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가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지 48년째 되는 주일입니다. 50여년이 가깝다는 것은 참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인생 주기에 있어서 신체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두 번 찾아옵니다. 사춘기와 갱년기입니다. 사춘기란 한 마디로 청소년들이 신체적으로 성숙해 지면서 2세를 생산할 준비를 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지면서 신체 전반에 활력이 넘치고 정말 건강한 시기입니다. 반면에 갱년기란 대개 45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여성의 경우 난소에서 생성되는 호르몬 감소로 폐경을 맞게 되는 시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2세를 생산할 수 없게 되는 시기를 말합니다. 이 때부터 피부에 변화가 오고, 골다공증도 심화되고 심장도 예전같지 않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신체적인 건강이 현격히 약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건강도 출산과 맞물려 큰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를 출산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 출산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건강합니다. 그러나 출산이 멈춘 사람들 출산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신체적으로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주를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또 여러 해가 가도록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교회는 건강하지 못한 교회입니다. 교인이 늘어도 다른 교회 다니던 사람이 이사해서 등록하는 일뿐이라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가 지난주에 부터 전개하기 시작한 태신자 전도 운동에 250여명의 태신자들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믿지 않던 분들이 새로이 예수를 믿게 되는 역사가 아름답게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고자하는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받을 때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까? 행11:19절에 보면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세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며, 사랑이 충만하여 유무상통한 교회였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동반하는 그런 권세와 능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한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핍박이 있고 환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납득이 가지를 않는 이야기입니다. 뭐, 분쟁이 많고 타락된 교회라면 핍박이 있어도 당연합니다만 초대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할 일을 안 하는 교회, 말만 하는 교회라면 또 한번 핍박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 핍박이란 사건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형제가 끌려나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사도들이 나가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쓰러지며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옵니다. 자! 이제는 다시 잡히면 죽을 처지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지게 됩니다. 집을 두고 목적지도 없이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피난이 아니라 도망입니다. 도망자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이유가 아닌, 오직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는 그 한 가지의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당하며 죽어야 했고, 쫓겨다니는 도망자로 방랑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본의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저 예루살렘 초대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를 믿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 부득불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원치 않는 곳, 원치 않는 남의 나라 땅에서 유리방황하며 쫓기는 흩어진 자가 된 것입니다.
이 흩어진 자들이 피하여 들어온 지역이 바로 안디옥입니다. 당시에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서 세계에서 세 번째 큰 도시입니다. 지중해 해변에 위치해 있는 무척 아름다운 도시였고, 천연요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경제가치가 있는 도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내에는 항상 군인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군사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우상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안디옥은 문명은 발달했지만, 타락하고 방종과 사치가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이처럼 화려하고 엄청난 세속의 도시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 핍박 성도들의 모습은 너무 대조적이 아닙니까? 자의가 아닌 핍박으로 너무도 많은 것을 잃은 그들이 이제 가까스로 모이긴 했지만, 자기 앞가림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물꼬를 트는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떻게 세상 앞에 타협하지도 굴복하지도 않고 오히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세워질 수가 있었습니까? 이제 우리 교회는 다음 주일이면 오늘 창립 48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소망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면 좋을까? 아마 동성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은 어느 누구 예외없이 여기에 대한 기대감이 있을 것입니다. 이 안디옥 교회가 우리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것은
첫째로,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21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상반절에서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여기에서 말하는 ‘주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구약적 표현인데, 신약에 와서는 ‘성령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주의 손, 즉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자 안디옥에 있던 수다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에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손은 엄청난 능력입니다. 주님의 손이 임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면 우리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관건은 우리의 순종과 하나님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붙잡아 줘야 우리가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붙잡아 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홍해 바다앞에서 모세가 들었던 막대기는 시내산 자락에서 자란 작은 가시나무였습니다. 그 보잘 것 없는 나무가 홍해를 가로지른 것은 그 막대기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벳새다 들녘에서 남자만 5천명을 먹였던 오병이어는 보잘 것 없는 한 소년의 점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 손에 붙잡혔을 때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를 남겼습니다. 우리 인생은 다른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손에 붙들렸느냐, 주님의 손에 붙들리지 않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손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손이기 때문입니다. 사59:1절을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손은 결코 짧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하지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줄로 믿습니다.
시편 89편 13절에서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 손은 높으시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손은 축복의 손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손이이요, 세상의 그 어떠한 손과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의 손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안디옥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능력의 손이 함께 하는 교회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함께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손이,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이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비젼을 볼 줄 아는 교회입니다.
