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꾸라는 일본 작가가 쓴 『침묵』이란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17세기 일본 선교에 나선 포르투갈 선교사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일본에서 선교하던 선교사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의 제자 3명이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서 일본에 들어와 박해 가운데 선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선교를 하다가 붙잡히고 맙니다. 당시 일본이 예수 믿다가 발각된 사람을 죽이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닷가 모래에 온 몸을 묻고서 얼굴만 남겨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점점 바닷물에 얼굴이 잠겨 죽게 됩니다. 주인공인 로드리꼬 선교사는 붙잡혀서 예수님의 사진에 침을 뱉고 사진을 발로 밟고 예수님을 저주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습니다. 만일 그가 시킨대로 배교하고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밟고 지나가면 해변 모래에 생매장되어 있는 친구 신부와 성도들을 살려주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친구 선교사와 성도들이 밀려들어오는 바닷물에 의해서 생매장되어 죽게 될 것이란 협박을 받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로드리꼬 선교사는 ‘내가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발로 밟을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이런 상황에서 침묵하십니까?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그렇게 절규하는 로드리꼬 선교사에게 조용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서 존재하느니라...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너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외면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계실 뿐입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울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방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울고 계십니다. 내가 문제 앞에서 두려움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도 나와 함께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단 침묵하고 계실 뿐입니다.
지금 초대 교회가 그렇게 부흥을 경험하던 교회가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핍박 속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보셨지만, 사울이란 한 청년이 예루살렘 교회를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행8: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이는 광풍이 불어 닥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9장에 보면 1-2절에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생각해 보세요.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 “잔멸”이라는 말씀과 “살기가 등등하여”라는 이 단어는 매우 폭력적인 단어이고 살인적인 단어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에 핍박이 있었지만, 성도들은 믿음으로 이 어려움들을 극복을 했지만, 갑자기 불어 닥친 광풍처럼 교회에 박해가 밀려 올 때 여기저기 무너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이 일에 주도적으로 나선 사람이 바로 사울이라는 청년입니다. 이 사울에 박해 앞에 교회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채 무력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더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엔도 슈사꾸라는 일본 작가가 쓴 『침묵』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우리가 고통 가운데 울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방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울고 계십니다. 내가 문제 앞에서 두려움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도 나와 함께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다만 때를 보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사울이 그 당시 상당히 먼 거리인 예루살렘부터 다메섹까지 230km가 되는 먼 거리를 그것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그가 칙령을 받으러 들어갈 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위협과 살기의 마음이 등등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미움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되겠다라는 미움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날도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가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빛이 비추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사울과 그의 일행을 비추게 됩니다. 깜짝 놀란 사울이 땅에 엎드러지게 됩니다. 그에게 비친 빛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그만 사울의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여러분 이 음성은 보통 음성이 아닙니다. 사울의 삶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일은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는 그를 존재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그 유명한 사울의 회심의 사건입니다.
보십시오. 사울의 회심 사건의 핵심은 사실 하늘의 빛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도 아닙니다. 사울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은 그의 회심사건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사울의 만남! "주여 누구십니까? 나를 이렇게 찾아와서 나를 이렇게 무릎꿇게 만든 장본인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사울의 물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너무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과의 대면은 사울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이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사흘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사흘동안 보지 못한 것, 그리고 식음을 전폐한 것은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말하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예수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 나에게 나타난 예수가 바로 메시야란 말인가?"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나에게 나타난 그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마 수많은 생각들과 물음들이 그의 삶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구원자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중에 우리가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다메섹에서부터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는 전도자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만나면 어디서든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는 바로 예수님이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은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 분이 부활하셨다. 그리고 나를 만나주셨다"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핍박자가 전도자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왔던 그가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한 신학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다! 그리고 바울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지난 세기를 살펴보면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역할 때문에 세계 역사가 바뀐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즉 종교적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그는 엄청난 영향력을 이 인류 역사에 끼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을 누가 바꾸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바꾸셨습니다. 그는 원래 이 역사를 바꿀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바꾸셨습니다. 이 사도 바울의 변화, 하나님이 그를 바꾼 사건을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변화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아마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무언가 변화를 위한 갈망이 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 지금보다는 좀더 나아져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정말 위대한 인생을 살 것인가?' 변화 받고 싶고 변화되고 싶지만 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인간이 변화되는 게 참 어렵습니다. 반대로 변질되는 건 참 쉽습니다. 여러분, 변화와 변질의 차이를 잘 아실 겁니다 ‘변화’는 긍정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고, 반면 ‘변질’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변화는 어렵고 변질은 쉬울까요? 