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 동안 십자가와 나라는 말씀 앞에 가까이 다가와 주님의 고난에 동참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주님이 고난당하신 골고다 언덕은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십자가의 그 큰 사랑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히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조롱하고 모욕을 서슴치 않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 선 나는 십자가 앞에서 과연 하나님의 은혜 앞에 믿음으로 여기까지 살아왔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십자가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유월절 엿새 전의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엿새 전에 일이었습니다. 지금 베다니에 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입니다. 이 잔치는 결코 흥겨운 잔치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현상수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요11:5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또 11:53절에 보면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내부적으로는 예수님을 죽일 작전을 다 짜놓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마다 예수님을 현상 수배한다는 전단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지도자들에게 밉보이면 엄청난 피해와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잔치가 열리고 있는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바로 코앞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잔치를 베품으로 어떤 불이익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합니다. 이는 받은 사랑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삼남매가 서로 의지하고 살던 이 가정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습니다. 기둥처럼 여겼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결국 그 질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힘든 상황에서 서로 의지하고 살았는데,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었으니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런데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되던 날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의 슬픔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시던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이나 지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 다시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러자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잔치는 단순히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잔치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잔치라는 말은 헬라어로 ‘데이프논’(δειπνον)이란 단어인데, 이 단어는 ‘만찬’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잡수셨는데, 그 만찬이 바로 데이프논이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가 예수님을 위하여 베푼 잔치는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과 같이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잔치였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느끼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위해 베풀 마지막 잔치임을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성껏 준비된 음식으로 만찬을 나누고 있던 자리에 마리아가 나드 향유가 가득 담긴 옥합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옥합을 깨뜨리더니 그 향유를 모두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너무 순식 ?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릴 때까지 아무도 마리아가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온 것을 본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 향유를 다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향유의 값은 최소한 300데나리온 이상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라고 하면 노동자의 일 년치 품삯에 해당되는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가격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겐 가장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귀한 것을 주님께 부어드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였음을 의미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그렇게 허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엄청나게 비싼 향유를 쏟아 부은 것도 큰 낭비인데 더 놀라운 사실은 마리아가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잘 가꾸어온 머리털은 한 사람의 존엄성을 보여줍니다. 특히 여성이 곱게 길러 반짝 반짝 윤기가 나고 치렁치렁 긴 머리카락은 그 여성에게 큰 매력이요 자부심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자신의 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는 사실은 극도의 존경과 헌신의 표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가장 귀한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어드리던 그 순간은 곧, 문둥이처럼 썩어가는 영혼의 삶을 살던 마리아가 진리요, 참 생명이신 주님께 접붙여지는 순간이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진리의 향기, 참 생명의 향기는 소멸되는 법이 없기에 2000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 그윽한 향기를 접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성이지만 가장 본받을만한 모범 제자로 등장한 마리아와 달리 정반대로 본받아서 안 될 제자 한 사람이 나옵니다. 가룟 유다이지요. 4-6절 말씀을 봅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여기 마리아가 엄청난 향유를 낭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가룟 유다가 역정을 냅니다. 다른 11명의 제자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유독 유다가 화를 냅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왜 낭비하느냐는 책망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현장에 있었더라면 가룟 유다와 같이 계산적인 현실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유다의 눈에는 돈만 들어왔습니다! 마리아의 낭비가 거룩한 낭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으면 자신의 전 재산인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지 그 뜨거운 사랑을 몰랐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지만 가룟 유다는 말로만 “가난한 사람” 운운했지 실제로는 이웃을 돕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6절은 분명히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남의 돈에 욕심을 품는 도둑일 뿐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자기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말만 잘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왜 그 엄청난 돈을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데 쓰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느냐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도움을 준 일이 별로 없다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가룟 유다와 같은 위선적인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자, 사람을 정말 사랑해 본적이 없는 자는 사랑이란 곧 낭비임을 알지 못합니다. 낭비없이는 자기 자식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음을 인식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사람으로부터 자기를 격리시킨 채 욕망만을 움켜쥐고 살다가, 끝내 그 자신이 썩어가는 악취를 풍길 뿐입니다. 이 유다에게서 진동하는 악취는 그만큼 더 역겹습니다. 역겨운 악취를 풍기는 가롯유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를 가만 두어라. 그녀는 지금 나의 장례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 것이 더 낫다’고 말한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평소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보고서도 나 몰라라 하신 분이었다면 이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그 비싼 향유를 허비하는데도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칭찬하신 이유는 마리아의 이런 행동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가 언제 드러납니까?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할 뿐입니다. 