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는 둥지를 틀 때, 높은 산의 불쑥 튀어 나온 바위 위나 높은 나무 위에다 짓습니다. 그런데 독수리가 집을 짓는 방법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아주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집 짓는 데 맨 처음으로 사용하는 재료는 가시나무, 날카로운 돌조각 등 매우 뾰족하고 아프게 찌르고 괴롭힐 수 있는 것들을 씁니다. 그 위에 짐승의 털이나 새의 깃과 같은 아주 부드러운 것들을 덮어서 포근한 둥지를 만듭니다.
그 둥지에 새끼들이 생기면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잘 자랍니다. 그런데 새끼가 둥지에서 어미가 가져다주는 먹이만 받아먹고, 날지 않으려고 둥지에만 있으면 어미는 그 둥지를 흔들기 시작합니다. 어미가 둥지를 흔들기 시작하면 가시나무, 뾰족한 돌, 찌르는 나뭇가지들이 보금자리 위로 튀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새끼들이 둥지 속에 더 있으려고 해도 찌르고 아픈 것들 때문에 있지 못하고 아파 절뚝거리면서도 둥지를 벗어나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편안하다, 여기가 좋다’고 안주하는 것만큼 신앙의 삶을 퇴보시키는 것도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편안한 둥지에 뽀족한 가시나무나 돌조각들을 사용하여 둥지를 떠나도록 하십니다. 혹 오늘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이 나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키고 하늘을 날게 하려는 하나님의 뽀족한 가시나무는 아닌지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에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나를 깊이 들여다 보아야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나의 나 됨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느새 환경과 여러 가지 주변 여건에 매여 그 감격과 그 사랑이 점점 식어졌습니다. 그런 나를 다시 한 번 추스르고 믿음의 회복을 일으키는 자리가 바로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땅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힘듦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내게 맡겨진 십자가 다시 말하면 사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구원과 기쁨과 평강을 주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주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말씀을 나눈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을 다니시던 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말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들은 대로 예수님께 대답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고요, 어떤 사람은 구약성경 말라기서에서 마지막 때에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엘리야 선지자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말하고요, 어떤 사람은 그저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메시야이신 당신이 가셔야 할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비로서 그동안 가슴 속에 있던 당신의 뜻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3절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메시야이신 주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 가운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을 합니다. 이는 마치 스승이 제자를 나무라는 것처럼 오히려 베드로가 붙들고 예수를 책망합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느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야는 그런 힘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약한 소리를 하지를 말라.’고 말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베드로의 마음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항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갈릴리를 떠나본 일이 없는 가난한 어부가 조상이 물려준 낡은 조각 배 한 척에 수십 군데 찢어진 그물 하나로 고기를 잡아서 생계유지를 하는 가난한 어부가 예수님을 따라 나선 후 그래도 그의 눈에 뭐가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된다는 소문도 무성하고, 자기에 대한 신뢰도도 매우 충분한 것 같이 보이고, 이대로 가면 보장된 출세 자리라 보였습니다. 그런 희망찬 베드로 앞에 예수님이 이제 나는 고난을 당하고 죽어버린다니 그러면 나도 죽으란 말인가?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한마디로,, 주님...십자가는 절대로 지지 마세요~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해 주신 권위로 유대인의 왕이 되겠다. 그리고 이 민족이 그토록 소원하고 있는 로마로부터 국권 회복을 내가 이룩할 것이며 이제 너희들은 나의 이 위대한 민족적 거사에 적극 동참해 주기 바란다. 내가 통치자의 자리에 앉을 때는 너희는 이 나라의 열두 장관이 될 것이다. 약속하겠다." 이런 말입니다. 그걸 기대하고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온갖 고생을 했는데 세상 권력을 거뭐진 장로들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에게 잡혀 고통을 당하고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여 죽어버린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슬픈 패배가 또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신 것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 고난 받으시는 길을 가지 말라고, 십자가의 길을 가지 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치욕스런 십자가를 지고 죽임 당하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한 것은 그런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요, 제자가 스승에게 마땅히 할 수 있는 충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시면서 ‘내 뒤로 물러가라!’고 소리를 치십니다. 정말 베드로가 한 그 말이 그렇게 책망 받을 만한 말입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지칭하면서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생각이 지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 -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기 위해서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입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 동안 거의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관찰한 결과 예수님께서 잘못하신 일은 없습니다. 고난을 받으셔야 할 이유도 없고, 더더군다나 죽임을 당하셔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늘 가난한 사람들 편이 되어주셨고, 병들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많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너무 좋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당당하게 예수님 앞을 가로막으면서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을 하십니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면서 얼마나 얼마나 호되게 책망하시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계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 사탄의 생각이라고 나무라신 것입니다.
