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을 그래프로 나타낸다고 하면 어떤 모양이 될까요? 넓은 초원처럼 끝도 없이 펼쳐진 평평한 모습일까요? 아니면 수없이 파도나 너울이 일어나는 저 바다의 모습이겠습니까? 아마도 파도치는 바다와 같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어떤 인생도 굴곡이 없는 인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양파 껍질을 벗기듯 한번만 벗기고 들어가 보면 남모를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자녀의 일로, 직장의 일로, 사업의 일로, 인간관계의 일 등 크레파스처럼 다양한 모양의 역경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이 없는 평안한 삶을 하나님께 구하지만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고통과 역경의 쓰나미가 밀려 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복음을 전하는데 참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14장 후반에서 제1차전도 여행을 모두 마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을 결산해 보면 희비가 엇갈리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첫 번째로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로 찾아갔던 구브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떤 일입니까?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따르게 된 일입니다. 두 번째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난 일로 그가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 할 때 온성 사람들이 거의 다 말씀을 듣고자 모여들었던 일이며, 세 번째는 루스드라 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어가는 놀라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로인해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당시 그들이 모시는 제우스신으로 부를만큼 대단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 얼마나 사역에 보람과 감격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19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여기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은 것입니다. 당시 바울을 못 마땅히 여긴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이렇게 돌로 친 것입니다. 이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이 말은 현재완료형입니다. 이미 죽은 것입니다. 돌로 맞을 때 죽은 척 한 것이 아닙니다. 때린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쓰레기장에 갖다 버린 것입니다. 매로 때린 것도 아니고 돌로 때렸습니다. 온 몸과 얼굴이 피투성이였을 것입니다. 온몸이 성할 리가 있겠습니까? 제자들도 그가 죽은 줄 알고 그 쓰레기장에 찾아가서 어떻게 손 쓸 줄도 몰라 둘러서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게 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따라 쫓아 왔습니다. 요즘 원정 도박을 하기도 하고, 원종 출산 하는 데 원정 핍박을 한 것입니다. 이고니온에서 루스트라까지 17km,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는 42km가 됩니다. 지금같이 교통이 좋은 때도 아닙니다. 터키는 산이 높습니다. 그 높은 산을 넘어 수 십 킬로를 바울을 쫓아 왔다면 그들을 얼마나 악심을 품은 것입니까? 바울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 유대인들은 주변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군중들은 유대인들의 선동에 좌우를 분별치 못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이상한 것은 무리들의 행동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면서 엎드려 절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바울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군중들과 모양이 똑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치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지 않아 돌변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습니다. 요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 군중들의 여론이란 오뉴월 보리밥처럼 쉽게 변질됩니다. 단 며칠 사이로 좋아하다가 싫어하다가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이 고난의 파도가 들이 닦칠 때 이것을 어떻게 수습을 했나요? 행14:3절에 보면 “주를 힘입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는 어떤 문제를 만나도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주를 의지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 맡겼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니까 이런 절망의 현장에서도 그는 원망의 말 한마디 하지 아니하고 그 다음 날 일어나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평상시와 똑같이 전도하러 나섰다고 성경은 말씀을 합니다. 그의 몸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의 몸은 불구에 가까웠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훗날 자신이 당한 이 고통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1:8-10절에 보면 무엇이라 말씀을 합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하다가 극심한 환난에 직면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큰 고난이었습니다. 그 결과 살아갈 소망조차 끊어졌습니다. 한마디로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지만,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흔들리는 역경을 주시는 이유는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생명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한 훈련임을 강조하십니다.
