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일에 생명을 바친 삶 행20:17-2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09-09-28 |
조회: 2198
주의 일에 생명을 바친 삶 행20:17-24. 2009. 9. 27
요즘 대형 영화들이 극장가를 장악하고 있는데 그것도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 5개월 만에 10만이 넘는 가슴 뭉클한 영화가 있습니다. “소명”이라는 영화인데 영화의 주인공 강명관 선교사는 본래 외국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으로 남부럽지 않은 평범한 행복의 일상을 살아가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늘의 소명이 임하면서 그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는 소명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아마존 정글로 떠납니다. 정글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부족 100여명이 사는 바나와 부족이 그와 그의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지역은 농사가 어려워 최악의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들의 최대의 소원은 멧돼지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들을 섬기며 음식을 먹이고 교육을 하고 문자를 만들어 주고 성경을 번역하고 섬기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속에서 실천합니다.
그는 때로는 교사가 되고 때로는 의사가 되고 때로는 영양사가 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때로는 독충과 독사에 물리면서 자신을 챙기기보다 죽어가는 원주민들을 보살피며, 심지어 자녀들조차 좋은 쌍 파울로 선교사 학교에 보내지 않고 1000km나 떨어진 쁘라켓꽈라 정글 학교에 보내며, 그 종족과 함께 그의 자녀들이 살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그리고 현지까지 가서 이 영화를 만든 신 현원 감독에게 누군가가 촬영 중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었이었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촬영 중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독충들의 공격을 받고 팔 다리가 벌집처럼 되었을 때라고 대답하면서 그런데 그때 그는 기도하며 이런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네가 이곳 아마존에 와서 강 선교사의 삶을 영화화하며 이런 정도의 고통도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의 사역을 필름에 담을수 있겠느냐? 넌 길어야 한 달의 고통이지만 강 선교사는 언제 끝날줄 모르는 고통과 싸우며 선교하고 있지 않느냐? 이 고통을 잘 인내하며 그것을 영상으로 표현하거라.”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남들이 외면한 아마존 장글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그렇게 사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이런 것을 보면서 인생에 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세상에서의 성공이 무조건 행복인가? 또 행복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오늘 성경을 보면, 세상의 성공보다 더 귀한 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행복한 길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돈과 명예, 권세를 얻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바울을 보십시오. 24절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기 보면 바울은 그의 생명도 포기할 수 있는 사명, 곧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도대체 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복음 - ‘유앙겔리온’ 이 말은 ‘유’ 좋다 ‘겔리온’소식이란 뜻입니다. 바로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영어로 Godspell - 좋은 이야기, 복된 이야기란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복된 소식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여러분, 혹시 성철 스님을 아세요? 불교계에서 모두가 존경하는 성철 스님은 고행에 도가 튼 사람입니다. 결혼직 후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나서 수행을 했습니다.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된다고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처에 철조망을 치고 10년 동안이나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답니다. 16년 동안 쌀가루와 솔잎가루만 먹고살았습니다. 그리고 8년 동안 눕지 않고 자면서 수행을 했다고 하니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서 수미산보다 더 높다. 산채로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가 푸른 산에 걸려 있다." 한 평생을 후회하는 말인데 그 속에는 구원받은 자의 소망이 없습니다. 자신의 생의 마침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고승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인입니다.그래서 어느 누구 예외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는데 바로 예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한때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입니다. 교회를 핍박했고, 스테반을 죽이는데 증인으로 서 있었고, 심지어 저, 시리아의 수도인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를 믿는 자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자입니다. 그런 심판 받아 마땅한 자기를 아무 조건 없이 끌어 앉습니다. 그리고 그를 당신의 자녀 삼았을 뿐 아니라 사도로까지 삼으셔서 복음의 증거자로 배려하신 그 은혜, 그 사랑, 이 감격, 그것은 여러분, 맛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은혜 앞에 바울은 마치 감추인 밭의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엄청난 감격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생각 할 때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그는 빚진 심정을 가지고 한생을 복음의 증인자로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오늘 본문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쉽게 말하면 죽으로 가는 길입니다. 고난이 따르고 아픔이 베여 있는 길입니다. 지금 잠시 밀레도라는 한 섬에서 3년동안 가르쳤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이곳으로 오게해서 잠시 만납니다. 여기 2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여기 22절에 보면 “성령에 매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매여”라는 말은 원어로는 “데데메노스”(dedemevno")라는 말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묶여 있다.”라는 뜻입니다.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을 향해 갔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오히려 자기가 성령께 묶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 성령께 묶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속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면 성령에 매임을 받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주님을 사랑하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달라집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에 기복이 심하게 됩니다. 때로는 주의 사랑을 잃어버리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이 말을 원어에 충실하게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각 도시에서 결박들과 고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내게 엄숙하게 증거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동안 곳곳에서 결박당할 일들과 고통 겪을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겁이 났을까요? 지금 바울은 밀레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까지는 우선 배를 여러 차례 갈아타고 가이사랴까지 가야합니다. 가는 동안 여러 항구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육로로 또 여러 도시를 거쳐서 올라가야 합니다.
