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우리 청년들에게 많이 읽히던 책 가운데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김난도 교수가 쓴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되며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불안한 미래와 외로운 청춘을 보내고 있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아 그 해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이 책이 2010년에 발간이 되었는데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은 청년들에게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 우리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태어날 때 물고 태어난 수저가 사회 계급을 정한다고 해서 만들어진 단어 ‘흙수저’,란 이 단어는 이미 계급 형성이 되어서 출세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 헬 조선이라는 말을 아시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삶을 연명하는 것이 지옥처럼 힘들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삼포세대’는 연애·
요즘 가장 많이 생기는 점포를 꼽으라면 단연 인형 뽑기입니다. 2015년에 21개 정도인 이 점포가 2016년도엔 500곳으로 급증을 했고, 지금은 점포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폭발적으로 빠르게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형들이 좋은 인형도 아닙니다. 대부분은 싸구려 짝퉁입니다. 이는 청년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이 게임에 몰두하는 것은 인형을 갖고 싶은 게 아니라 작은 성취감이라도 느끼며 스트레스를 풀어보려는 하나의 몸부림입니다. 상자 속에 갇힌 인형이 마치 자신의 신세처럼 보인다는 청년의 말이 떠오릅니다.
오늘은 교회가 성년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만 19세로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미래가 활짝 열린 길을 가는 꿈과 열정이 있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청년들에게 희망적이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당면한 이 어려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우리에겐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14절을 보면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청년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12절에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이 청년은 과부의 아들이요, 독자입니다. 그 당시 여자가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앞날에 엄청난 시련과 극심한 가난, 고독이 기다리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루하루를 보냈을까요? 그래도 유일한 희망은 자라고 있는 어린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고생을 이겨가며 아들을 키웠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 아들을 놓고 “청년아!”라고 부른 것을 보면 이제 성인으로 불릴만한 나이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로서 얼마나 마음에 꿈이 부풀어 있었을까요? ‘이제는 가정의 기둥이 생겼구나. 이제는 기대고 살 만한 기둥이 생겼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더 흘릴 눈물이 없을 만큼 울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아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여인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아마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여자, 무슨 죄가 많아서 이렇게 팔자가 사나울까? 남편을 먼저 보내더니, 이제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마저 보내다니….’ 그러면서 장례 준비를 거들었을 것입니다. 이 장례식은 꿈을 잃어버린 미래가 사라진 고통의 장례식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를 이끄시고 청년의 시체를 장례하는 그 나인성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11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여기 ‘그 후’는 가버나움에 계실 때 백부장의 종을 고친 후라는 말입니다. 가버나움에서 나인성까지의 거리는 약 40km(100리)쯤 됩니다. 성경에는 나인성에 대한 언급은 오늘 본문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사건이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에 오신 것은 오늘 본문이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나인성에 오셔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신 일 외에는 그 성에서 하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에 한 번도 와 보지 않는 그 나인성에 예수님께서는 왜 오셨을까요? 그것도 100리나 되는 먼 길을 하루 종일 걸어서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인성으로 찾아오신 이유가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가 외아들을 잃고 슬픔 가운데 있는 이 과부에게 기쁨과 행복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예수님이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이 성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번 그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군중을 데리고 나인성을 향해서 오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문 입구에 이르렀을 때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행렬과 만난 것입니다. 사탄이 마치 자신의 전리품인양 한 젊은이를 관에 담고는 울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죽음의 사신처럼 의기양양하게 성을 나오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만남이요, 대결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될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주라고 한다면, 이 순간을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피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장례 행렬이 지나가도록 길가에 서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면으로 대결했습니다. 