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눈으로 볼 때 ‘참 저 교회는 본받고 싶은 교회다’하는 부러운 교회들이 있습니다. 교인 수가 많고, 교회당 건물을 잘 지었다고 하는 것 때문에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 교회는 정말 교회다운 교회이구나’ 하는 것 때문에 부러운 교회가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교회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오는 ‘안디옥교회’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에 참으로 중요한 역사적인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을 감당하도록 우리 동성교회를 세워주신 지 48년째 되는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참으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쌓여 건물이 지어듯이 48년의 세월이 의미 없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48년 역사의 정점에 서서 우리 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는 지나간 4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라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한 두 사람이 온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한 지역 교회가 온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다 같이 우리가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도행전 11장 19절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에 살던 성도들이 스데반의 순교 뒤에 큰 핍박이 일어나자 핍박을 견디지 못해 고향산천을 떠나 여러 곳으로 피난길에 나서게 됩니다. 그 피난길을 나섰던 사람들 중 일부가 안디옥이란 지역에 살게 되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첫째 하나에로의 소망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이 교회의 구성원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먼저 이 교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박해를 피해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아직 이 지방에서 사회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낯선 곳에서 사람들과 생존경쟁의 문제로 날마다 부딪히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유가 없는 생활을 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교회에서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바나바에서부터 젊은 사람 사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했습니다. 또 바나바는 귀족출신으로 땅을 기증할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마나엔이라는 사람은 당시 예루살렘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헤롯왕의 젖을 같이 먹고 자란 동생입니다. 또 니게르라는 시므온이 나오는데 이 니게르라는 말에서 Negro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즉 흑인이라는 것입니다. 또 구레네 사람 루기오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도 흑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레네가 북아프리카지역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라는 곳에서 출생한 유대인입니다. 그는 당시에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 우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수재 중의 수재였습니다. 이처럼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핍박 가운데 세워진 이 교회가 이방 선교의 물꼬를 트고 이처럼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정말 근사하게 하나로 뭉쳐서 나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는 그들 속에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전을 가졌기 때문임을 보게 됩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1장 5절 하반 절부터 6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기서 교회는 네 가지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1)교회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입니다.
2)주님이 죄에서 구속해준 우리입니다.
3)하나님을 위해 그의 나라와 백성으로 삼으신 우리입니다.
4)하나님을 위해 그의 제사장으로 삼으신 우리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공급을 받은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십자가너머 부활의 영광이 있듯이 절망너머에 꿈틀거리는 희망의 아지랑이를 봅니다. 안디옥 성도들도 절망가운데 모인 사람들이지만, 걱정과 한숨과 근심거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주역들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이들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은혜의 끈을 붙들고 당당하게 나아갑니다. 여러분!! 절망의 눈빛과 희망의 눈빛은 다릅니다. 절망의 눈빛은 대담한 목표를 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눈빛은 대담한 목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헌신 속에 자신을 던지게 됩니다. 비전은 비전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완벽하게 준비되어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낙심 중에, 절망 중에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가 사는 지금의 상황은 정말 예전 같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동성 교회에 부임했을 때, 어느 장로님의 기도 제목이 기억이 납니다. 여기 찬양대에 3대가 함께 찬양하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정말 3대가 하나로 모여 같은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한 가정에서 3대가 모여 찬양한다는 것은 얼마나 보람이 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요즘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사회학자들의 이야기는 "1인 가구는 우리 모두의 미래"라는 진단을 합니다. 가족 붕괴, 가족 해체 현상이 보편화 된다는 것입니다. 2015년 인구주택 총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1인 가구는 전체의 27.2%인 520만3000가구입니다. 1970년와 비교하면 10배로 늘었습니다. 20-30대에서는 미혼과 만혼(晩婚), 그리고 40대 이후로는 이혼과 고령화 등으로 1인 가구가 빠르게 늘어가는 한국 사회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요즘 '혼밥' '혼술' '혼영(나 홀로 영화)' '혼행(나 홀로 여행)' 같은 새로운 형태의 모습이 우리 일상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이 세대는 지독한 개인주의와 고독한 삶을 어떻게 극복하고 그들과 더불어,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전도가 어려운 시대 앞에 현실에 메이지 않고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시대를 품고 나아가는 소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의 여건도 자립할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았지만, 전혀 다른 배경 속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이방 선교에 물꼬를 튼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 안디옥 교회가 세상 앞에 희망을 줄 수가 있었습니까?