겉모습은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우므로 비로소 진위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생화와 조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 꽃의 잎은 떨어지지만 인조 꽃잎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짜 꽃은 벌이나 나비에게 기꺼이 자신의 꿀을 빼앗겨 주고 나누어주지만, 모조 꽃은 떨어지거나 빼앗길 것을 아예 소유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요즈음 조화를 얼마나 잘 만듭니까? 구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떨어짐과 빼앗김의 유무에 따라 생화와 조화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몰라요!! 다 각오도 다짐도 하지만, 정말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자인지는 평소에는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헌신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 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충성된 헌신된 신앙인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마리아가 향유 병을 깨서 예수님의 발에 부으니 “방에 향기가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향유 병을 송두리째 깨서 부었으니 방에 그 향기가 얼마나 진동했겠습니까. 그날 온방에 향기뿐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도 향기가 만발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향기 나는 삶입니다. 향기는 나를 깰 때 나타납니다. 나를 부술 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향기는 버려야 풍깁니다. 뿌려야 나타납니다. 쏟아야 나타나고 깨야 나타납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도 병속에 그냥 놔두면 향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출이 없고 희생이 없고 헌신이 없으면 향기도 없습니다. 이 여인이 향유 병을 깨부숴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으니 그 방에 향기가 얼마나 강하게 나타났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 지식이 사용되지 않고 내 속에 그대로 감추어 있으면 아무 향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게 아무리 좋은 재능이 있어도 나만을 위해서 사용되고 내안에만 감추어 있으면 그 좋은 재능도 아무런 향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향유 병을 깨부수어서 쏟아 부을 때 온방에 향기가 퍼졌습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송두리째 깨부숴서 드리는 삶입니다. 그것이 헌신이고 순종이고 드리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도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은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고1 때부터이고, 구원을 얻고 목사가 된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 안에 죄성이 작동되고 있는 사실을 보면서 저는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냥 신앙 생활한 것이 아니고 열심히 했습니다. 신학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 나름대로 좋은 목사가 되려고 애를 썼습니다. 수많은 성경공부를 하고, 수많은 집회를 하고, 수없이 말씀준비를 하고, 좋은 책들을 읽고, 노력을 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잔재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것을 볼 때, 기가 막힙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욕심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하게 정리된 삶을 살아간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굉장히 끈질긴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내가 죄인이고, 그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1년만 다녀도 주일에 다 참여하면 52번입니다. 10년을 다니면 520번,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참회를 하고, 기도를 하면서 20년을 다니면 1,000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악한 생각이 있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은혜가 떨어지면 예수 안 믿는 사람과 흡사한, 아니 능가하는 옛날 가락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내가 예수 믿는 사람 맞나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한 두 번 한 것이 아닌데, 은혜를 한두 번 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그들은 출애굽의 여정 속에, 광야를 지나는 동안을 거의 2백만 명이, 매일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것들이 내리는 하늘을 생각해보십시오. 장관일 것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으며 살았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마셨습니다. 그러니까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시간만 나면, 사흘만 물이 없으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며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안 믿어질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이 목이 곧고 패역한 백성들아”라고 하셨습니다. 강력한 표현입니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는 다른 사람인가 하면, 아닙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닮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조건을 찾으셨다면,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사랑할 때도 조금이라도 사랑할 구석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주면 사랑을 받아들일 줄도 알고, 사랑을 이해해야 안 되는 노력이라도 할 것인데, 사랑이라는 반응과 감정과 이해가 전혀 없는, 아니 수준과 자격은 고사하고 반역을 일삼고 욕을 해대는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사랑입니다. 롬5장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에 이 십자가의 사랑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던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마리아를 보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직전에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억지로 누가 하라고 해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자발적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여인입니다. 그 값비싼 향유옥합을 깨뜨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제자들은 조건으로 바라보니, 그것은 미친 짓이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나 삶 속에서 헌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의 헌신은 어색하지가 않습니다. 사랑스럽고 멋집니다. 그런데 헌신을 해도 어색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 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헌신이 아니면 힘들고 지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우리 힘이나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면 끝까지 가기가 힘듭니다. 핵심은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는 것,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모든 것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미 구원을 주셨지만 완성되는 그날까지는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유혹, 사단의 공격으로 넘어지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핍박과 시련이 올 수도 있습니다. 시련이 계속 닥치면 구원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행로에 어떤 일들이 밀어닥칠지, 심각한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압박해올 때, 우리의 실낱같은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의심과 낙심, 시련과 핍박과 절망이 있다 해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왜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죄인이라고 하는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 잘 깨닫지 못하는 분이 행여나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십자가의 길을 한 번 따라가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죄 없는 분이 양발, 양손에 못이 박혀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그 갈보리 언덕으로 한 번 올라가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사랑의 갈증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까? 얼마든지 우리는 사랑의 갈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는 사랑으로는 우리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저 갈보리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거기에 가면 큰 사랑이 있습니다. 큰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 사랑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읍시다. 그 사랑의 강물에 우리를 던집시다. 그 사랑 안에 영원한 기쁨과 만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 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