여기 보세요. 돌로 쳤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울을 따르던 제자들 마져도 죽을 줄 알았던 바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20상) 바울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일어나다는 말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의미도 있고, 죽음에서 일어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본문은 양자를 다 의미합니다. 바울은 죽음에서 살아났고 넘어진 자리, 버려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돌로 치던 자들은 죽은 것을 확인하고 성 밖에 내다버렸습니다. 제자들 즉, 믿는 사람들은 바울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여 둘러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기절했다가 일어났다 해도 무수한 돌에 맞아 넘어졌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서 거동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죽었었다면 더더욱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어났습니다. 바울 스스로 일어난 게 아니라 주님이 일으키셨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생명을 주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자마자 성에 들어가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복음의 일군이 맞아 죽도록 놔두지 않으십니다. 다시 일으키십니다. 바 울은 자신이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 고난의 목록을 기록했습니다. 고후11:23-27절에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이 고난의 목록을 기록한 목적이 뭡니까? 내가 이렇게 많은 고생을 했었노라고 알리자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리려고 이 목록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났으며, 자신이 결코 패배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려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이 엄청난 반대와 시련, 고통 중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겼습니다! 나는 승리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도와주셨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당부를 합니다. 22절을 보시겠습니까?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에게 이 고난의 파도가 몰려오면 첫째는 마음을 굳게 하라 그리고 둘째는 이 믿음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첫째 마음을 굳게 하라 - 제가 이 ‘굳게 하다’를 연구하다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이곳 외에는 별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특수한 단어입니다. 로버트슨이라는 신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이 의미는 기존에 이미 있는 것에다 힘을 더 해서 튼튼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없는 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기존에 있는 것에다 힘을 더 해서 튼튼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탄광에 있을 때, 굴이 압력을 견디지 못해 그냥 나두면 굴이 뒤틀리거나 무너져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광산 사고가 많이 나는 것입니다. 이때 뒤틀린 동발에다 보강 작업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굳게 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을 굳게 해 주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십니까? 교회학교를 맡으셨습니까? 목장을 맡으셨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성도 가운데 어려움에 계신 분들을 아십니까? 곁에서 격려하십시오. 함께 기도해 주세요. 여러분이 건네는 그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부족한 종도 장로님들이 담임 목사를 위해 기도 할 때, 얼마나 힘을 얻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맡았든지 옆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튼튼하도록 힘을 실어주고 굳게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믿음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즉 고난이나 환란이 무서워서 믿음을 떠나거나 믿음이 아닌 것과 타협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오히려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를 극복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주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기르는 새 중에 '새크레터리 버드'라는 번역하면 비서 새라고 하는 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는 평소에 잘 날아다니지만 정말 이 새가 날아야 될 때는 기가 죽어서 날지 못하고 땅 바닥에 앉아서 기어다니다가 잡혀 먹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에 굳게 선 사람들은 쉽게 주저 않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으로 잘 아는 사실입니다. 본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여러 문제로 인해 흔들려도 결국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별 도리가 없잖아요. 세상 사람은 급하면 지푸라기를 잡는다하지만, 우리는 지푸라기를 잡지 않아요.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붙잡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모든 것임을 알고 고난의 한 복판에서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어느 책의 제목처럼 “땀은 흘러도 기쁨은 샘물처럼” 그 심령 속에 견딜 수 없는 주님의 생수가 흘러 넘쳤기에 그 고난의 자리에서도 담대히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계란에 대해서 아십니까? 계란 중에는 무정란과 유정란이 있는데 무정란은 아무리 오랫동안 어미 닭이 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지만 유정란은 어미 닭이 21일간 품으면, 반드시 병아리가 생명 되어 나옵니다. 성도들도, 무정란 같은 성도가 있고 유정란 같은 성도가 있게 마련인데 무정란 같은 성도들은 예수로 인하여 고난이 덮치고, 손해가 나고, 풍랑이 일어나면, 그냥 도망가거나, 무너지거나, 썩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유정란 같은 성도들은 고난이 올수록, 풍랑이 셀수록, 더욱 더 주님 품에 파고들어 마침내 생명을 출산하게 됩니다.