23절에 보면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하니” 여기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고 말씀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루살렘에 있던 바나바가 핍박을 피해 나온 성도들이 안디옥에서 교회를 세워 섬기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모두가 자기하나 지탱하는 것도 힘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환란 중에 도망 나온 저들의 삶 속에 결코 환경이나 지금의 상황에 주저앉거나 체념한 사람이 없이 희망이 넘쳐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가문에서 배척당했고, 동족들로부터 멸시 당했고, 직업을 버려야 했고, 정든 고향과 조국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다고 말 한 마디 하면 이런 어려운 일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재산 빼앗기도 않아도 되고요. 정든 고향 떠나지 않아도 되고요. 그러나 저들은 자기 살기 위해 예수 팔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 포기하고 예수 붙잡았습니다. 자기 몸을 밀착시켜 예수를 바짝 따라갔습니다. 고난과 박해 앞에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이를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 속에 용광로의 불처럼 타오르는 비전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세상 앞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저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꿈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잠 29:18의 말씀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이 곧 비전이요, 꿈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꿈이 없으면 인간이 경고 망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전이란, 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꿈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꿈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은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비전이 없으면 목회자이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비전을 가졌다, 가지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48주년을 맞이하면서 어떤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어떤 값을 치루고 있습니까?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던 헬렌 켈러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때 헬렌 켈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꿈이 없이, 비전이 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맹자의 제자가 관리로 등용되게 되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맹자에게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이 제자가 관리로 등용된 것을 기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관리로 추천하셨습니까? 그에게 덕망이 있습니까?” “아니다” “그러면 그에게 통솔력이 있습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놀라운 지식이 있습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왜 추천하셨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미래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나안 땅을 12명이 보고 왔습니다. 10명은 그 땅의 현실만을 이야기했고 2명은 그 땅의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현실을 이야기했던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며 그 땅에서 죽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바라보고 찬양했던 그들은 광야의 길을 가면서도 희망을 노래했고 어려운 문제 앞에서 낙담하지 않고 이겨나갈 수 있는 꿈을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바로 이 안디옥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6에 보시면 이들을 안디옥에 사는 사람들이 무엇이라 불렀습니까?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또는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었는지 하는 것은 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았다’는 사실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 안디옥 시민들은 당시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이런 그리스도의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부른 것입니다. 불과 1년 밖에 안된 이들이 이런 변화의 흔적을 드러낸 것입니다. 목회 하면서 저에게 늘 신비롭고 경이롭게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예수 믿고 교회 나온지 수십년이 된 분들 중에도 전혀 예수 냄새가 안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안디옥 교인들처럼 교회 나온지 1년밖에 안되었어도 그리스도의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늘 이웃을 어떻게 섬기고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전에는 이 세상이 얼마나 썩었고, 얼마나 어두운가를 잘 몰랐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앞으로 조금씩 다가가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영적으로 썩어 냄새나는 곳인가, 또 얼마나 캄캄하고 어두운 곳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눈에 그렇다면 예수님의 눈에는 오죽하겠습니까? 캄캄한 세상을 앞에 놓고, 또 썩어 냄새나는 세상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 여기에 너희라는 말은 굉장한 강조형입니다.
이 말은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아무리 세상이 썩고 어두워도 나는 너희만을 믿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만 믿어.” 하는 의미가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살라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우리 동성교회는 세상 앞에 어떤 존재들입니까?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어야 합니까?
요즈음 들어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현실도피’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할까요? 아마도 현실의 문제를 타파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동아대 인문과학대학 학장인 박은경 교수는 국제신문 칼럼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근래 '응답하라' 시리즈와 외딴 섬에서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예능프로그램이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두 프로그램이 공통으로 현실도피라는 코드와 맞물린다는 생각에 팍팍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듯해 애처롭다. … 희망마저 보이지 않을 때는 비현실적인 대안으로 과거로의 회귀를 꿈꾼다. … 그러나 응답할리 없는 과거에 대고 응답하라는 외침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지배했던 시대에 대한 동경으로 읽힌다.’ 희망을 잃었다는 것은 끊임없이 삶에서 느끼는 ‘부족감’ 그리고 ‘절망감’ 같은 것이 아닙니까? 이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이 일에 우리가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변화의 역사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보고 낙심만 하지 하십시오. 불평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바로 되면 세상이 바뀝니다. 우리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은 바뀝니다. 진짜 예수를 만난 변화를 우리가 세상에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세상은 바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디옥 교회처럼 주님의 꿈을 꾸십시다. 우리는 정말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란의 한 복판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믿음으로 나갔던 안디옥 교회는 자신의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 복음의 물고를 열어가는 엄청난 일을 감당합니다. 좋은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프로그램이 나 전략이 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엔 성령의 불길이 타 오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교회적으로 성령 강림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 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그,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거룩한 삶이 우리 동성의 모든 식구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지역과 민족과 세상을 바꾸는 교회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