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도 있습니다. 북쪽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노인이 애지중지 기르던 말이 도망가자 사람들은 ‘말이 도망가서 어쩌나’라고 위로했지만, 이 노인은 ‘이게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 라며 낙심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도망갔던 말이 멋진 준마를 이끌고 노인에게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더 부자가 되었다고 축하했지만, 노인은 ‘이게 화가 될지 어찌 알겠소.’라며 그 상황에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아들이 다쳐서 저 지경이 되었으니 어쩌나.’하고 위로했지만, 노인은 ‘이게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라는 태도를 보입니다. 얼마 후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많은 남자들이 징집 되어 전쟁터에 나가 전사했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다친 것 때문에 징집되지 않았고 그래서 전쟁통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노인이 왜 그리 모든 일에 덤덤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때론 우리에게 원치 않는 슬픔이 찾아오기도 하고, 고통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언제나 슬픔이나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기쁨이 찾아오기도 하고, 환호성을 지를 순간도 찾아옵니다. 심지어 내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그것이 내게 더 큰 유익과 기쁨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걸 알기에 우리는 고통의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고, 슬픔이 우리의 삶을 휘감을 때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반면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할지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다음을 준비하게 됩니다. 내가 맞닥뜨린 그 한 번의 순간에 내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기에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 앞이 캄캄하다 하더라도 빛되신 주님이 계심을 믿기에 어둠 속에서도 찬송을 부르며 갈 수 있습니다.
본문은 부흥하던 예루살렘 교회가 엄청난 환란의 광풍이 불어 닦쳤습니다. 이 핍박이란 사건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형제가 끌려나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고 사도들이 나가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쓰러지며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옵니다. 본문 3절에는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여, 남녀를 무론하고 닥치는 대로 끌어다 옥에 넘겼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 핍박을 피하여 살아남기 위해서 부득불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원치 않는 곳, 원치 않는 남의 나라 땅에서 유리방황하며 쫓기는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핍박 가운데 흩어졌던 사람 가운데 빌립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빌립은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당시 7집사는 한 마디로 ‘비전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 스테반은 순교하였고, 지금 빌립은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저들을 흩어놓았지만, 그들 가슴속에 있는 비전과 열정은 흩어놓지를 못했습니다. 흩어진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씨가 흩어져야 확산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 꺼진 잿덩이들이 아무리 흩어져도 재는 재입니다. 흩어져 보아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불씨를 흩었을 때 불씨가 또 다른 불을 붙이기 때문에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빌립이 어디로 갔습니까? 5절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오늘 본문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교만하여 사마리아 땅은 지나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으로 취급했고,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마치 더러운 짐승을 대하듯 했고 상종하기를 꺼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가까운 길인데도 더러운 길이니 밟지 않겠다 하여 멀리 돌아서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원수처럼 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앞에 핍박이 있고 보니 사마리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날 업신여기던 사람과 이제 친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미워하던 사람, 전에 무시하던 사람들을 이제 사랑하는 사람으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지난날 저들은 이방 사람들의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음식을 나누지도 않았고, 물론 그 집에 들어가서 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워낙 핍박이 심하고 보니 이방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들은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핍박과 환난을 통하여 그 협소한 민족주의가 깨어져 나가고 자기 우월감과 교만의 높은 담이 무너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복음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Good news’ 입니다. 복음을 전 했다.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소문냈다. 알려줬다. 광고했다. 가르쳤다. 선포했다’ 는 뜻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소식이고 좋은 소식이니까 가만히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알려줘야 합니다. 남에게 전해야 합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반응이 6절에 나옵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사마리아 인들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짐승같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한마음으로 복음을 믿고 따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여기 큰 기쁨은 메가톤급 기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2002년 올림픽 때 4강의 신화를 만들었을 때, 전 국민이 축구공 하나 때문에 기쁨의 도가니 속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 중 기쁨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어린 아기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하루 400번 이상 방긋 웃는 그 웃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하루에 15번 정도 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아기들을 보면 방긋 웃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그 웃는 모습에 매혹되어 우리는 아기들을 사랑합니다. 이 말은 누구나 기쁨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슬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아무도 기쁨 없는 세상을 살지 못합니다. 기쁨이 송두리째 다 쓸려가 버린 인생을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삶에서 기쁨이 고갈되어 버리면 자칫 탈선할 위험이 있습니다. 즉 어떤 악한 방향으로 기쁨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무서운 범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가령 요즘 젊은이들은 마약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TV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마약중독자의 말 한마디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피우면 어때요?”라는 질문에 “말 못할 정도에요. 너무 좋아요.”라고 일축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건전한 기쁨을 잘 모르거나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잘못 된 곳에서 잠시 느끼는 기쁨마저도 찬양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기쁨이란 중요합니다.