세 번 째는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 오늘 본문(20절)에 보면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튼 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으니라’고 했습니다. 돌로 맞아 죽다 살아났는데 그는 상황에서도 복음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폴 스톨츠(Paul Stoltz) 교수는 지능지수(IQ)나 정서지수(EQ)보다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가 높은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역경지수(AQ)란 수많은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냉철한 현실 인식과 합리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끝까지 도전하여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폴 스톨츠 박사는 자신의 저서 '장애물을 기회로 전환시켜라'에서 사람들이 역경에 대처하는 스타일을 등반에 비유하여 3가지 타입으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힘든 문제나 역경이 다가오면 도망가거나 포기하는 사람을 퀴터(Quitter) 도망자 혹은 겁쟁이 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역경 앞에서 뚜렷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현상유지 정도로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이 60~ 70% 정도인데, 이 사람을 캠퍼(Camper), 야영자라고 합니다. 셋째는, 시련이 다가올 때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어코 정복하고 마는 사람을 클라이머(Climber), 등반가라고 말합니다. 포기를 안합니다. 여러분은 역경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도망자 혹은 야영자입니까? 아니면 등반가입니까? 역경을 이겨내는 힘, 역경지수가 높을수록 인생에서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오늘 날 모두가 힘이 들어서 고난의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자들이 많지만,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핏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역경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 주님은 여전히 동행하십니다. 손을 내밀어 건져주십니다.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믿음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기적이 보이지 않아도 사망의 자리에서 우리를 이미 우리를 건져주셨고, 앞으로 건져주실 주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은 가능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언제 이런 능력이 나타날까요? 내가 약할 때입니다. 나는 질그릇처럼 깨어질 수밖에 없는 미련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입니다. 내 인생이 흔들림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바라볼 때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가난함을 부유함으로 채워주십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시고, 갈 수 없는 곳에 가게하십니다. 뛸 수 없는 것을 뛰게 하십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자! 다들 힘을 냅시다. 고난의 파도가 와도 마음을 굳게 하고 믿음이 튼튼하도록 힘을 실어주고 나아갑시다.
결혼한 지 8년 된 어느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나면서 남편은 집을 떠나 도망중이라 연락도 되지 않습니다. 살고 있는 집은 차압이 들어왔습니다. 법원 집달관이 다녀갔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창피하다고 학교에도 가지 않고 방 안에만 있습니다. 너무너무 힘들 때 친정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그녀는 무작정 부산 친정으로 내려갔습니다. 엄마를 보는 순간 “엄마, 너무 힘들어!”하고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집간 딸이 힘들다고 소리치며 하염없이 울고 있는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친정 엄마는 딸의 울음이 진정되자 딸을 데리고 부엌으로 갔습니다. 딸이 보는 앞에서 냄비 세 개에 물을 채우더니 첫 번째 냄비에는 당근을 넣고, 두 번째 냄비에는 계란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냄비에는 커피를 한 스푼 가득 넣었습니다. 얼마 후 물이 끓기 시작했습니다. 한 동안 물이 끓는 것을 바라보던 친정 엄마가 얼마 후 불을 끄더니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 물건이 다 역경에 처하게 되었단다. 끓는 물이 바로 그 역경이지. 그렇지만 세 물건은 전부 다 다르게 반응했단다. 당근은 단단하고 강했지만 끓는 물속에서 부드러워지고 약해졌어. 계란은 껍데기가 너무 얇아서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호하지 못할 정도로 약했지만, 끓는 물을 견디어내면서 그 안이 단단해졌지. 그런데 커피는 좀 달랐지. 커피는 끓는 물에 들어간 다음에 물을 커피로 변화시켜 버린 거야.” 이 말을 듣는 순간 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 눈물은 조금 전에 힘들다고 하소연하며 울던 눈물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친정 엄마는 이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힘드니? 힘든 상황에서 너는 당근이니, 계란이니, 커피니?” 고난의 때에 당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을 받을수록 더 약해집니다. 마음도 약해지고 믿음도 약해집니다. 곧 으깨어질 것만 같이 약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고난의 때에 달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단단해집니다. 마음도 단단해지고 믿음도 단단해집니다. 그런데 고난의 때에 커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고난의 상황을 바꿔버리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축복의 때라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며 기쁨의 춤을 추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고난의 때에 우리는 당근 같은 사람입니까? 계란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커피 같은 사람입니까? 우리는 고난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훈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큰 사망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큰 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보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이 나를 집어 삼킬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네가 더욱 단단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때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데, 하나님께서는 네가 고난의 현장을 기쁨과 축복의 현장으로 바꿔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우리 힘냅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