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바와 같이 67년 전 군인과 민간을 합해서 600만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내었던 악몽 같은 6.25가 발발한 날입니다. 그 날도 주일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6월이 되면 우리는 마음 한 구석에 슬픔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6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6.25 동란으로 인한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보세요. 67년 전 주일 새벽에... 지축을 흔드는 대포 소리로 시작된 전쟁은 이 한반도를 피로 물들이며 자그마치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 강산에 떨어진 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유럽 전 지역에 투하된 폭탄보다 더 많은 양의 폭탄이 퍼부어져서 한반도는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 예배드리는 우리 가운데 그 전쟁의 고통을 몸소 겪은 분도 계시지만, 대다수는 그 아픔과 상처를 보지 못한 전후 세대가 많습니다. 세월은 이렇게 흘러갔지만, 전쟁의 상처가 정말 깊이 패인 채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의 아픔을 겪는 나라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도 당시 망해가는 조국 이스라엘과 수도 예루살렘의 내일을 예견하고 탄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그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자신의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으로 자기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67번째 맞는 6.25 전쟁을 바라보면 아직도 계속 되는 이 남북의 문제를 위해 오늘 우리는 구체적으로 민족을 위해 어떤 자세와 또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입니까?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민족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1. 이 민족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37절을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오실 메시아를 영접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오실 메시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민족이 된다면 그 자체가 민족의 번영을 약속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드리는 일에 무관심내지는 적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민족의 위기인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자신의 날개아래 품듯 자기 민족을 품고자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는 것은 본능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기 민족이 정치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위기에 처한 것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 시키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고, 그들을 살리려 애를 썼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38에서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가 되리라”고 예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태 24장 2절에서는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역사 속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AD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문자 그대로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 때 약 110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수십 만 명이 노예로 로마로 끌려가는 비극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미리 아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우신 것입니다. 이때 뜻있는 유대인 애국자들의 한 무리 어린아이들까지 약967명은 예루살렘 남쪽 사해 서쪽 약 4km지점에 위치한 헤롯의 천연 요새 산성 맛사다(해발 450m)로 도피하여 로마인들과 최후의 항전을 계속하다가 3년 만에 실바 장군이 이끄는 10군단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자 로마의 노예가 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기로 결의합니다. 2명의 여인과 5명의 아이들을 제외하고 맛사다의 언덕에 올랐던 전원이 장렬한 자결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비극의 현장에서 지금도 이스라엘 군인들이 임관할 때 이 언덕에 올라 “우리는 다시 함락되지 않으리라” “다시는 맛사다의 비극이 없기를”하고 외치며 충성을 맹세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과 맛사다 못지않은 비극의 현장이 바로 한반도이었음을 젊은 세대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작은 두 동강난 한반도 땅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자유로운 국가로서의 민족적 생존이 가능하기 위해 희생된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사망자가 모두 62만 8833명, 미군 사망자만 5만 4246명(지금까지 이라크전 미군 사망자가 약3천명), 부상자는 미군만 10만 3284명, 유엔군 전체는 106만 4453명, 미군 실종자만 8177명, 유엔군 실종자는 47만 267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이 전 쟁에서 아이젠하우어 대통령도 아들을 잃었고 벤프리트 장군도 아들을 잃었으며,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도 아들을 잃었고, 워커 중장은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24사단 딘 소장은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날 그릇된 이념적 영향을 받은 이 땅의 젊은이들 가운데 종종 북침설을 믿고 있는 전후세대들이 있습니다만, 만일 6.25전쟁이 남에서 먼저 준비되고 의도된 북침이었다면 6.25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40일 만인 7월말까지는 낙동강 하류의 부산만이 남게 되는 일방적 전쟁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남한에 50만과 북한의 3백만의 민간인 사망자를 합치면 6백만 명의 피가 이 땅에 쏟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3백만의 피난민과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겨났습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전쟁의 아픔이었습니다. 더구나 같은 동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맞대었습니다. 형제와 형제가,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서로 총을 겨누고 쏘았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6.25 전쟁은 우리 대한민국 백성이라면 그 누구도 잊어서도 안 되고 꼭 기억을 해야 할 너무도 중요한 이 나라의 아픔의 역사입니다. 이런 전쟁의 비극을 기억하는 우리라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는 미래의 조국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부산까지 피난 간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교회에 기도를 요청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 대표들이여, 이 주간이 우리 민족의 생사가 결정되는 중요한 주간입니다. 모든 교회는 기도하십시오.” 당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유엔에서 처음으로 유엔군 파견 문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결정을 하는 주간입니다. 그래서 부산의 모든 교회가 꿇어 엎드려 아침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모든 교회 대표들이 부산의 한 교회에 모여 목을 놓고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UN에서는 한국 참전 결정을 위한 총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전 참전 안이 모두 통과되어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의 결정만 남겨두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사국 다섯 나라 가운데 한 나라라도 거부하면 모든 결정이 다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는 문제가 없는데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뻔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소련 외상이 UN 총회에 참석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상임이사국 결정을 하는 마지막 회의에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UN 참전 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왜 그가 참석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막으셔서 거부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이제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 민족이 하� ご�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대하 7:14절에서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살길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고 하였습니다. 이제 이 민족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자유롭고도 안전한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우리의 다음 세대에 다시는 전쟁이 발발하는 아픔을 물려 주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북한은 핵을 가지고 우리의 체재에 큰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역대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남북의 화해를 얼마나 기대했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주변 정세와 맞물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국가의 존립 가운데 자유와 안전이라는 두개의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아십니까? 자유한데 안전하지 못하다면 그 자유 자체가 불안한 자유일 수 밖에 없고, 안전은 한데 자유하지 못하다면 그 안전은 비굴한 생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조국이 자유롭고 안전한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인 다음 세대들이 그런 건강하고 행복한 나라에서 살아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는 재기 불능의 평가를 받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로 주저앉지를 않았습니다. 모든 강토가 폐허화 된 상황에서 이 민족은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떻해 보면 6.25는 비극이었습니만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의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이후 한국 교회가 본격적으로 부흥을 경험하게 된 것이 6.25직후였기 때문입니다.
