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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이젠 자다가 깰 때입니다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09-09-20 | 조회: 2903
이젠 자다가 깰 때입니다. 행 20:7-12. 2009. 9/20
지난 금요일에 노회에서 여전도회 연합 헌신예배를 드리고 구리 쪽으로 오다가 코스모스가 얼마나 싱그럽게 피어있는지 잠시 사색에 잠겼습니다. 벌써 가을입니다. 가을바람이 벌써 차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해를 마무리 짓는 시점 앞에 서 있습니다. 저는 가을이 오면은 늘 제 마음속에 되뇌어지는 시인 김현승 선생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결실의 계절입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그런데 이 비옥한 시간을 가꿀 수 있는, 내가 거두어 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건 왜 그럴까요? 무엇이 내 인생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을까요? 여러분 가운데 한때는 오뉴월의 신록처럼 활력 넘치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까? 왜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히 식어지고 말았습니까? 왜 시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과 생각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속된 것에 기울어질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드로아 지방에 머물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설교 시간에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을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다른 것도 아닌 요즘으로 말하면 예배 시간에 졸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참, 심각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은혜 받으러 왔다가 이게 무슨 낭패입니까? 오늘 왜 이 사건이 여기에 등장합니까? 지금 죽은 자는 청년입니다.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그리고 꿈이 가득 담긴 시기있입니다. 그것도 믿음으로 살려고 이처럼 예배자로 주님 앞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졸다가 죽은 것입니다. 이 유두고는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중한 일을 하고 이렇게 시간을 내어 왔는데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예배 시간이 졸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도 이 잠에 대해서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127:2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구절을 보면 잠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인생에서 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계산적으로도 인생의 4분지 1내지 3분지 1이 잠입니다. 또한 잠과 건강과 상관관계가 분명합니다. 장수하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잠을 잘 자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심신이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잠을 잘 자지 못합니다. 정신적으로 걱정과 스트레스가 많아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잠을 못 자는 불면증은 아주 큰 병입니다. 미국에서는 수면제가 연간 7백억 정이나 판매된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거의 2천만 정이 소비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에 시달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정말 잠을 잘 자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잠은 피곤한 육신을 쉬게 하고 재충전하여 다음 날 아침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나 미루었던 일을 힘차게 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위에 길을 잃은 조난객이나 침상에서 호흡을 몰아쉬고 있는 중환자에게 잠은 곧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기 때문에 뺨을 때리며, 눈을 뜨라고 소리를 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예외가 아닙니다. 시13:4절에도 다윗은 자신이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려워 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경우에도 잠을 자면 곤란합니다. 영혼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잠은 위험한 것이요 저주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 기도는 생사를 건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따라온 제자들 보십시오. 모두가 졸았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다 말고 그들을 흔들어 깨우십니다. 그러나 잠에 취해 소용이 없습니다. 눅22:46절에 보면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그날 제자들은 세상 앞에 가장 부끄러운 수치를 당하십니다. 자신의 스승의 고난의 길을 다 외면하고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영적인 잠은 위험한 것이요 저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왜 유두고가 졸았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어요.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사역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그 어떤 때 보다도 가슴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이 바울의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설교 중에서 가장 긴 것이었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는데 7, 9, 11절 말씀을 읽어보면 최소한 6시간에서 10시간 정도의 설교였습니다. - 7절 : ‘바울이…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 9절 :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 11절 : ‘떡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도 바울이 설교한 때(時)를 보면 바울이 드로아에 머문 지 7일째 되는 날이었으며 그곳을 떠나기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바울은 이튿날(다음 날)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한 말씀이라도 더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제 떠나야 하는 시간은 가까워 왔고,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니 더 전하고 싶은 목회자의 마음의 그 심각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은혜 받으러 왔는데, 말씀에 심취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뭔가 지금 딴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깊이 들어야 하는데 그래서 바로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예배 시간에 서론부터 결론까지 제대로 다 들어야 합니다. 빼놓을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졸다가 ‘결론만 들으면 되지’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똑똑한 척하고 서론만 듣고 ‘알았어, 다 알았어’ 합니다. 다 아는 척해요. 또, 안 들어요. 그리고 예화만 듣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졸다가 예화만 하면 눈을 뜨는 참 희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피곤은 문제입니다. 졸음이라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유두고도 노예로서 하루종일 일했으니 무척 피곤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성경을 보십시오. “깊이 졸더니(9절)” 그리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9절)”라고 합니다.여기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라는 이 뜻은 처음부터 졸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졸음을 이기려고 무척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꼬집어도 보고, 때려도 보고, 머리를 흔들어도 보고, 별짓을 다 해본 것 같아요.

