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삽니다만, 그러나 이 변화를 가로 막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편견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세익스피어 이후 영국의 최고 극작가이자 사회비평가인 버나드 쇼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 사회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재미있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로뎅의 작품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나드 쇼는 사람들의 편견을 고치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멋진 파티를 열고,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골라서 초청을 합니다. 만찬이 무르익어 갈 즈음 버나드 쇼가 나와서 마이크를 잡습니다. “여러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아주 귀한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그림을 하나 가지고 와서 보여줍니다. “여러분, 멋있지요? 이것이 로뎅의 작품입니다.” 장내가 조용해지더니 웅성웅성 거립니다. 잠시 후에 편견에 사로잡힌 혹독한 비평들이 쏟아집니다. “야, 색깔이 왜 저 모양이냐!” “그래, 맞지? 우중충하지?” “어떻게 구도가 저 모양이냐?” 급기야는 “저것도 그림이라고 그렸나?”
이구동성으로 로뎅의 작품에 대한 비난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버나드 쇼가 마이크를 잡고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합니다. “아! 여러분,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만 그림을 잘못 갖고 나왔네요. 이 그림은 로뎅의 작품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작품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찬물을 부은 것처럼 장내가 숙연해집니다. 이야기는 영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미켈란젤로 팬의 입장에서 그것이 로뎅의 작품인 줄 알았을 때는 그림이 형편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혹평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었습니다. 이처럼 편견은 사실을 사실로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진리를 진리로 보지 못하고, 사실을 왜곡시킵니다. 편견은 갈등과 오해를 일으킵니다. 편견은 서로를 미워하게 하고, 심지어 살인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편견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가지고 남을 대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입니다. 웹스터 사전에는 ‘편견(prejudice)’을 ‘미리 정해진 판단’입니다. 사실을 확인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판단을 하고 사실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선입견’ 혹은 ‘선입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도 ‘편견’에 사로 잡혀 변화를 두려워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출발한 복음의 물결이 제자들에 의해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방문했던 유대출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기들이 사는 곳으로 흩어지면서 복음이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전파되었을 뿐 아직까지 이방인들에게는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해왔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고, 할례 받지 못한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복음이 편견의 벽을 너머 온 땅에 복음이 펼쳐지는 새로운 변화의 장을 만드는 감격적인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고넬료입니다. 그의 출신은 이달리야 사람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인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2절에서 단정적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이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한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의 삶을 세 가지로 특징짓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백성을 많이 구제했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요? 그는 이달리야 사람이었어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어요. 로마에서 백부장은 그렇게 높은 위치가 아닙니다. 워낙 높은 계급이 많으니까요. 오늘날로 말하면 중대장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의 백부장은 그 당시 위치로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가장 높은 계급으로 로마로부터 파견된 사람이 천부장이었고, 이스라엘 나라를 통째로 다스리는 이 천부장 바로 밑에 있는 계급이 백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한 위치 아닙니까?