둘째로 이 일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들에게 예배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여기 2절에 보면 이들의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상반 절에 ‘주를 섬겨’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 섬긴다는 말은 본래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표준 새 번역은 이 부분을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 할 때에”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예배하면 예배했지 왜 금식까지 했을까요? 금식하면서 예배했다는 의미는 음식을 포기할 정도로 하나님 뜻에 합당한 인생을 살기 위해 생명을 다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여러분 가운데 정말 갈급한 심정을 가지고 온 맘 다해 온 정성을 모두워 이 예배를 섬기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 신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가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하여 내 삶 전체를 몽땅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월트 디즈니가 왜 성공한 줄 아십니까? 백설공주를 그린 만화가 중의 한 사람 월트 킴볼은 일곱 난장이가 백설 공주를 위해 스프를 끓여주려다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약 4분 30초짜리 우스운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월트 디즈니는 장면을 완성시키기 위해 무려 240일을 작업했고, 아무리 재미있어도 본 목적과 흐름에 맞지 않을 때는 과감하게 장면을 삭제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월트 디즈니 만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이유입니다. 자기 작품에 인생을 걸었기에 그런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 뜻에 맞추기 위해 몸부림 쳤습니다. 크고 작은 유혹이 왔을 것입니다. 낯선 곳에 정착해서 먹고 사는 문제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어려운 문제들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사람들이 속한 일터에서 그들의 동료들에 비친 모습은 예수 믿는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 손해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희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삶의 현장에서 안 믿는 사람이 ‘저 사람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라 인정 받기는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 사람으로서 그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시절에도 주일날이 되면 워싱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조지아 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늘 자기가 맡았던 주일학교 한 반을 맡아서 공부를 가르치고 예배를 드린 다음 다시 워싱톤으로 가서 직무를 감당합니다. 지금도 조지아 주의 교회에서 그일을 감당합니다. 이것은 지미 카터의 모습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다가도 주일이 되면 예배당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모든 계획 중심에 예배가 들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 삶에 예배가 중심되지 못한 삶은 어떻습니까? 휘청합니다. 낚시 가자고 그러면 낚시 가고 등산가자고 그러면 등산 가고 골프치러 가자고 하면 골프부터 먼저 칩니다. 예배가 삶의 중심이 아니라 예배는 악세사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전혀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능력있는 손에 붙들려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휘청거리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배는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생명선입니다. 예배를 떠나면 생명줄이 막히기 때문에 실패하고 신음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날마다 영혼이 시들어 갑니다.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 죽어가는 꽃처럼 시들어 갑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도 짜증날 정도로 삶이 흐트러져 버립니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예배에 승리하는 사람들, 주님 전에 나올 때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왔으나 하나님이 맡아주는 통쾌함을 경험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아픈 상처를 가지고 왔으나 피묻은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쓰다듬어 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어루만짐 당하고 붙들림 당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싱싱하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셋째로 안다옥 교회를 묵상하며 정말 놀라운 것을 하나 보게 됩니다. 그들은 주의 말씀 앞에 절대 순종과 헌신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2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 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여기에서 ‘따로 세우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안디옥 교회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의 주축이 되고 있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리더를 선교사로 파송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회를 잘하고 있는 담임 목사와 그리고 함께 동역하여 안디옥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간 두 지도자를 선교사로 보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제 좀 교회가 부흥되고 안정되어 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갑자기 교회의 핵심인물인 바나바와 바울을 달라는 이 음성 앞에 하나님께서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겨우 교회가 안정되어 가는 순간인데, 선교를 하라니 너무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는 헌신을 요청한 성령님의 요구에 순종했습니다. 비록 자기들의 교회도 할 일이 많아 일꾼이 많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복음을 위한 순종은 때로는 우리에게 감당하기 힘든 희생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역사에 희생의 대가 없이 이루어진 일이란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그들 중에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세계 선교를 위해 열방으로 파송했고 그들 특히 바울은 당시의 알려진 세상(오늘의 터키, 그리스와 로마를 포함한 유럽대륙)을 세 차례 이상 여행하여 세계 도처에 교회를 개척했고 그리고 1세기의 세상은 복음을 통해 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질문은 남습니다. 과연 그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대답은 결코 ‘아니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답은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주님, 성령의 역사가 그들과 함께 하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이 원하신다면 여러분과 저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 오늘의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다고 믿으십니까? 저는 오늘 한 두 사람으로 인하여 세상이 바뀔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저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 하시면 세상은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동안 우리 교회를 주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 앞에 선 우리들 속에 전도와 선교에 대한 부담은 사라지고, 우리끼리 교회 나와서 위로 받는 데에 만족하여 돌아간다면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계획하시는 역사 무대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처럼 주님 꿈을 꾸십시다.
며칠 전 신문에는 최근의 난지도가 생태계의 보물로 변한 모습을 보도하였습니다.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가 월드컵공원으로 바뀐 지 올해로 16년이 됩니다. 과거 쓰레기 9천200만 톤이 묻힌 난지도로 유명했던 이곳은 이제 주말이면 산책을 즐기는 가족과 연인으로 가득합니다. 가보신 분은 알겠지만,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억새밭으로 대표되는 서울 월드컵공원을 걷다보면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 등이 서식하고 특히 희귀한 황조롱이, 말똥가리, 오색딱따구리, 두꺼비, 족제비, 고슴도치, 고라니 등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최근엔 멸종위기종인 맹꽁이 울음소리마저 들을 수 있게 됐습니다. 도심 개발로 서식지가 사라져갔던 맹꽁이들이 월드컵공원 인공습지에서 집단 서식하는 게 확인된 겁니다.
쓰레기장이었고 더럽고 냄새를 풍기는 곳이었지만 잘 가꾸니까 난지도는 동식물의 천국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아야합니다. 우리 동성교회만 오면 누구든지 은혜를 받고 잃었던 사명을 회복하는 이런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난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고독과 좌절과 실망에 빠져 좌절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혀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나면 그들의 고독과 외로움은 치유가 됩니다. 신앙의 방황도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좋은 교회를 만나면 그곳에 내 영혼의 닻을 내리고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감격 있는 예배를 드리게 되고, 말씀을 들으며 심령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한번 태어나 행복도 맛보고, 고생도 맛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개인의 행복과 인생의 의미가 어떤 교회를 다니느냐에 의해 상당부분 좌우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 은혜를 받았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삶의 의미를 발견했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뒤돌아보아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48년의 역사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48년의 시간들 속에서 우리 교회를 이만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넓게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교회 그리고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 더 나아가 말씀 앞에 순종이 생활화 되는 교회로 섬겨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꼭 필요한 교회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더욱 부흥시켜 주실 것이고, 우리와 우리 가정에도 필요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건강과 물질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