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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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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2 (맥추감사절) 감사 - 우리의 삶의 전부 (마6:25-32)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07-03 | 조회: 1086


 

여러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눈을 뜬 후에 침대에서 내려와 걸어서 화장실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힘든 일상이지만 오늘도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나 일터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오늘도 숨을 쉬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손을 뻗어 누군가와 악수를 하고 손을 흔들어 줄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만나서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계절의 변화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삶에 당연한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소소한 것들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 어느 것도 누리며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몽골에 가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오셔서 말씀을 전해 주신 울란바트르 종합 대학교의 오덕교 총장 내외분과 참빛 교회의 유기열 선교사 내외분, 그리고 내려 놓음의 책을 쓴 이용규 선교사가 섬겼던 이레 교회와 북한에 관련된 선교에 목숨을 건 분들을 만나서 말씀도 전하고 그분들의 삶도 들었습니다.

 

참 마음에 깊은 감동이 일어나는 것은 그곳에서 사역을 하는 분들은 한마디로 생명을 주님께 맡긴 분들입니다. 해발 1500m의 울란바트르에서 산소량도 부족하고 분지라 공해가 너무 심합니다. 겨울에는 영하 40-50도가 넘는 혹한 추위와 물도 좋지가 않아서 몇 년 사역을 하다보면 건강에 이상이 옵니다. 그리고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선교사에게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비자발급이 안나와 ?겨 나오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곳에 머문다는 자체가 은혜요, 감사입니다.

 

저는 이곳에 머물면서 오늘 본문을 묵상했습니다. ‘감사 - 우리의 삶의 전부라는 것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왜 감사가 우리의 삶에 전부이어야 합니까?  성경에서 감사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유카리스테오’(ευχαριστεω)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라는 말은 카리스’(χαρισ)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사라는 말과 은혜라는 말이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을 원 뜻 그대로 풀어보면 은혜가 풍성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감사란 은혜가 풍성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2017년도를 꼭 반을 살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1년 중 중요한 명절 3개를 지정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6:16절에 보면, 유월절, 맥추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이 절기를 지킬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맥추 감사절은 지난 6개월을 지켜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밀이나 보리를 처음 거두고 나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비록 오늘날 우리들이 보리나 밀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6개월을 뒤돌아보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이 맥추감사 주일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를 잘하면 영적으로 상당히 건강하고 성숙한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감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 비해 감사를 잘 아는 사람이 그만큼 건강하고 성숙합니다. 영적인 면뿐만 아니라 육적인 면에서도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건강하다고 합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그 정신을 생각하고 우리 각자의 신앙을 점검해 봄으로 신앙의 건강을 회복하고 감사 신앙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6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의 전부를 왜 감사해야 하는 가를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기르시고 계신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만 꽃이 피고 예쁜 자태를 뽐낼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다 자라 게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중의 새나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자라게 하시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 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먹을 것이 필요함을 아시고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얻게 하십니다. 들에 핀 백합화도 친히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때에 적절하게 공급해 주셔서 삶을 이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공급하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말씀하신지 아십니까? 본문 32절입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아신다는 말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형편을 아시고 필요를 따라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5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고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지난 6개월을 살면서 염려를 안 하고 사신 분들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염려는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우리의 마음을 바짝 마르게 합니다. 우리 가운데 날마다 염려를 하지 않는 분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약 절반은 내일에 대한 염려를 하고 있고 노후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료는 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반 정도가 염려하는 것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열이면 열 다 염려를 하면서 한 생을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염려합니까? 사람마다 염려하는 내용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뿌리를 찾아 내려가 보면 예수님이 말씀에서 지적하신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다른 말로 말하면 생명의 안전과 건강, 이것이 우리 모두의 염려의 뿌리요, 중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목숨과, 몸에 대한 특별한 염려를 오늘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34절에, 말세가 되면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악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 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깊이 잠이 들도록 만들어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조차 하지 못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도록 만들 위험이 있는 악이라고 합니다. 그 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방탕이요, 둘째는 술 취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염려라고 합니다. 우리는 방탕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에 취하고 알코올에 중독 되면 벌써 인간다움을 이미 포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염려가 방탕과 맞먹는 악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만큼 염려는 해로운 것입니다. 구든지 돈에 마음이 빼앗기면 이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영과 육을 망칩니다. 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27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키 작은 사람에게 염려 주사를 놓는다고 해서 한번에 한자나 자라는 것을 보셨습니까? 아무도 염려해서 키가 자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본문은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네 생명을 한자나 더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염려해서 생명을 1년 연장할 수 있고, 2년 연장 할 수만 있다면 염려만 잔뜩 하고서 1000년도 살 수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그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렇게 염려는 무익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염려를 재미있는 사실에다 비유했습니다. 자동차에 앉아서 기어를 중립에 놓고 시동을 건 다음 엑셀레이터를 밟아 대는 것입니다.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아 보십시오. 소리는 요란합니다. 엔진은 나 죽는다고 돌아갑니다. 기름은 펑펑 들어갑니다. 그러나 차는 한치도 안 움직입니다. 에너지만 소비합니다. 소음만 요란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꼭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사람만 요란합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에너지만 소모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무익한 겁니다. 쓸모없는 겁니다. 그걸 왜 해야 됩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는 헨리 나우웬이,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염려한다는 건 뭐냐.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 마음이 혹시로 가득찬 것이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 혹시 시집 못 가면 어쩌나, 혹시 학교 간 애가 안 돌아 오면 어떻게 하나' 이런 식으로 아직도 오지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가득 채우는 것이 염려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6개월간에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십시다. 감사하는 삶이었습니까? 아니면 염려하는 삶이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염려를 묶어 놓고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 비결은 감사하는 믿음의 생활입니다. 여기 30절 중반절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염려하는 그의 제자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 보십시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새는 심지도 않고 추수도 않고 곡간에 쌓아 두지도 않았어. 그러나 너희 천부께서 다 기르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또 염려하는 제자들 보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의 백합화는 길쭉하고 보기 싫은 꽃이지만 유대나라 백합화는 새빨간 것이 얼마나 이쁜지 모릅니다. "들에 저 백합화를 봐라. 저렇게 아름다운 백합화에 누가 저렇게 옷을 잘 입혔냐. 하나님이 입히셨다." 30절을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플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공중에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어느 누구 예외없이 다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다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구원받을 만한 수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관한 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죄인이었을 때,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진노 아래 있을 때""원수 되었을 때"그런 소망이 없는 우리에게 모든 악과 죄와 모든 범죄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끗이 씻으시고, 이제는 죄와 흠이 하나도 없는 거룩한 자기 자녀들처럼 날마다 보시면서 그 머리터럭도 다 세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어디를 가나 동행하시고 모든 기도를 귀담아 들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너무 사랑 받는 자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공중에 새도 저렇게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소중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이 믿음을 가지면 염려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감사가 일어납니다.