어느 목사님이 강단에서 메시지를 전하는데 저 뒤켠에서 청년하나가 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 할머니는 오히려 눈을 또록 또록 뜨고 열심히 메모를 해가며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니 목사님이 화가 난 것입니다. 그 청년을 깨워야 할 텐데 영 못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청년을 야단을 쳐야할 터인데 그만 할머니에게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 아, 할머니, 그 옆에 청년 좀 깨워요.” 냅다 고함을 지르는 목사를 향해 할머니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재우긴 지가 재워놓고 날더러 깨워 달라고 하는 거야!!”

이 졸음!! 정말 힘들지 않습니까? 피곤하기 때문에, 특히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도, 어떤 전달자가 증거하는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할 때 이 졸음이 엄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이지, 이 유두고에게 예배자로서의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유두고 청년이 예배에 임하는 태도가 매우 위험한 것임이 나타납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장소는 3층이라고 했습니다. 3층 꼭대기에 유두고가 앉아있는 자리는 창문에 걸터앉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3층 창문에 걸터앉은 자세는 이유가 어찌되었든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유리창 닦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도 안전장치를 하고 일하는데 예배드리는 사람이 그런 태도로 예배를 드리다니 이것은 위험의 노출입니다. 예배는 절대 안전감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 중에 한 사람만 이상하게 굴어도 이 예배는 다 망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으로 위험한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함이 이 말씀의 암시적 교훈입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을 듣는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창가에 걸터앉은 그 자체가 겸손해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 걸터앉아 무슨 은혜를 받겠습니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같은 말씀을 들어도 자리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창문에 위험스럽게 걸터앉은 자세로 말씀의 은혜를 받겠습니까? 성경에 보세요.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나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의 백부장이라고 했습니다. 현역 군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청해 온 집안 식구들, 아는 사람들을 다 오라고 해서 베드로 앞에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말씀을 듣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 앞에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자연인 베드로이지만 당신이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말씀인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있나이다.” 그리고 설교를 듣더니 그 시간으로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례 받았다고 그랬잖아요?

여러분, 해당되시는 분은 좀 죄송한 말인데 우리나라에 ‘치맛바람’이란 말이 있잖아요? 엄마들이 돈 써가면서 왜 자기 아이들을 교실 앞자리에 앉히려고 하는가 말입니다. 앞자리와 뒷자리의 학습 효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앞자리에 앉히려고 애쓰는 겁니다. 창문에 걸터앉으면 자연히 바깥세상이 시야에 들어오게 마련이고 그러면 마음도 집중력도 떨어지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세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가장 훌륭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방법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배의 모범을 그렇게 중요시합니다. 예배에 충실하지 않으면 교회는 오나마나 입니다. 록펠러의 전기를 보면 그는 어머니의 유지를 따라 예배 생활도 최선을 다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맨 앞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벌써 자세가 다른 것입니다.