관 뒤에 따라오면서 슬피 울고 있는 과부에게로 주님은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과부를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 과부를 주목하셨습니 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항상 먼저 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버림받은 자들, 실패한 자들,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셨다’는 말이 40여 번 나옵니다. 마9:36절에도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본문에도 13절에 “여인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이처럼 주님의 눈이 가는 곳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에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고통당하는 자를 가장 먼저 주목하시고, 그 아픔에 동참하는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과부가 얼마나 슬퍼할까? 과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을까? 얼마나 자기 팔자를 놓고 탄식하고 있을까?’ 주님은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고, 그 과부의 고통과 아픔에 자기 마음을 함께 담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단순히 한 가정에 벌어진 안타까운 일을 보면서 ‘불쌍하다. 참 안 됐다.’라고 생각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 말은 ‘창자가 뒤틀려진 것 같은 아픔을 느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 뒤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창자가 뒤틀려진 것 같은 아픔을 느끼실 정도로 불쌍한 마음이 들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그 불쌍한 사람을 반드시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도와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장례행렬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메고 가는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에는 뚜껑이 없었습니다. 세마포로 시신을 싸서 뚜껑 없는 관에 넣고 묘지로 옮겨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관을 손을 대셨다는 것은 어쩌면 시신을 직접 만지셨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율법에 의하면 관에 손을 대면 그 사람은 부정해집니다.(민 19:11) 그래서 관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라는 생각 때문에, 관이나 시신을 만지는 것은 곳 죄를 만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시신이나 관에 손을 대는 것이 부정한 일임을 아심에도 그런 부정한 일을 하셨습니까?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 속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슬픔 중에 통곡하고 있는 여인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슬픔이 자신의 슬픔으로 느끼신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여인의 슬픔이 예수님에게도 창자가 뒤틀려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고통 때문에 관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지금 창자가 뒤틀려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신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슬픔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청년아! 일어나라.” 마치 잠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말입니다. 그러자 세마포에 쌓여 관 속에 누워있던 청년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5절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죽었다가 살아난 그 청년이 어머니 품을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난 그 청년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절망에 휩쌓인 과부에게 희망과 미래를 열어 주신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가 아닙니까? 여기 “청년아! 일어나라.”는 이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여기 “일어나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게으른 자여 일어나라." "신앙의 앉은뱅이 된 자여 일어나라.", "좌절과 원망과 낙심과 불평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는 말입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말을 믿는 자마다, 게으름과 절망과 좌절 속에서 질병과 고통 속에서 가난과 슬픔 속에서 모두가 다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왜 일어나라고 하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쓰시기 위해서, 우리를 진실로 하나님의 일꾼 삼으시기 위해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성령 충만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사명자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주는 자로서, 베푸는 자로서, 기도하는 자로서,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일어나야 합니다< /span>. “청년아! 일어나라.” “청년아! 일어나라.” 주님은 오늘 우리 청년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청년들이 꿈도 없고 비전도 없는 공동묘지로 향해 가고 있다면 지금 장례행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행렬을 주님과 함께 가는 희망의 행렬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 ‘청년아!! 일어나라’ 이 말씀은 최고의 은혜의 말씀입니다. 힘의 말씀입니다. 축복의 말씀입니다. "일어나라"는 말은 생명의 역사인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에게 예수님이 “일어나라”하시니 벌떡 살아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욥바의 다비다가 죽었을 때에 "일어나라." 하니 죽은 다비다가 살아서 일어났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병든 자를 치유하고 묶인 자를 자유케 하시는 능력의 말씀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세계적인 투자의 귀재인 짐 로저스가 한국의 청년의 미래를 매우 걱정을 합니다. 똑똑한 청년들이 공시생으로 몰리는 현상은 미래 한국을 몰락하게 만드는 병든 사회의 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보다 창의와 도전을 통해 미래를 열어가야 할 청년들이 이렇게 자기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미래가 없다고 단정을 합니다. 