이 고넬료, 백부장의 위치를 가진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얘기합니다. 자기가 통치하고 있는 백성들을 학대한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을 많이 구제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자기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는 온 집안 식구와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본문은 얘기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놀라운 일이 베드로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요? 고넬료의 신분 때문입니다. 그가 이방인이었어요. 이방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가 고넬료의 모든 아름다운 일들을 무효화시켰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신앙생활을 통해 감동 받지 않았어요. 유대인들은 오히려 냉소하며 냉담했습니다. 왜? 고넬료의 삶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고넬료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리 기도와 구제와 하나님을 경외해도 이 모든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이처럼 편견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편견의 벽을 허무는 한 환상을 보게 하십니다. 제 육시에 베드로가 기도하기 위해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제 육시는 요즘으로 말하면 낮 12시입니다. 낮 12시는 유대인의 기도시간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오전 9시, 오후 3시, 그리고 해 질녘을 기도 시간으로 정해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낮 12시에 기도하기 위해서 지붕 위로 올라갔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의 습관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사이에 허기를 참는 방법으로 기도하러 갔던 것입니다. 어쩌면 기도하고 싶은 강한 열망이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지붕은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무두장이의 집은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올라간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은 해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인해 기도하기 좋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기도 중에 베드로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더니 보자기 같은 그릇 하나가 내려오는 데, 그 안에는 각종 네 발 달린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나는 것들’은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깨끗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해서 먹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환상 가운데 하늘에서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당연히 베드로는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인 베드로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서 부정한 짐승이라고 분류되어 있는 것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잡아먹으라니, 베드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10절 마지막에 표현된 대로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황홀한 중에’라는 말은 일반적인 지각 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사용했던 개역성경에서는 ‘비몽사몽간에’라고 표현되어 있고, 공동번역 성경에는 ‘무아지경’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절반은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거의 무의식 상태인 그 때에도 부정한 것은 먹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생각 깊숙이에 뼛속까지 유대인의 전통과 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정된 사고, 어려서부터 받아온 문화적 교육에 의해서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베드로는 ‘부정한 것이라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편견 때문입니다. 내 문화와 전통을 바꾸는 것, 내 어릴 때부터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내가 가진 편견을 하나님 앞에서 고치는 일이 이렇듯 어렵다고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가진 어떤 편견의 담이 무너지고 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이 더 잘아 실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 중에 똑똑히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 자기 고집의 담이 헐어지지 않습니다. 여기 환상을 본 베드로가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다른 것도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한 게 얼마나 마음에 걸리겠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머무는 무두장이 집에 사람이 찾아옵니다. 19-20절에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보낸 사람들이니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는 성령의 말씀을 들었기에 그 사람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향했습니다(본문 23절).
베드로는 이 고넬료의 가정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행10:34-35절에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푸는 것을 금하겠는가?” 하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명령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을 따라 고넬료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그가 그동안 가졌던 이방인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이 담을 헐어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변화는 세계 선교역사에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만일 그 때 베드로의 생각이 편견이라는 담안에 갇혀서 굴절된 시각에 머물러 변하지 않았다면 복음은 유대인들의 전유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시기 위해서 똑같은 환상을 세 번씩이나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이방인에 대한 베드로의 유대적 담을 깨뜨리기 위해서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 고넬료라는 이방인에게 세례를 준 사건은 11장에도 계속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당시 편견의 벽에 갇힌 다른 유대의 지도자들이 이 사건에 엄청 분노가 일어납니다. 11:1-3절에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가 가이샤라에 다녀왔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가서 이방인들과 부둥켜안으며 놀라운 교제를 했습니다.
베드로가 담임목사요 지도자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눈초리가 이상한 겁니다. 다 굳어 있습니다. 그 눈에서는 광채가 납니다. 웬일일까? 그 때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입에 거품을 품고 얘기합니다. "베드로여, 회개하시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납니다. "당신은 자유주의자요? 그 단에서 내려오시오! 더 이상 설교할 자격이 없소! 베드로 당신은 변질했소! 어떻게 불신자와 같이 음식을 먹을 수 있단 말이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따르지 않겠소!" 베드로의 태도입니다. 베드로의 태도를 4절에서 간단히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베드로가 얼마나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까? 잘 아시지요? "내가 죽는 데까지라도 주와 함께 가겠습니다!" 말고라는 종이 예수님을 잡으러 오니까 검을 빼 가지고 그의 목을 치려다가 귀만 딱 잘랐어요. 이런 베드로의 성격으로 볼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날 성도들이 앉아서 수석 사도에게 삿대질을 해가면서 당신은 자유주의자이며 변질되었다고 했어요. 베드로가 두리번거리다가 물 컵을 던지든지 해야 하는 건데, 베드로의 태도를 보세요. 베드로가 일어나더니 차례로 설명했다고 얘기합니다. 13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이미 거룩한 준비를 하셨어요. 가보니까 이미 고넬료의 집에 다 준비를 시켜 놓았습니다.
