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교회는 이 무더운 여름 영적 군사로 자녀들을 세우기 위해 이번 주간부터 한 달에 걸쳐 여러 부서에서 신앙 훈련을 합니다. 사람을 세운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우리가 부흥이라는 단어를 매우 좋아 합니다. 이 부흥은 일차적으로 양적인 변화를 말하기도 하지만, 한사람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온 땅에 펼쳐지는 일이 부흥이 아닙니까? 미국에도 영적 대각성을 일으켰던, 조나단 에드워드, 디엘 무디 같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 일을 감당했습니다. 영국도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엄청난 역할을 감당했던 조지 휫필드, 요한 웨슬레, 그리고 설교의 황태자인 찰스 스펄젼이라는 탁월한 분이 계셨습니다.
설교의 황태자라고 일컫는 스펄젼 목사는 40대 초반부터 고치기 힘든 어떤 지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주일에 교인들에게 이러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이 수없이 이 강단에서 들었던 꼭 같은 메시지를 다시 전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에게는 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를 데리고 가실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저는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전하던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으셨다고 하는 것, 이것 하나 다시 전하고 저는 가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설교한 다음에도 15년이나 더 말씀을 전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만 정말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이 아닙니까? 만약에 우리가 더 이상 예배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그럴 때 저는 두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바로 오글로소오프 목사가 선교사로 미국에 건너온 젊은 요한 웨슬레에게 했던 두 가지 질문입니다.
“형제여, 당신 속에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내적 증거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요한 웨슬레는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오글로소오프 목사는 두 번째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목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 태도입니까? 그러나 요한 웨슬게에게는 문제가 있었나봅니다. 그는 멋쩍은 듯이 대답하기를 “예, 압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의 구원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오글로소오프 목사는 “예, 옳은 말씀입니다만, 그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에게는 어떤 분인가를 알고 계시나요?”라고 또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웨슬레는 우물쭈물 대답을 하긴 했습니다만, 그때부터 그의 마음속에 큰 아픔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나는 자신있게 대답을 못할까? 내가 이러고도 목사냐? 이러고도 선교사냐?”라는 뼈아픈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영국에 다시 돌아와서 몹시 가슴 아프게 진통을 했습니다. “나의 믿음은 어딘가 모르게 잘못되어 있나 보다. 내가 오늘 저녁이라도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이렇게 열병을 치루듯 진통하는 가운데에 드디어 하나님이 그에게 빛을 던져 주셨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거듭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오늘날 기독교 역사에 샛별처럼 빛나는 요한 웨슬레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이 시간이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저는 꼭 같은 질문을 당신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내적 증거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분명히 대답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직도 이 구원의 문제가 정확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기쁨도 확신도 사명도 분명치 않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지금 초대 교회에 구원에 대한 문제가 회오리바람처럼 불어 닥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구원이 율법으로 받느냐,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데 일단의 유대인들이 안디옥 교회에 와서 따지듯 묻는 질문이 바로 이 구원의 문제입니다. 1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무슨 말입니까?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는가? 아니면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는가? 하는 이 구원론 문제가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안디옥에서 말씀을 가르쳤던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이신칭의’의 신앙관으로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진리에 바로 선, 교회에 일단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구원은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할례라는 율법의 의식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문제는 신앙의 핵심일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 가장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평소에 먹고 살기에 바쁠 때는 지나쳐버릴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구원의 문제는 우리 인생을 쥐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됩니다. 이 문제가 잘 해결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절박한 환경에 부딪히면 두 갈래로 나뉘게 됩니다.
이 문제로 평화롭던 안디옥 교회가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생겼을 때 바울이 취한 행동을 보면 참 호감이 갑니다. 바울은 바리새파 출신이라서 율법이나 교리문제에 대해서는 전문성도 있고 고집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생기자 자신들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대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교회 어른들, 선배들과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러 이 문제를 어머니 교회 격인 예루살렘 교회에 가져 간 것입니다.
