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수백 명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영적인 자산과 우리에게 도전을 줄만한 여러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다윗은 특별히 우리에게 도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죽 읽다가 이 본문 말씀에 오면 잠깐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았습니다. 그 말은 다윗을 처음 보았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한참 다윗을 겪어 본 다음 다윗을 평가하는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21절에 보시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가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 여기에서 ‘만나다’로 번역된 ‘휴리스코’는 ‘관찰하여 발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보석 감정사가 수많은 원석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다가 진짜 값비싼 보석을 발견해 내듯이,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윗을 찾아내셨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리켜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마음이 맞는다',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듯이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잘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하여 그와 같은 마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이 어떠한 사람이길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부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영웅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그가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어 나라를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인물이 아닙니까? 밧세바와의 불륜으로, 정말 하나님 앞에 불충한 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도 인간관계에서 느껴서 아시지만, 직장 생활이라든지, 회사에 다니면서 상관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일하는데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니 너무나 부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루려 하신 뜻이 무엇이었는지는 본문 23절이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뜻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그 뜻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족보를 통해 이 땅에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다윗은 그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두 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한 나라의 첫 번째 왕이 된다는 것은 더더욱 예사로운 일일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에 왕은 여러 명 등장할 수 있지만, 그 나라의 첫 번째 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단 한명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역사상 단 한명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투표로 선출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제비뽑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첫 번째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면, 사울은 하나님의 특벽한 은총을 입은 사람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우신 지 40년만에 그를 폐하시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 다윗 역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었습니다. 여기 사울이 어리석은 조상을 대변한다면, 다윗은 지혜로운 조상의 표상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 2절은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첫 번째 왕으로 세움 받았던 사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컷더라.’ 우리말 ‘소년’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흐르’는 ‘청년’을 일컫는 단어이고, ‘준수하다’라고 번역된 ‘토브’는 ‘선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혜성처럼 등장한 청년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준수한 외모를 지녔을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제비뽑기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뽑히는 현장에서 사람들은 사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사울이 짐짝 사이에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년 사울은 그 정도로 겸손하기도 했습니다. 왕이 된 사울은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왕국에 필요한 제도를 신설하는 등, 초대 왕으로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가 왕좌에 앉아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도 자신의 왕좌와 자신의 권력을 더 신봉했습니다. 그 왕좌와 권력을 주신 하나님을 망각한채 하나님께서 주신 왕좌와 권력을 우상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도 끔찍했습니다. 말년의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세 아들마저 목숨을 잃었고, 사울 왕 자신도 추격자의 화살에 중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군에 생포될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일국의 왕이 적국에 포로로 잡히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 중상을 입은 사울 왕은 무기를 들고 자신을 호위하던 군사에게 자신의 목을 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 군사는 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면서도 감히 두려워 왕의 목을 치지 못했습니다. 다급해진 사울 왕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칼을 뽑아 그 위에 엎드러져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무기를 들고 사울 왕을 호위하던 군사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상 31장 6절은 그날의 그 처참한 광경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날에 함께 죽었더라.”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낮았던 사울의 인생은 자신이 믿었던 군대, 사랑하던 세 아들, 그리고 자신을 호위하던 군사와 함께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그의 왕궁 또한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죽음을 모면한 사울의 자식과 후손도 불행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만약 사울이 지혜로운 왕이었던들 그의 왕위는 그의 자식과 후손에게 계승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스스로 차버린 사울은 가장 미련한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인간적인 측면에서 사울보다 나을 것도 없었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다윗이 사울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악랄했습니다. 왕좌에 앉은 다윗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다윗이 범한 밧세바가 임신하자, 다윗은 참전 중인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예루살렘으로 소환하였습니다. 우리아로 하여금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여, 밧세바의 배속에 잉태된 아이가 우리아의 아이인 것처럼 위장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편안하게 귀가할 수 없다는 우리아의 충성심으로 다윗의 계획이 무산되자, 다윗은 우리아를 다시 전장으로 보내어 자신의 심복 요압에게 우리아를 죽음에 빠뜨리도록 교사하였습니다. 자신의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우리아를 교모하게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과부가 된 밧세바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아예 자신의 아내로 삼아 버렸습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패역무도한 살인강도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 아버지를 보고 자란 다윗의 자식들 역시 가관이었습니다. 장남 암논이 자신의 이복누이 다말을 강간했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기회를 엿보다가 이복형 암논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 압살롬은 내친김에 아버지 다윗을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놀란 다윗은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채 측근들만 거느리고 황급하게 왕궁을 빠져나갔고, 왕궁을 접수한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이 두고 간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했습니다. 아버지의 후궁들이라면 압살롬에게는 어머니뻘이었지만, 패역한 압살롬은 그러한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압살롬은 재집결한 아버지 다윗의 군대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의 군대가 아버지를 몰아내었고, 아버지의 군대가 아들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다윗의 집안은 콩가루 집안이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다윗이 사울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을 것딘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사울과는 달리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 그의 왕국은 그의 자식과 후손에게 계승되었을뿐 아니라, 다윗 자신은 족보상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까지 얻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다윗이 한때 패역 부도한 살인강도였을망정, 그 이후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되돌아간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나의 믿음을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믿음이 시간이 감에 따라 자라지 않으면 헛 믿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믿음이 자라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겨주는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어떻게 하면 심겨집니까? 로마서 10장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왜 교회가 자나깨나 밤낮 말씀, 말씀 하는지 아십니까? 믿음이 심겨지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 붙들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언제 믿음이 자랍니까? 하나님 말씀 듣고 순종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목회입니까?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 심고 그 말씀이 열매를 거두어서 순종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목회의 가장 큰 핵심이 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믿음을 되찾고 끝내 믿음을 지킨 다윗, 그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이 연단의 과정 속에서 늘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그 속에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다윗이 허물투성이의 삶이 있었더래도 축복을 받은 것은 누구를 바라보았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항상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아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의 시각은 항상 긍정적인 시각으로 열려 있습니다.