1950. 6.25가 발발하던 그 날 주일 저녁 한국 교회가 존경하는 영락 교회 한 경직 목사님은 매우 예언적인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떠한 불행이라도 의로운 사람에게는 그것이 행복으로 바뀌도록 하십니다. 지금 38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행도 우리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더 큰 영광의 결과가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할 때일수록 우리가 더욱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6.25의 불행 속에서 한 목사님의 말씀처럼 주님을 붙들었고 우리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전쟁이 끝난 우리나라는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중에 필리핀의 국민 소득이 170달러 태국 220달러일 때 한국은 76달러였습니다. 우리보다 국민 소득이 낮은 나라는 인도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후진 국가였던 것입니다. 국가 경제를 재건하는데 많은 비용이 필요했지만 한국에 돈을 빌려주려는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결국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고 일억 사천만 마르크를 빌리게 되었습니다. 서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데 46,000명이나 몰렸습니다. 자격요건은 고졸 출신이었으나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습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 까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일부러 거친 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억 만리타국 땅 서독에 도착한 광부들은 지하 1000m이상의 깊은 땅속에서 열 시간이 넘는 고된 작업을 했습니다. 나이 어린 간호사들 또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외딴 지역 병원들에 뿔뿔이 흩어 진채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들의 그 수고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담보로 월남에서 싸운 용사들 - 월남전에서 5000명이 넘는 사망자와 10000명이 넘는 부상자, 그리고 고엽제 환자가 70000명이 넘는 그 댓가로 10억 달라를 벌었습니다. 이 돈은 그 당시 국가 1년 예산에 10%를 충당하는 엄청난 돈입니다. 뜨거운 중동지역에서 수고한 산업 역군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민족이 세계로 발돋움 할 수 있었습니다. 보다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과거의 고통을 즐거이 참고 견디어온 앞선 세대들, 그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삶의 전 영역에서 풍요를 누리고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 있어서 한국교회의 역할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6.25전쟁 속에 리더십을 발휘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엇갈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 가지 복음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분의 중요한 민족적인 기여의 하나는 한 경직 목사님 등의 청원을 수용하여 우리나라 군대 안에 군목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하고 군과 학교 등에서 신앙 강연이 가능하도록 한 것입니다. 교회 역사가들은 이런 제도가 민족 복음화를 앞당기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정말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특히 서울 주변에 삼각 산이나 청계 산엔 발붙일 곳이 없을 만큼 기도하는 사람들이 온 산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시골구석 구석에 들어가 개척을 했고, 또 외국어를 몰라도 해외에 나가 선교하는 일에 삶을 바친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왜 이 땅에 5만 교회를 세우시고 이렇게 800만이 넘는 믿음의 사람을 심어 놓으셨습니까? 이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증인자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보세요. 우리 한국인이 전 세계에 안 들어간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중국이 들어가면 차이나 타운이 생기고 일본 사람이 들어가면 장사를 하는데 우리가 들어가면 꼭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마음이 북한 땅에도 미쳐야합니다.
바울을 보세요? 그가 은혜 받고 난 다음 마음에 고통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본문 롬9:1절에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큰 근심이 되었고, 그 근심이 지나쳐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육체가 아픈 것을 고통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아픈 것을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아픔이 지나쳐서 그것이 바울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자기 동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 때문에 큰 근심이 되었고, 이 근심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큰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큼 고통했느냐 하는 것은 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는 말씀에서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인데,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데마’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 없지만,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형제, 나의 친척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8백만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손안에서 하나 되는 민족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삼각산에 가면 추운 겨울에도 산속 바위 위에서 통곡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살만하니까 하나님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르짖는 기도가 끊어지고 있습니다. 분단을 극복하고 하나 되는 것은 사람의 손만 가지고는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통일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제 오늘 이 시간!! 능력을 입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타성으로 젖은 잘못된 신앙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며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
무엇보다 남북이 다시는 전쟁의 아픔을 자녀들에게 물려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그,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거룩한 삶이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땅을 고쳐 주옵소서. 거룩한 성령의 역사가 이 민족위에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