인간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악해지기는 쉬워도 선량해지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이 변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오늘 사도 바울처럼, 사울이 바울이 됨으로 이 세계사를 바꾼 것처럼 우리도 변화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 주제에 대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몇 가지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1. 하나님의 집요하신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사람을 결코 놓치시지도, 포기하시지도,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사실, 성경은 영혼의 추적자에 관한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을 영혼의 추적자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을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탕자처럼 멀리 떠나 그분을 잊고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에 짝하여 방탕할 때도 그분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쾌락에 묻혀 살 때도 그분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두려워 숨어있을 때에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 나서셨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가 숨어있는 장소를 몰라서 부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또한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이고 전혀 회개할 마음이 없을 그 때에도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를 역시 부르셨습니다. "가인아,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무슨 얘기입니까? 죄 지은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 살인한 가인을 부르셨던 하나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살기 등등해서 찾아가는 사울을 부르셨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에서 사울은 비로서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여기 5절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니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것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체험이었기 때문에 사울을 소경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를 땅에 엎드러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제 정복자의 발아래 엎드린 것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와 만나는 장면은 사울 자신이 부서지는 일과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예수 믿는 일에 가장 커다란 방해가 되는 우상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일수록 고집을 꺾고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가 어렵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이 거울 앞에 서기까지는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그러했고 예레미야가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만난 후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훗날 이 사건을 돌이켜보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일컬었습니다. 나는 율법적으로 흠이 없고, 도덕적으로 예수 믿는 너희보다 낫다. 이만하면 내가 너희를 정죄할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했던 사울, 그래서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 그러나 그는 오늘 이 다메섹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만한 줄 아십니까? 자신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못 보는 이유는 하나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도 저 멀찌감치서 만났어요. 여기에 아무리 환한 빛이 있어도 100미터 정도 떨어져서 반짝거리는 불빛 아래 깜깜한 밤에 옷을 보십시오. 아무런 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밝은 빛에 오면 올수록 깨끗해 보이던 옷과 얼굴이 더러워져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후, 날마다 날마다 간증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 남은 인생을 그는 이렇게 간증하며 살았습니다. 변화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당신을 바라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보십시다. 나를 보십시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면 허물이 나에게만 있고 남에게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있지 않고, 아내에게 있지 않고, 자녀와 부모에게 있지 않습니다. 모든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여기서 내 과거가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내 과거를 올바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잘못 해석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원망합니다. 자기 환경을 탓합니다. 내가 왜 이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나, 나는 왜 키가 이만한가, 나는 왜 돈 없는 부모를 만났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보십시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비로소 여러분의 과거가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래서 나를 그런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구나! 하나님이 이래서 나를 그렇게 고생시키셨구나!" 과거가 비로소 해석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돌아봄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도록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의 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의 고백을 아그립바 왕 앞에서 고백을 하는 장면이 행22:9-10절에 나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여기 “주님, 이제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이것입니다. ‘주님, 이제부터 변화된 삶을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이 없는 사람의 회심을 믿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 인생의 주인이 달라졌다면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다메섹에서 그의 삶은 180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자신이 앞으로 살아야 할 삶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바울은 행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 선교에 나선 후 순교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선교여행에 헌신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약 2년 여 동안 갈라디아 지역을 224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는 약 3년 여 기간 동안 약 5000키로의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3차 전도 여행 때는 약 6년여 기간 동안 500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로마로 가서 긴 투옥생활을 보내고 잠시 풀려났습니다. 그 후 서바나와 기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로마에서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여행 도중 자기가 겪었던 그 고초를 고후 12: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 그야말로 바울은 예수를 위해 철저하게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세상은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미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여 그 영생을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주를 위해 온전히 헌신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명성을 위해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채 1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의 미쳐 자신의 목숨을 다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미친 것입니까? 사람은 어차피 무엇엔가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엔가 빠져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10대는 사랑에 미치고, 20대는 야망에 미치고 30대는 소유에 미치고, 40대는 정욕에 미치고, 50대는 늙음과 고독에 미치고, 60대는 명예와 죽음에 미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미쳐 살아가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 오늘 교회와 이 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똑바로 미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 역시 예수님께 미치고 싶습니다. 완전히 미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해서라도 그들을 세우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에 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왜 날마다 세상에 패배하며, 죄에 지며,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합니까? 우리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다. 오늘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오. ‘주여 뉘시오니까?’ 이는 내 삶을 주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 앞에 나의 삶이 새롭게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