왜 중세기에 교회들이 그렇게 내리막길을 걸었는가? 왜 교회들이 몰락했는가? 예배의 모범이 잘못되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 설교하는 시간을 거의 없애고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몇 마디하고 의식 중심의 예배 모범을 가졌다가 교인이 다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 아닙니까? 걸터앉은 자세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역시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나의 예배생활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신앙생활이 하나의 문화생활을 즐기는 액세서리 정도로 걸터 앉아있으면 신앙생활의 향상이고 신앙생활 하나마나입니다. 록펠러의 전기를 보면 그는 어머니의 유지를 따라 예배 생활도 최선을 다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맨 앞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벌써 자세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천재 바둑기사 중에 이창호라고 있습니다. 한중일이 바둑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 역사에는 이창호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일간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창호 9단의 이런 괴력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알기 위해 그의 어린 시절부터 현지를 찾아가서 취재한 글이 있었습니다. 전주에 있는 집을 찾아가니 바로 그 집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60년 동안 시계방을 경영하는 집이었습니다. 이창호 어린이는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수없이 많은 시계의 초침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이창호 국수의 강점은 끝내기에 있습니다. 다 진 바둑을 끝내기에서 역전 시킵니다. 일단 초읽기에 들어가면 모든 기사는 초조해 집니다. 그러나 이창호 국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듣던 소리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집중을 할 수 있는 훈련이 몸에 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어떤 면에서 내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외(존경)를 받아 마땅한 유일한 가치를 지니신 분이심을 깨달은 사람들의 사랑의 고백을 위한 엎드림-그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 졸수가 있나요? 어떻게 산만해 질수가 있나요? 얼마 전에 부산대 길원평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하고 다시 한번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유물론 사상에 젖어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유학을 가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교수가 되어서 부산대학으로 돌아왔는데 지금도 자기가 예수님 때문에 죽지 않고 영생을 할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에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배자로 부름 받은 그것이 세상에 제일 큰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기쁨하고도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쾌락과 기쁨은 겨드랑이를 간지럽혀 나오는 웃음이라고 한다면, 예배자로 하나님을 섬기며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이 주는 기쁨이야말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스며 나오는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가끔 새벽에 일찍 잠이 깰 때가 있다고 합니다. 침대에 누워서 '나는 이제 영원히 사시는 주님, 그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그 나라에서 보낼 존재로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몰라서 자기 몸을 꼬집어본다고 합니다. 얼마나 흥분되는지, 얼마나 황홀한지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바울처럼 피를 토하듯 내 안에 역사하시는 그 사랑을 담고 살아가는 열정이 있나요?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하는 결단과 헌신의 삶이 있나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매력을 던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나를 접촉하는 사람들 마다 삶이란 살 만한 맛이 있는 것이라고 고백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배의 성공자가 되지 않으면 분명 삶의 열매가 없습니다.

예배에 인생을 걸어야합니다.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말씀 앞에 내 삶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그 구속의 사랑으로, 그 보혈의 강에 내 몸을 , 내 영혼을 던져야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여기 보십시오. 9절 하반절에 보면 3층에서 떨어진 그를 일으켜 보니 죽었습니다. 즉사한 것입니다. 의사인 누가가 들여다보고 죽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이 죽은 자를 사망에 권세에 맡기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를 다시 생명을 살립니다. 오늘도 동일하신 주님은 내 병든 영혼, 시험에서 허덕이는 내 삶을 예배 가운데 다가오셔서 나를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배자로 우리가 왔지만, 여기에도 조는 교인, 조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는 신앙도 있어요. 이것은 언젠가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 함에 있어서 좀더 간절하게 주님 말씀대로 깨어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이 생명을 어떻게 쓰시려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태신자를 작정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많은 고민을 안고 여기까지 온 분들이 대다수 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일에 매여 살다가 잊고 온 사람들, 영혼 구원에 대한 진지함이 없이 예배에 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무엇입니까? 제가 지금 숨을 쉽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죽음은 숨을 쉬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중국에 스챤성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곳에 있던 선교사님의 이야기는 정말 인생이 얼마나 나약하고 허무한 가를 보여 줍니다. 몇 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아비규한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보셨지만, 지진이 있고 나서 필사의 구출 작전을 합니다. 그런데 그 현장을 보도하는 TV를 통해서 느낀 것이 있지 않습니까?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구조대원들이 사람을 구해냅니다. 건져낸 사람 코끝에 호흡이 붙어 있으면, 구조대원들이 하얀 모포를 씌운 채 안고 나와 앰뷸런스에 태웁니다. 그러나 호흡이 사라졌으면, 어김없이 시커먼 대형 쓰레기 비닐을 씌어서 나왔습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호흡이 끊어지면, 대형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을 하나님 앞에서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며, 또 영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그 분이 나와 함께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보세요. 지금 주님은 죽은 자를 살려서라도 당신의 예배의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계7:17의 말씀을 보면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여기 방금 전까지 보좌에서 예배를 받으시던 어린양이 이제 목자가 되사 거친 세상길을 걷는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 눈물을 씻어 주시고 우리를 생명수 샘물로 인도하시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예배가 끝난 후 우리 손을 잡고 그는 이제 문제와 갈등이 있는 우리 가정, 직장, 우리 사업의 장, 그리고 우리 고단한 세상 광야를 함께 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축복이요 예배의 영광인 것입니다. 주님은 졸다가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려서 당신의 영광을 온 땅에 드러내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다시 일어납시다. 예배의 성공 그것은 인생의 성공입니다.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또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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