일반 음식점 이름이 ‘Only Jesus‘(오직 예수)라는 곳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식당에 성경구절들이 걸려있고, 찬송이 흘러나온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젊음의 거리 홍대 앞에서 성업 중인 연어전문점 [Only Jesus] 이야기입니다. 이 식당은 신효철 집사라는 젊은 기독사업가가 2015년 6월에 오픈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인천 송도점을 비롯해 7곳에 분점을 내어 성업 중입니다. 또한 미국과 일본에도 곧 분점을 오픈한다고 합니다. 이 분은 판자촌 5평집에 여섯 식구가 살아야 할 정도로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습니다. 음식점 서빙과 찹쌀떡 장사, 막노동, 룸살롱 웨이터까지. 그러나 예수를 만난 뒤 이분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술과 담배를 끊고, 오직 예수만 의지하면서 성실하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프랜차이즈 횟집을 시작했는데 한 해 매출 200억 원을 돌파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답니다. 내친김에 연어전문점을 � �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더욱 철저하게 예수만 의지하고 사업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only Jesus]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기 힘들고, 또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살겠다는 결단이 소중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드러내며 살고자 하는 용기가 대단해 보입니다. 사실 손님 중에 종교편향이라고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아예 손가락질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문 닫기는커녕 지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여호와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왕 예수를 믿고 살 때,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그와 함께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어떤 큰일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위기에도, 절박함에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아니 세상에 어둠이 점점 더 깊어질수록 하나님께서는 그 어둠을 밝힐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을 다윗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열심 앞에 선 그의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다윗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울의 핍박을 피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그를 따라왔던 사람들이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정말 변화 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삼삼20:절에 보면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사람은 모였는데 참 답답하지 않습니까? 뭐, 좀 멋진 사람들이 와도 힘든 판국에 자기에게로 몰려온 사람들은 오히려 다윗을 위로해 주기보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버림받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보십시오. 이들에게 무슨 희망을 노래하고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이 400명의 사람들이 사울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다윗 왕조를 창출해낸 주동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지 정권 창출의 세력 만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야가 오실 다윗 왕조의 나라를 건강한 정치와 경제, 사회가 되도록 이끌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많은 엘리트들이 압살롬에게 합류할 때에도 끝까지 다윗 왕조를 지키고 다시 회복시키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오합지졸의 400명이 어떻게 정권을 창출하고 다스리고, 위기가 올 때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둘람 굴에 모인 이들이 다윗과 더불어 무엇을 하였을까요? 그들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는 순종의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곳 절망과 한숨의 자리에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당시의 상황이 시편 57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57:7-8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할렐루야!
이것이 아둘람의 비밀입니다. 다윗은 아둘람에서 꿈을 키웠습니다. 믿음의 용량을 키워간 것입니다. 어둡고 고독한 굴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절망너머에 꿈틀거리는 희망의 아지랑이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절망가운데 모인 사람들이 걱정과 한숨과 근심거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주역들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빚을 지고 쫓겨다니며,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오합지졸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결코 자신의 삶을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그 절망의 터널을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다윗 한사람의 변화가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결코 인생을 허투루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며 죽으셨다는 것을 알진대, 어찌 그 은혜를 망각한 채 헛된 것을 추구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나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알진대, 어찌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와 손잡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결코 거짓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아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합한 자를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펼치십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순간에 처하더라도 그 순간에도 여전히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그분의 음성이 우리의 능력이 됩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바로 나의 모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