사님, 순서를 바꾸시지요. 저는 이제 살 만큼 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배형규 목사님은 “어디 전도사가 목사 자릴 넘봅니까? 저는 어차피 나이 들면 선교지에서 여생을 마칠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발가벗김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인간의 마지막 존엄성과 체면까지 다 내놓으신 주님이십니다. 그의 옷가지마저 남김없이 병사들에게 나뉘기까지 철저히 자신을 다 버리신 주님이십니다. 험악한 채찍질을 당하시고 만신창이가 되시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신 주님이십니다. 자신을 온전히 다 비우시고 철저히 부인하시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 그대로를 먼저 몸소 실천하신 주님이십니다. 이제 사준절 기간에 다시한번 나의 삶을 십자가 앞에 진지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지난 주 한 주간 부흥회 기간 동안에 저는 우리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두 가정의 장례식을 다녀왔습니다. 저는 그 장례식을 참석하여 골똘히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시간을 주지 않고 강단에 마지막으로 세우신다면 내가 무엇을 전하고 갈까?”정말 사람들의 죽음 앞에 내게 절박함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결국 젊다고 하는 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건강하다고 하는 것도 생명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지 아부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삶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려고 나온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도 강단에 설 때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전해야 하지 않겠나요? 뿐만 아니라 설교를 듣는 여러분 역시 하나님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는지도 모른다는 긴박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내일이라는 것은 아무도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황태자라고 일컫는 스펄젼 목사님은40대 초반부터 고치기 힘든 어떤 지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주일에 교인들에게 이러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이 수없이 이 강단에서 들었던 꼭 같은 메시지를 다시 전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에게는 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를 데리고 가실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저는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전하던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으셨다고 하는 것, 이것 하나 다시 전하고 저는 가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설교한 다음에도 15년이나 더 말씀을 전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만 정말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이 아닙니까?만약에 우리가 더 이상 예배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으면 죄 사함도 구원도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자존심이나 명예심이나 악감정이나 복수심 같은 것도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은혜의 십자가 사랑의 십자가 잎에 오래오래 머무십시오. 하나님의 기가막힌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하여 날마다 여기에 모이고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울기도 하며 탄식하기도 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는 주님의 참 제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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