오늘 저희가 다루게 될 사도행전 15장은 교회에 문제가 되었던 것을 해결하려고 모인 공식적인 첫 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예루살렘 공의회는 상당히 힘든 회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7절에 보시면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나를 택하시고”라는 당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 '많은 변론'이라고 했습니다. 변론 앞에 '많은'이란 ‘ 폴뤼스’라고 합니다. 개역개정성경에는 '많은'이라고 번역했으나, 공동번역은 '오랜'으로 번역했습니다.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아마도 상당히 깊고도 많은 진통을 겪은 회의였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공의회의 내용은 심각한 내용이었습니다.
만약 이 문제가 바로 정리가 안 되면 초대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확장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자리에서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그는 여기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7절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나를 택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이방인의 구원에 대하여 매우 강하게 거부감을 드러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진 생각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사건이 이방인었던 고넬료 가정에 세례를 베푼 사건이 아닙니까? 이 이방 사람 역시 얼마든지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8절에 보면 베드로는 우리의 구원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자는 최소한 두 가지 원인이 있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본문 7절 이하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야하며’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이미 만세전에 나를 예정 가운데 두셨다가 때가 되매 전도를 통해서든지, 내적인 감동으로 교회 나와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령을 받아야 예수가 구주되심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 12:3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이시라고 하는 모든 사람은 다 성령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감동과 설득이 아니고서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한 나사렛 사람을 온 인류의 주님이시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우상에게로 끌려 다니던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성령에 이끌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솔직히 말하면 실은 유대인 도 율법을 잘 지키고 있지 못하는데 왜 이방인에게 지키라 하느냐? 나도 잘못하면서 남에게 하라고 하는 것이 문제다, 라는 지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는대로 유대인들은 613가지의 법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248가지는 ‘하라’는 것이고, 나머지 365가지는 ‘하지 말라’입니다. 만약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려면 613가지를 완벽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어기면 그 사람은 죄인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선포했습니다. 죄에 빠진 인간이 아무리 선하게, 양심적으로 산다고 해도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주셨을까요? 율법의 기능은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롬3: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생각해 보세요. 율법 앞에 비춰진 나의 모습은 정말 비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감추고 싶은 것들,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발가벗기듯이 들추어내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앞에 설자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 앞에 사형 선고를 받은 자들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율법이 죄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노력과 방법으로는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음을 아셨습니다. 인간의 의로는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율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롬3:21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깨달아질 때, 더 이상 저주 아래 매여 살지 않습니다. 이제는 예수로 인해 성경이 꿀 송이처럼 달게 여겨집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의롭게 되� �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피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든, 이방인들이 예수를 영접하든 어느 누구도 차별이 없는 구원의 자녀인 것입니다. 11절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구원이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 행위의 구원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주는 자가 아무 조건도 없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은혜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면 나 이상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 나 이하의 삶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합리주의, 소위 말하는 과학적인 사고에 깊이 젖어 있습니다. 일이 잘 된 것은 자기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고입니다. 이것은 공로주의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 사상이 의외로 많습니다.( 식당 봉사 교사등등) 스톰스 박사는 은혜에 대해서 말하기를 "은혜가 무엇인가? 당신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당신의 무공로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신 값없는 은혜임을 믿습니까? 내가 가진 노력이나 공로를 통해서 도저히 자녀 될 자격이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 주셔서 자녀 삼으셨을 뿐 아니라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고 때를 따라 도와주시는 그 사랑을 입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에 결박 당하여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더 이상 율법의 노예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갈3: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루터는 이 본문을 강해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 신음하는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의지로 죄의 옷을 입으시므로 ‘즐거운 교환’을 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놀랍고 신비로운 거래이기에 ‘신비로운 교환’이란 표현으로 학자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교환을 통해 구원의 열매를 맺고 계십니다.
이 은혜 앞에 선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면 이 구원, 그리고 그 이후의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고전 15:10절을 보세요.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그 다메섹의 첫 사랑을 생각하며 주께서 맡긴 일, 사명을 위해 기쁨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인해 염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한 우리의 미래를 앞에 놓고 두려움에 갇혀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 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그 열매가 바로 여기 모인 우리입니다. 믿습니까?
그 은혜 앞에 선 자들이 구원받은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의 열매가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이번 여름 사역에 우리는 두 가지입니다. 보내는 자들과 보내지는 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하나님 내게 맡긴 사역을 뜨겁게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구원의 학신이 없는 분들, 그리고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의 기쁨을 잃은 분들은 이 구원의 회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늘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