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극복이요, 바로 생명의 승리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본문을 보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 기쁜날에 제자들의 모습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9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 湧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기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깊은 절망 가운데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가 허무하게 십자가에 죽음을 당합니다. 자기들이 생명 걸고 따라다니던 그 스승이 흉악범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 처형을 당했다면 그를 따라다니던 사람들 역시 스승과 동조한 혐의로 큰 형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했고, 자기들도 스승님처럼 붙잡혀 처형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모여 있는 곳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들을 모두 닫아놓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문들을 닫아놓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문을 닫았다’고 표현하지 않고 ‘문들을 닫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를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존 맥스웰 목사님은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기력을 낳고, 모든 일을 미루어서 행동하지 않게 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며, 변명으로 그의 삶을 살게 하며, 에너지를 잘못 사용하여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데 에너지를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 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에겐 희망의 끈이 있었습니다. 자연을 평정하고 영적인 세계를 다스리며 영원한 세계를 통치하는 예수를 바라보고 살았는데 그 주님의 죽음은 그들에게 있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두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 < /span>제자들 가운데 누가 문을 열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다시 사신 부활의 모습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니 얼마나 제자들 놀랬겠습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들은 마음이 얼어붙고 눈이 얼어붙고 영혼이 얼어붙어 있었으니 주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주님처럼 생겼으니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같은 본문을 慕怜 있는 눅 24:37절에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그랬습니다.젊잖게 표현해서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했지,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면 "귀신 아닌가? 질겁했다" 그 얘기입니다.
이때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 안심시키기 위하여 못박힌 손을 내밀어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이신 것을 확인하고 한편 기쁘기도 했지만 더욱 놀라웠습니다. 체면도 면목도 없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체포되던 그 시간에 제자들은 겁이나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십자가에 신음 하며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 한번 마음껏 목놓아 울지도 못했습니다. 가냘픈 여인들과 이름없는 제자들, 아리마대 사람들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례를 치루는 그 현장에 제자들은 얼굴도 나타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숨어 지내는 처량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배신자들을 책망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도 꾸중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끝없는 용서를 안고 찾아오셨습니다. 두려 움 떨고 있는 제자들, 불안에 신음하는 제자들, 공포에 시달리는 제자들, 이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 지금 부활하신 주님은 이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1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것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한 후 주님과 갖는 첫 대면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배신한 제자들에게 하고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배신자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에도, 집안에 있을 때에도, 집밖 삶의 현장에 있을 때에도,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절망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맹목적으로 반복되는 삶의 무의미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 않습니까?
여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평강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평강은 세상 사람들처럼 내 삶에 걱정이나 근심거리가 없을 때 누린다고 말하는 그런 평강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안은 내 어깨에 지워진 짐이 너무 무거워 버거운 인생을 산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살게 만들어주는 평안입니다.
시편 3편을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를 피하여 황급히 도망가며 지은 시입니다. 아들의 칼날을 피해 맨발로 도망하는 아비의 심정이 얼마나 처참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의 시는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대적하는 자가 어찌 이다지도 많습니까? 도처에 일어나 나를 치려는 사람들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영혼을 가리켜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하고 있사오니, 하나님이여 이것이 과연 사실입니까?" 참으로 비탄의 절규입니다. 벼랑 끝에 선 인생이요 절망의 심연에 빠진 몰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시는 놀랍게도 갑자기 이렇게 반전됩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ご 두려워 아니 하리이다"
맨발로 정신없이 도망가면서 이제 방금 전까지 ‘나의 대적이 어찌 이다지도 많으냐'고 울부짖던 다윗에게 어찌 이와 같은 대 반전이 일어 날수 있었습니까?그 해답은 한가지―지금 비록 패장이 되어 도망가지만, 그러나 이 순간에도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증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은 시편 3편 3절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깨어 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견고하게 붙들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경이로운 깨달음입니까? 자신은 그저 곤하게 곯아 떨어져 잤을 뿐인데 아침에 일어나 새날을 맞이하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고 저주하셨다면 어제 밤잠자리에서 이미 호흡이 끊어져 버렸어야 했을 터인데, 잠자는 동안 자신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아니하였음에도 오늘 심장과 오장육부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의 더 큰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다윗은 도망갈망정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평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제 자신이 미래가 절망입니다. 내일 죽을는지, 그는 사실 아무런 보장을 받지 못한 채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만 기다립니다. 그런데 빌 4:6-7절에 보게 되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무리 철문이 겹겹으로 잠겨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암흑천지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기를 찾아와 자기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의 평강을 빼앗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예수님이 주신 평안은 내 어깨에 지워진 짐이 너무 무거워 버거운 인생을 산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살게 만들어주는 평안입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데 어떤 상황에선들 어찌 평강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앞에,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우리의 평강을 앗아갈 상황이 어찌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 嗤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어찌 그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건 평강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이 평강을 이야기 하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세상 앞에 온갖 수치를 드러내고 죽었지 않습니까? 그 십자가를 그들이 보았습니다. 이젠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들이 가진 꿈들이 산산 조각으로 깨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계곡에 서 본 일이 있습니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에 서 본 일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한밤중에 당신의 허파 속으로 공기를 불어넣으며 펌프질을 하는 기계 소리를 누워서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나중에는 그 눈빛에 있던 생기의 빛마저 서서히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경험이 있다면 이 죽음 의 계곡은 당신에게 낯선 곳이 아닐 것입니다.