사단이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 무엇인 줄 압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성도를 대적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도록 간교하게 방해합니다. 이것이 사단이 밤낮없이 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했고 유대인들을 선동했고 가룟 유다를 끌어들였고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참하게 핍박했습니다. 사단은 거짓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했고 흑암으로 빛을 가리웠으며 인간의 마음을 혼미케 만들어 논쟁과 싸움을 하도록 선동했습니다. 사단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고 인류를 자기와 함께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데 사단은 끝까지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 부렸습니다. 지금도 그에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끝까지 방해하는 것이 그의 계략이요, 그의 최대 목표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사단의 정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너무 순진하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사탄의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늘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진 않는 한 우리는 또다시 베드로와 같이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과 너무 다른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우리도 너무 자주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신앙과 다른 것을 선택하고, 신앙과 다른 길을 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것이 더 나은 것 같은데,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보다는 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주님을 위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너무 다른 생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욕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그런 세상적인 생각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갈5:2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처럼 적당하게 세상과 타협하면서 빨리 출세하고 싶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상에서 인기를 얻고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즐기고 싶은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영생과 함께 세상의 부귀영화도 함께 누리고 싶어 하는 그런 탐심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고전 9:27절에 보게 되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도바울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버림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버림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삶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쳐서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친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휘포피아조’인데 분석해 보면 ‘눈 아래를 세게 가격한다’는 뜻입니다. 권투 선수가 상대방의 급소인 눈 아래를 멍이 들도록 인정사정없이 가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종하게 한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둘라고게오’인데 ‘종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의지를 굴복시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다는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버림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뭐냐? 구원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한 우리를 결코 놓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여기 버림은 실격했다. 자격을 상실했다. 자격을 상실하게 될까봐 바울이 두려워했다. 지금은 나를 쓰시고 있습니다. 주님이 쓰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그런데 너 안되겠다.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뭐 그 사람을 다시 지옥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더 이상 주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지 못한다 이것은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결심을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 내 몸을 쳐서 내가 복종시킨다. 그 이유는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다시는 쓸모없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쓰임받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훈련한다. 절제한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 리 주님도 요한복음 15장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그 이유가 있는데 너희로 항상 과실을 맺는 삶을 내가 보고 싶어 한다.’ 과실을 맺는 삶, 열매를 맺는 삶, 다시 말하면 이것은 유용한 삶, 쓰임을 받는 삶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써 주실려고, 사용 하실려고 부르셨단 말입니다. 선택 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쓰임을 받으려고 한다면, 내 은사가 많든 적든, 달란트가 크든 적든, 내 모습 그대 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 여,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도 우리 가 유용하게 쓰임을 받는 인생을 살려면 무엇보다 절제가 필요하다라는 사실입니다. 거꾸로 우리가 사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쓰임 받는 삶을 열망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 끝까지 쓰임 받고 싶어요. 이 모습 그대로 쓰임 받고 싶어요. 유명해지진 않아도 좋아요. 그러나 쓰임 받는 인생 살고 싶습니다. 이 쓰임 받는 삶을 열망하는 사람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월요일 우리는 97번째로 맞는 3.1절을 맞이했습니다.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에 을사 늑약을 체결을 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 민족에게 일본은 희망의 싹을 짤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이 그냥 주저앉은 것이 아닙니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패배를 숙명처럼 여기던 이 백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던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 누군들 일본의 그 잔인한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삼천리 방방곡곡에 가슴에 숨겨놓았던 태극기를 꺼내서 만세를 불렀던 그 힘과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일어난 것입니까? 그 당시 3.1 운동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십자가의 은혜 앞에 섰던 사람들입니다. 이때 훗날 3.1운동을 주도하다시피한 남강 이승훈 선생은 처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9월 어느 날 평양 거리를 헤매다가 산정현교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한석진 목사가 “십자가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에 이승훈 선생은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자기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예수를 영접한 것입니다. 더 이상 그는 자기의 것에 메이지 않고 삽니다. 앞으로의 다음 세대를 양육하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오산 중학교를 세웠고, 교회도 세우고 무엇보다 그는 신앙인으로서 이 민족의 자유를 위해 3.1운동을 주도해 나갑니다.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분이셨던 남강 이승훈 장로님에게 사람들이 찾아와 33인 대표 중에 한 사람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사실 부탁은 나라를 위하여 죽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승훈이가 이부자리에 누어 죽을 줄 알았더니 이제야 죽을 자리를 찾았다시며 그렇게 기뻐하셨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한 하나님이 주신 힘이 아닙니까? 자신은 죽을 줄 알았지만, 이부자리에 누어 죽을 줄 알았더니 이제야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호탕하게 기뻐하는 그 힘!!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 살아가는 힘입니다. 오히려 그 힘은 절망 속에 있는 이 민족에게 희망의 등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는 참 된 신앙은 자기의 뜻과 주장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의 뜻 앞에 순종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골 1:2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행 20:24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십자가를 지는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수를 영접하고 처음 책 한권을 선물을 받은 것이 있는데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인데 여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밑으로 파고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이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