13절, 14절을 보세요.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여기 그가 너와 네 온 집에 무엇을 얻을 말씀을? 구원 얻을 말씀! 하나님이 이미 고넬료를 준비시켜 놓으셨어요. 거룩한 환상이 있었고, 거룩한 명령이 있었고, 거룩한 준비가 있었고, 마지막에 보니까 거룩한 일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15절을 보세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늘 이 모든 설명을 차근차근히 한 다음 17절에 베드로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것이 베드로의 태도였습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베드로는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내 철학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어릴 때 받은 교육을 고집하지 않았고, 나의 전통과 습관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사람이었고, 그는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유대교 가운데서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의 마음 문을 열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왜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었는가? 초대 교인들의 놀라운 태도를 성경은 18절에서 다시 한 번 이렇게 소개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당신은 자유주의자요? 단에서 내려오시오! 이제 우리는 당신을 따를 수 없소!" 그 험악한 분위기 가운데서 베드로가 절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자, 그들이 듣고 잠잠해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열려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생각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교제할 수 있어요? 그러나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그들은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생각을 바꿉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분노가 찬양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기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우리'동성교회'가 지금 이대로 '좋은 교회'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동성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이 시대적인 교회 중 하나인가?는 저와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보혈의 능력을 붙잡고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매일 매일,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헌신하는 이 열정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교회는 세상 앞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젠 베드로처럼 복음을 위해 이 시대를 감당하기 위해 과감하게 편견된 담을 고정 된 담을 헐어야 합니다. 언젠가 이야기를 드렸지만, 정광호 씨는 「우화경영」에서 솔개의 장수비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솔개의 수명은 70년입니다. 솔개가 40년쯤 살면, 입과 발톱이 날카로움을 잃고 무뎌지고, 털은 점점 불필요하게 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솔개 특유의 날카로움과 날쌤이 없어집니다. 이 때 솔개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에 대한 결단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살 것이라고 결심한 솔개는 높은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서 둥지를 틀고 바위에 자신의 부리를 사정없이 박기 시작합니다. 그것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어도 부리가 완전히 깨질 때까지 계속해서 박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리가 새로이 자라는데 2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 때까지 솔개는 마음껏 먹지도 못하고 고통과 아픔 가운데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리가 다 자라고 나면, 날카로워진 부리를 가지고 자신의 무뎌진 발톱을 모두 뽑습니다. 발톱이 새로이 나는데 또다시 2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발톱이 다 나고 나면, 발톱과 부리를 가지고 털을 다 뽑기 시작합니다. 깃털이 다 뽑힌 솔개는 볼품없고 나약하고 초라해져 보입니다. 2개월쯤 지나면 솔개에게 새로운 깃털이 난다고 합니다. 그런 고난의 과정이 5~6개월쯤 지나면, 솔개는 새로이 태어나, 남은 30년을 옛날처럼 찬란하고 의미 있게 살아간다고 조류학자들은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솔개에게 자신을 갱생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지혜를 주셨다고 해서 모든 솔개가 그 지혜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솔개는 4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삶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지혜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리가 깨어지고, 발톱과 깃털이 뽑히는 아픔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일평생 살아온 것을 깨는 것은 아픈 일입니다. 고통스럽고 힘들고 지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깨뜨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좋고 귀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에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붑니다. 불과 10년 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이 지역의 변화가 불어 닦치고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변화를 선택한다면 교회는 새로워질 것이고,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자리에는 썩은 물만 고이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은 고통스럽더라도, 조금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십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서 나간 사람을 선구자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 누가 선구자여야 하겠습니까? 솔개가 자기 부리를 바위에 쪼아 없앰으로 튼튼하고 새로운 부리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창조적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선구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그 선구자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이제 이 일을 위해 우리가 일어서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