지금 현실이 어렵다고해서 여기에 파묻혀서 사회가 그러니 나라고 별 수 없지 않나하는 현실에 안주하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오늘 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지금의 문제 앞에 비판만하고 그리고 안 된다는 그것 때문에 가진 의욕이 상실되는 자리에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실수하고 넘어졌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진정 부끄러운 일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늘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넘어지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세상을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교역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목사가 있다면 찰스 스펄젼 목사님이십니다. 스펄전 목사 시대에 교회 성도수가 6000명이었습니다. 이 분은 17살 때부터 설교한 사람입니다. 20살에 런던 큰 교회 당회장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예배 중에 어떤 사람이 거짓말로 “불이야” 하고 외쳐대니까 예배드리던 사람들 가운데 몰려나가다가 여러 사람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이일은 스펄전 목사님을 짓누르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우울증에 빠져서 목회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그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저 같은 사람이 ... 내려놓고 시골로 가겠습니다.” 시골로 내려 갑니다. 거기서 수요일이 되자 가까운 교회를 갔는데 젊은 전도사가 설교를 했습니다. 당시 스펄전 목사 설교는 워낙 인기가 있어서 2주만에 인쇄되어 전국에 보급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간 교회에 전도사님이 설교하는데, 설교 내용이 스펄젼 목사님이 하던 설교인데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스펄전 목사님이 들어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젊은 전도사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쩔쩔 매며 설교를 마치고 스펄젼에게 다가와서 “죄송합니다” 손을 붙들고, 사과를 하는데 뜻 밖에도 스펄젼은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합니다” 그 설교를 통해서 침체해 있는 스펄전이 성령의 큰 감동을 받고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참 신비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자기가 한 설교를 남이 전했는데 그 설교 때문에 그는 포기했던 사역을 다시 붙잡고 일어선 것입니다. 그는 런던에 돌아간 것입니다. 본인은 훗날 고백합니다. ‘내가 한 설교 같으나 내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는 다시 일어선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현실입니다. 롬8: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대적하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고발하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을 가지고 훼방하고 유혹하고 넘어지면 박수치고 조롱합니다. 그만두라고 참소하고 훼방을 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세요. 사람을 죽이고 넘어뜨리고 바보로 만드는 세상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현실입니까? 그러나 롬 8:35-37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우리는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져도 하나님은 지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은혜를 의지하고 잠잠히 기다리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은혜의 원천입니다. 우리 속에 보혜사를 보내셔서, 은혜로 주장하십니다.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인성 과부는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습니다.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간 것도 아닙니다. 혈루병을 고침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처럼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 그녀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프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율법을 어겨가면서 관을 손을 대시고 청년을 살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너무 힘들어 울 힘조차 없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때로는 너무 힘겨워 주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지쳐 있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제 그 은혜의 손을 붙잡고 일어납시다. 청년이여!! 성도 여러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이 세월호를 다룬 PD 수첩에서 세월호 문제를 다루는 제목이 ‘101분’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이 101분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1시간 41분이라는 말입니다. 전문가들이 시뮬레이션을 해보니까 당시 배 안에서 가장 멀리 있는 곳에서 밖으로 나와 퇴선 준비하는 완료하는 시간이 4분 17초 정도라고 합니다. 4분 17초, 4분 17초면 아이들을 다 건질 수가 있는데 1시간41분 동안 우왕좌왕하다가 이 사건으로 304명이 희생을 했는데 그중에서 250명이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깊은 바다에 빠졌습니다. 당시 배안에 갇혀 마지막 죽어가는 한 남 학생의 절규가 이 성년의 날에 우리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듭니다.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살고 싶은데/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지금 무서워 울고 싶어요. ” 지금 그 아이들이 살았으면 만 19세 성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성년의 날을 맞아 가족과 사회가 기뻐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은 안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배안에 선원들 이 자신들의 사명을 가지고 일어났더라면 일어났더라면, 이런 참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경비정이나 큰배가 그 현장의 위기감을 깊이 인식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이런 아픔이 일어났겠습니까?
오늘 타성과 게으름과 주저 낮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청년아!! 일어나라라고 외치던 그 음성이 이 아침 우리에게도 뜨겁게 와 닿아야 합니다. 지금 어느 누구 예외없이 다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의 장애물을 건너지 못하는 인생이 있다면 이제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어려움이 있고, 또 뜻하지 않는 문제가 있을찌라도 그 문제에 눌리지 말고 그 문제를 타고 오늘 수 있는 강한 믿음의 날개를 달고 일어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