지금 빌립이 어둠의 땅, 버려진 땅, 저주받은 땅으로 알려진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자 온 성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기쁨이 있더라’에서 ‘있더라’라 번역된 헬라어 ‘기노마이(ginomai)’는 어떤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역동적인 현상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이 복음을 전하자 그 성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큰 기쁨이 ‘생겼다, 솟아났다’는 뜻입니다. 마른 땅에 샘이 터지듯 복음이 전해지자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활화산처럼 솟구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요 역사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슬픔과 탄식의 어둠의 땅에 위로부터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용솟음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복음이 전파되면 큰 기쁨이 샘처럼 솟아날까요? 그 이유를 살펴봅니다.
첫째, 복음은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5절에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여기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단어는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소식입니다. 그리스도 바로 기름 부음 받은 자 - 이는 메시야요 우리를 구원을 할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보통 소식이 아닙니다. 이들은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들의 죄를 구원할 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빌립이 이 사마리아성으로 올 때, 요즘처럼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환난과 핍박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빌립이 전한 복음은 순수한 복음이었습니다.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이 알몸으로 쫓겨다니며, 이 집 저 집 숨어 지내는 처지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저들은 무엇이라고 하였겠습니까? 만약 저들에게 “예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라고 하였다면 아마도 듣는 쪽에서는 “당신이나 복 받으시오”했을 것입니다. 지금 알거지로 쫓겨다니는 신세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환난 속에서 전해지는 복음은 순수합니다.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복음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은 복음입니다. 이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나에게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래서 그것이 어떻다는 거냐고 반문해 버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나 그렇지 사람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죄 용서 받았다는 사실이 어떤 이익이나 손해를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왜 기쁜 소식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은 기쁜 소식이 아닌 어리석은 소리로 들리기 일쑤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분들 가운데서도 이 기쁜 소식을 가슴에 담고 감격해 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힌두교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요, 인간은 거룩하고 성결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놓고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모독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거야말로 눈 감고 아웅이 아닙니까? 정말로 인간이 거룩합니까? 회개가 필요 없고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 양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만큼 더러운 악마들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인간이 정말 죄가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그런 눈 감고 아웅식의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엉망입니다. 구원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구원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고백할 때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더 이상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심으로 주님 앞에 회개했으면 더 이상 죄 짐에 눌려 살지 마십시오. 죄보따리를 던져버리십시오. 더 이상 반복적인 죄의 관성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도 주의 보혈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눈보다 더 희게 하는 것도 주의 보혈입니다. 구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능력도 주의 보혈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무거운 짐을 맡겨놓으십시오. 그리고 죄에서 자유하십시오.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확실히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진리 안에서 자유 한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이요 행복인줄 믿습니다. 죄로부터 자유 한 자만이 진정한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 복음은 모든 질병을 치유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7절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런데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는 말이 아니라 ‘possessed, 억눌림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귀신은 영적인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여러분에게도 딱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게 들어와 있으면 기도가 안 되고 기도가 자꾸 샙니다. 5분 이상을 기도하지 못합니다. 어둠의 세력이 내 영혼을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마비된 현상과 같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기쁨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귀신들이 나를 억압하고 있으면 찬양도 안됩니다. 설교를 들으면 자꾸 졸게 됩니다. 머리가 아픕니다. 답답하고, 괜히 사람이 밉고, 자기도 모르게 자꾸 화가 납니다. 이게 다 억압이 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순식간에 자기도 모르게 이 쇠사슬이 다 끊어져 버립니다. 여러분이 설교자가 되면 알게 됩니다. 설교를 시작할 때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둡다가도 끝날 무렵이면 환해집니다.