 

여기 보세요 32절에 '이러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기 이러 것은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들 마져'있어야 할 줄을 아느니라.' 그러므로 31절에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주님께서 내게 필요한 것을 나보나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감사절을 맞이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모드를 바꾸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염려에서 감사함으로

 

이것이 우리 삶에 늘상 일어나는 염려로부터 해방이 되고 일상의 감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건강한 신앙의 삶입니다. 이번에 몽골에 가서 내려놓음의 이용규 선교사의 개척한 곳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인도네시아로 떠나고 지금은 전동식 선교사가 사역을 하고 있는 몽골 땅에 건강한 교회로 자리매김을 한 교회입니다. 그 내려놓음의 책에 보면 노마드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마드유목민,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전통적으로 유목생활을 해온 몽골 민족을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천국 노마드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천국 노마드란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하늘나라 유목민이 된 것을 일컫는 말인 동시에, 진정한 영적 가치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사모하는 참된 크리스천이 헛된 가치를 내려놓고 하나님나라를 향해 가는 믿음의 순례자가 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진정한 내 것을 얻으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 책에 보면 아들 동연이가 두 살 때 함께 장난감 가게에 간 일이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인 동연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버즈 장난감을 두 팔로 꼭 움켜쥔 채 가게를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난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계산대에 올려 점원이 바코드 판독기로 읽게 해야 했습니다. 래서 점원이 동연이의 팔에서 장난감을 넘겨받으려고 했을 때, 동연이는 울며 장난감을 꼭 쥔 채 내려놓으려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장난감이 진정한 자기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잠시 계산대에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 동연이는 장난감을 안은 채로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계산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선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내려놓기 전에는 진정한 우리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아기인 우리는 내려놓으면 빼앗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움켜쥐려 하고, 결국 그렇게 잡고 있는 한 그것들은 진정한 우리 것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우리를 옥죄게 됩니다. 우리가 잡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쉽게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나의 문제를 내려놓고 인생의 계획까지 내어드린다면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잠시 내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런 삶 속에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참 된 감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는 행복한 습관이고, 하늘의 보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나의 삶에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입니다. 감사는 바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아직도 내 삶 가운데 염려가 있습니까? 염려모드를 감사모드로 전환하십시오. 감사는 0.3초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슴으로 감사를 느끼는 시간이 0.3초입니다. 감사를 위해 매 순간 0.3초를 투자하십시오. 감사의 생각과 감사의 말과 감사의 행동을 하십시오. 그 속에 더하여 넘치게 하시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일년의 후반기 오늘 첫주부터 우리의 삶의 모드를 바꿉시다. 다 감사모드로 바꿉시다. 염려 모드를 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감사모드로 삶을 바꿉시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좋아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 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세상사람 앞에 매력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집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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