그곳은 황량한 계곡입니다. 그 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계곡 밑을 내려다보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 계곡 끝에 서게 되면 모든 삶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못한 것이 금방 구별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내가 무슨 차를 타고 왔느냐< /sp an>, 내가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 관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했고, 내가 사회적으로 얼마만큼 지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안중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인생의 성패, 승자와 패자, 성공자와 실패자라고 하는 어떤 구별도 그 자리에서는 하등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만큼 죽음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새파랗게 질리게 만들고 완전히 기를 꺾어 버립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더 실려고 애를 쓰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인간을 냉동 보관한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영하 196도의 액체질소가 든 금속탱크 안에 사람을 보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죽은 사람을 소생시킬 의술이 실현될 때까지 시신을 냉동보관하고 있다가 그 사람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피를 다 빼고 부동액과 같은 특수 액체를 피 대신 채웁니다. 그렇게 해서 영하 196도로 보관한 후, 약속된 시간이 되면 해동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이런 인체 냉동 보존술(Cryonics)에 따라 냉동 보관된 사람이 지금까지 200명이 넘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2천 명 이상이 대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매년 400불(약 45만원)의 회비를 내야하고, 죽은 후에 냉동보관하기 위해서 시술비로 약 15만불(약 1억 6천만 원)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과학을 빌린다해도 어느 누가 영원히 살 수가 있습니까? 성경은 사람은 한번 났다가 반드시 죽습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이 문이라는 문은 다 걸어 잠그고 숨어있는 그 자리에 얼마 전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보았던 그들의 눈에 그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로 다가 오셔서 평안하뇨 할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2.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결코 놓칠 수 없는 사명을 말씀을 하십니다.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을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밖은 세상은 그들에겐 감당치 못할 엄청난 현장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실패자들을 ‘보낸다’는 이 말은 너무 비현실적입니다.왜냐하면 그 정도의 어마어마한 일을 하도록 명령받은 사람이라면 무언가 갖추어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명령을 들은 11명의 사도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그 당시에 무시당하던 갈릴리 지방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온 세상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무슨 현실성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무슨 현실성이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명함도 못 내밀 사람들인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루살렘 골목 모퉁이에서 갈릴리 사투리로 "예수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하면 어느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한 사람도 전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비현실적입니까?
여러분, 전도지를 가지고 젊은이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한번 나가보십시오. 어제 우리 교역자분들이 전도지를 들고 교회 앞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에 서서 "예수 믿으세요." 하고 한번 전해보십시오. 그러면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약한지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남자들은 대부분 마음이 좀 너그러운 편이어서 전도지도 받고, 머리도 끄덕끄덕 합니다. 그런데 팔짱 끼고 가는 여자들은 참 표독해요. 탁 뿌리치고는 안 받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그들을 예수 믿게 할 수 있습니까?' 고민하게 됩니다. < span style="font-size: 12pt; mso-fareast-font-family: 바탕;">그리고는 '아, 이것은 절벽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하잘 젓 없는 존재들을 불러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현실성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의 명령이 현실성이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도 악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점령지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미 악한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마귀와 사탄과 악령을 일컬어 '세상의 신'이라고 요한복음에서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지 30-40년이 지난 후에도, 사도 바울은 고후4:4절에서 사탄을 일컬어 '이 세상 신', '이 세상 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승리하셨지만 아직 사탄은 병도 안 걸렸습니다. 드러누워서 앓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전히 원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무서운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우주는 아직 전쟁 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탄의 세력이 비등해서 서로 파워 게임을 하는 전쟁은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내란입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들어와서 내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초강대국인 미국에 몇 명의 테러범들이 들어와 미국 전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혼란을 일으킨 것처럼, 오늘날 사탄은 여전히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큰 우주 속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내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세력을 확보하고 자기가 지배하는 백성들을 여전히 늘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에게 지배당하고, 점령당한 지역들이 우리 주변이나 세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큰 세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이 세상 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흐트려놓아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듣지 못하게 하 , 설령 들었다 해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깨달았다 해도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꽉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을 보아도 신통치 못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현장을 보아도 악하고 무서운데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까?
3. 본문 22-23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성령이 key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을 이길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22절속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여기 숨을 내쉬며- 이 말씀은 에스겔 골짜기를 연상케 해 줍니다. 말라빠진 뼈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생기야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 이 사망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 살게 하라.’ 부활하신 주님 호흡이 불어 닥치면 죽음의 자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에게 우리 영혼에 숨을 들여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코를 그분의 가슴에 들이박고 그분이 숨을 내쉬며 성령의 호흡을 우리에게 불어주실 때 성령을 들여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우리는 강해집니다. 얼마만큼 강해집니까? 예수님만큼 강해집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어두워도 우리 앞에 대적하지 못하는, 적수가 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성령이 key입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들고 세상을 향해 나간 행적이 사도행전이 아닙니까?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의 기간을 보통 약 30년으로 잡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제일 처음 등장한 교회의 교인 수는 몇 명입니까? 120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약 30년이 지난 후, 사도행전의 기간동안 예수 믿고 돌아온 모든 성도들의 숫자를 학자들은 10만 명으로 어림잡습니다. 30년 사이에 120명의 갈릴리 촌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사마리아를 넘어 헬라권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 누구의 역사입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입증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그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입증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이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이 마신 우물물을 똑같이 마셔야 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의 원천인 성령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령은 이미 교회에 임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성령은 우리 모두에게 임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향해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의 이 아침! 부활의 능력을 입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타성으로 젖은 잘못된 신앙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며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 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증인 자로 우리 여기 제자들처럼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그,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거룩한 삶이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