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주일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 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나누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인간을 냉동 보관한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영하 196도의 액체질소가 든 금속탱크 안에 사람을 보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죽은 사람을 소생시킬 의술이 실현될 때까지 시신을 냉동보관하고 있다가 그 사람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피를 다 빼고 부동액과 같은 특수 액체를 피 대신 채웁니다. 그렇게 해서 영하 196도로 보관한 후, 약속된 시간이 되면 해동시킨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이런 인체냉동보존술(Cryonics)에 따라 냉동 보관된 사람이 지금까지 200명이 넘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2천 명 이상이 대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매년 400불(약 45만원)의 회비를 내야 하고, 죽은 후에 냉동보관하기 위해서 시술비로 약 15만불(약 1억 6천만 원)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보려고 별별 짓을 다 합니다.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죽음의 능력을 거부 하거나 그것에 도전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그 힘이 무용지물입니다. 천하를 호령할 만한 기개나 권력도 죽음을 피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허무해져버립니다. 죽음은 생명을 가장 초라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요,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어 놓는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린도는 가장 현대화된 문화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사치, 부도덕과 음란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인이 된다"는 말은 "방탕한 사람이 된다"는 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세속화의 한 복판에서 바울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끊임없이 세속화의 유혹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 도시는 매우 자유로운 사상이 넘치는 도시이었음에도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안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12절에는 바울의 엄중한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것이 헬라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자신있게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부터 17절까지 비슷한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것을 논증합니다. 이 구절 안에는 유명한 오중주의 '욱'(uk)이 들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어 (not, nothing)로 쓰이는 단어가 '욱'입니다. '아니요', '없으면'하는 뜻입니다.
13절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이것이 '욱'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리라.' 비슷한 형식을 17절까지 5번 정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골자는 이것입니다. '왜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죽은 자라도 살 수 있다.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죽은 자가 다시 살 수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절대 살리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아라.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얼마든지 부활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까?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이 부활에 대해서 이처럼 당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도 예수님을 못 만나야 됩니다. 그런데 엄연히 살아계신 주님을 본 바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약 부활이 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먼저 복음을 위해 살다가 간 자들과 자기 또한 얼마나 비참한 자가 되것인가를 피를 토하듯 증거하고 있습니다. 19절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여러분 바울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시다시피 그는 누구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운 핍박자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가 어떻게 변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참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고 유대전통과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성장했기에 헬라의 문화와 철학, 그리고 로마의 정치와 법에 익숙한 ?을 살았습니다. 또 그는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시민권을 돈으로 사기도 했지만 태어나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말은 대단한 가문의 배경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당대 석학으로 알려져 있는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성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집어넣고 교회를 핍박하게 된 것은 그냥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과 신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앞장을 섰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일에 모든 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예수 믿는 사람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러한 열심은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이처럼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생을 송두리째 변케 한 사건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이 가졌던 세상적인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 온갖 고난, 수모를 겪었습니다. 결국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순교를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칸타타로 준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바쁜데도 불구하고 아산에서, 포천에서 아산에서 이곳 저곳에서 오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신 분들이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죽음이 하나님을 붙잡았으니 그보다 더 큰 승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의 승리는 겨우 사흘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사슬을 끊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사로잡아 결박하셨습니다. 이제 그 죽음은 결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과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3년 동안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 모두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다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고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신의 한 목숨을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한 생을 후회 없이 살았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은 너무나 황홀하기에 이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바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입은 사람들은 이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세상에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독특한 삶을 선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 적인 야망이나 세상 적인 성공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돌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꿈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활활 태우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그들은 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를 거부했습니다. 두벌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생을 선택하고 그 가난을 가지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 생을 바치는 위대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의 황홀한 능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그 주님 붙잡고 이 땅에서 주께서 맡긴 사명을 당당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국정 농단으로 인해 대통령이 탄핵과 구속이 되었고, 지금 지금 우리나라는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마치100여 년 전 세계열강이 조선을 잡아 삼키려하던 때와 흡사한 형국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사방에 욱여쌈을 당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외환위기 때보다도 더 어렵다고 느껴지는 내수 침체와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강화되고 있는 미국의 자국보호주의, 그리고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 등을 고려하면 말 그대로 '내우외환'이라는 말이 딱 맞는 우리 시대의 상태입니다.
사방에서 우리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실물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가장들은 실직하고 조기 퇴직자들이 비정규직으로 몰리면서 청년실업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런 통계를 보면 이 나라가 다시 일어 설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저 앉아 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계는 지진과 전쟁, 그리고 기아와 굶주림으로 절규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사탄이 그저 제철을 만난 듯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영적 어두움이 우리를 덮으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의 이 아침!
부활의 능력을 입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타성으로 젖은 잘못된 신앙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며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 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그,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거룩한 삶이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