그리고 여기 ‘못 걷는 사람’으로 번역된 ‘콜로스’라는 단어는 선천적 불구자라는 말입니다. 2천년 전 중풍병자와 선천성 불구자라면 요즈음 말로 불치의 환자들입니다. 당시 의학으로서는 도저히 손도 댈 수 없는 불치의 환자들이 말씀의 능력으로 깨끗이 치유가 되고 그로인해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샘솟게 되었습니다. 불치의 환자가 치유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곳에 큰 기쁨이 샘솟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2천년전 사마리아에서 고통받던 불치의 환자들을 치유한 말씀은 다른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빌립이 그들에게 전했던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도 주어진 이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2천년 전 사마리아의 불치의 병자들을 치유하여 그곳에 큰 기쁨이 샘속게 한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똑 같은 능력을 지닌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 참 어려운 질병과 투병을 하며 고통을 당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붙잡고 그분들이 말씀의 능력으로 치유되기를, 그래서 그분들의 가정과 우리 교회에 큰 기쁨이 샘솟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뜻이 있으시다면 반드시 고쳐 질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들은 병이 낫은 것에만 기쁨을 두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기쁨이 단지 육체가 치유 된 것뿐이었다면, 과연 그 기쁨이 얼마나 지속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육체의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큰 기쁨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지만, 그때의 기쁨이란 얼마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수도 없이 경험해 왔습니다. 여기 ‘나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데라퓨어’는 ‘치유하다’라는 의미와 ‘예배드리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카피라이터로서 뒤늦은 나이에 예수를 만난 후 ‘막 쩌낸 찐빵’이라든지 ‘예수 안 믿으면 손해보는 77가지 이유’라는 책으로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만재라는 분이 거듭나고 나서 쓴 글이 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그는 성경말씀이 하나도 믿어지지 않답니다. 자기의 상식이나 철학으로 예수 믿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결혼할 때 교회에 나가겠다는 조건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끌려서 교회에 다녔지만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순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 뻥도 심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물위를 걷는 기적에 대해서 들으면서 "목사 양반이 멀쩡한 것 같은데 참 거짓말도 잘하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를 향해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예배 시간에 목사님의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이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 먹이는 것이야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 순간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그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자기 인생의 구원자로 만난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한 찬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50여 년이 다 되도록 자신이 한 것은 세상에 속해서 세상 방법대로 세상에 취해서 살아온 것뿐인데 자기가 어디가 예쁜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은혜를 주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때는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자기가 이제는 자신의 인생 송두리째로 다 하나님께 드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기모습이 너무나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이 감격 때문에 생애에 가장 큰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제 사마리아 성이 이 복음을 받고 일어난 변화가 무엇입니까? 8절입니다. 여기 8절을 보세요.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여기서 ‘큰 기쁨’이라는 말은 1절의 큰 ‘핍박’과 2절의 ‘크게 울더라’ 즉 큰 슬픔과 대조를 이루는 말이 아닙니까? 예루살렘 성도들은 큰 핍박과 큰 슬픔 속에서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큰 핍박과 큰 슬픔이 오히려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전 같으면 원망과 탄식이 나올 상황인데도 감사가 나옵니다. 입술에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그 이유는 주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사명이 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축복을 나만이 아는 비밀로 간직하고 산다면 이기적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모든 질병을 치유하고,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선포하는 것이 동성교회의 사명이요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직도 어둠의 사마리아 땅에 신음하고 있는 가족을 찾아야 합니다. 이웃과 친구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곳에 바로 메마른 땅에 생수가 샘솟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 생수를 마시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곳에 샘물이 샘솟는 기쁨이 충만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