여행 자체만도 이미 60이 넘은 노년기의 바울로서는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겁이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편안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들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위안을 삼고 용기를 내 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정 반대입니다. 때로 옥에 갇힐 것이랍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랍니다. 여행 자체도 겁이 나는 일인데 결박과 고통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헌신했다 할찌라도 주변의 만류가 있고 그 길이 죽을 수도 있는 길이라면 누가 선뜻 길을 나서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비록 장래의 일이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성령의 이끄심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죄 때문에, 특히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맹렬히 핍박한 그 죄를 생각하면, 벌써 죽었어야 할 몸이지만 하나님의 그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은혜로 아직까지 살아있으며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위대한 선교사역을 행할 수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더 바랄 것, 아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 귀한 것은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의 생명조차도 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말 앞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비쳐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누구에게 이끌려 살아갑니까? 우리 인생은 두 가지 삶밖에 없습니다. 성령에 이끌리든지, 아니면 세상에 이끌리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성령에 메여 사는 삶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무당은 귀신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귀신이 주는 힘으로 일하고, 귀신이 주는 귀신적인 지식으로 점을 치기도 합니다. 술에 중독 된 사람들은 술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술이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부끄러운 행동을 합니다.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길거리에서 아무데나 실례를 하기도 하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으며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아마 인간 제정신으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술에 취해서 술의 지배를 받게 되니까,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귀신에 지배를 받거나 술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메여 사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삶의 주인이 바꾸어졌는데 어떻게 인생이 바꾸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회심의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옛날 방법, 옛날 모습 그대로 삶의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회심이 한 순간 사람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미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앙의 의미를 붙잡지 못하고 명문 브라운 대학에 다니면서 무신론자 친구의 영향으로 이신론자(사실상 무신론자)가 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4년 과정 대학을 3년에 졸업하고 졸업 여행을 떠났다가 시골 여인숙에서 옆방에서 밤새도록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듣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이튿날 그 옆방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바로 대학 시절 자기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바로 자기 친구였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고 인생의 실존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어린 시절에 찬양하던 예수님 앞에 돌아오기로 결심합니다. 회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즉각 기도를 시작합니다. “주님,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어제처럼 지금까지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복음밖에 없고 이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한 후 방금 결혼한 신부와 데리고 인도를 향해 떠납니다. 당시 그가 졸업힌 학교에서 교수로 초빙이 있었고, 보스턴의 한 교회에서 목사로도 청빙이 있었습니다. 이 둘은 다 마음에 둘만한 일인데 다 거절합니다. (인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쫓겨났습니다.그들은 다시 배를 타고 미얀마(버마)로 떠났습니다. 긴 항해 도중에 아내는 유산을 했고 너무 허약해진 나머지 랑군에 도착했을 때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이어 두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도 몇 달되지 않아 열병으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했는데 그만 감옥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 캄캄하고 더러운 감방에서 일년 반 동안이나 고생을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밖에서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 길로 아내는 건강을 해쳐 남편을 출감한 직후에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 일했는데 결국에는 자신도 병이 들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양을 하려고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그의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고국 땅을 밟아보기 전에 선상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당시는 냉동기술이 전무한 시대라 그의 시체를 바다에 장사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이 버마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 아도니럼 저드슨(Adoniram Judson)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드슨의 생을 한번 보세요. 그가 세상적으로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이국만리에서 아내와 자녀를 잃고 자신도 차디찬 바다에 수장되는 운명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차라리 대학교수로 갔더라면, 차라리 큰 교회 목회자가 되었다면 얼마나 행복한 생을 살았을까요? 그러나 그 부부는 진짜 축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세상 복을 포기해 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드슨의 가정은 예수 때문에 망한 가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진짜 복을 받은 가정이었습니다. 저드슨은 불교가 국교인 그 나라에서 최초로 성경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가 죽은 후 단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도 없었던 버마에는 21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한 가족이 그리고 한 공동체가 한 민족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처음에 소명이란 영화로 시작을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소명을 받았다고 다 아마존으로 가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아마존은 도시의 학교일수도 있고 도시의 직장이요 사업장일수도 있습니다. 강 선교사의 소명은 아마존이었지만 신 현원 영화감독의 소명은 기독교 영화인으로 세속 영화의 정글 속에서 하나님의 가치를 증거하는 필름 메이킹이었던 것입니다. ‘소명’의 저자 오스 기니스는 소명에는 일차적 소명과 이차적 소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일차적 소명이 우리가 구원받은 후 우리의 일과 시간, 재능으로 주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일이라면 이차적 소명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과업으로 주님을 섬기도록 부르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소명을 고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삶과 죽음을 걸고 응답해야 할 소명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외칠 그런 고백, 바울처럼 고백하시겠습니까? 이제 그 소명을 고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소명에 기꺼이 희생과 인내로 응답하시겠습니까? 바울처럼 고백하시겠습니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기도하십시다. 아-멘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