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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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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23 갈등을 넘어 (행15:36-41)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07-23 | 조회: 1010


오늘 오신 여러분들 한분 한분에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놀랍다고 할 정도로 빠르게 변화 되고 있습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전화 한통하기 걸기 위해 공중전화에서 줄을 서던 이야기는 이제 동화 속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냉장고만한 큰 컴퓨터의 역할을 이젠 작은 노트북하나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용량을 카버하고 있습니다.

 

이제 과학자들은 로봇시대가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 로봇이 이 가사 일을 다 해줍니다. 밥도 해주고 청소하는 일등 안하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가정교사의 일도 해 줍니다. 이제 여성 여러분 이제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우리가 상상을 못할 정도로 환경이 달라지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활환경이 좋아지면 자동적으로 우리의 삶은 기쁘고 평안하고 행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점점 분노가 쌓이고 스트레스는 늘어나는 그 결과 가정은 깨어지고 친구들은 사라지고 우리나라는 지금 oecd 국가 가운데 자살율이 1위를 기록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특별히 우리와는 다르게 요즘 자라나는 자녀들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요즘 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어린 아이들에게 탈오 증세가 생기고 우울증은 이제 아이들의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삶의 환경은 점점 좋아지고 있는데 우리들의 삶은 왜 이렇게 점점 힘들어지는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평안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예배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세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잔잔하게 한번 살펴보세요. 여러분은 정말 마음속에 평안함이 있나요? 기쁨이 있나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들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 평안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 훌륭한 목회자였던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서로 갈라섰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에 평안이 깨진 것입니다. 그 다툼의 원인을 보면 마가라는 사람이 그 원인제공자입니다. 전에 마가가 바울을 따라 전도여행을 떠났는데, 전도여행 중에 그만 도중하차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다시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 바나바가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다시 기회를 주고 싶었고, 마가의 입장을 변호해 주었지만, 바울은 그런 사람은 같이 일할 사람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안 데리고 가느냐 둘이 의견이 달라서, 심히 다투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사건을 기록하셨어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은 이들이 잘한 장점을 우리가 배우기를 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실수를 통해 주시는 성령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숨어 떨고 지내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이 야기한 첫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맛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화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불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이 갈등을 넘어 어떻게 화목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1.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이유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교리적인 문제도 아니고 마가를 데려갈 것인가 말 것인가?’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현장감 있게 그려봅시다. 지난주에 보셨지만, 이들은 예루살렘 총회에 가서 안디옥 교회에서 가장 힘들었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참에 아마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자 우리 전도 여행을 또 가면 어떻겠소. 이제 1차 전도 여행을 갔다 온지도 오래 됐으니까 2차 전도 여행을 갑시다.” 이들은 공감을 했고 바울은 그러면 나는 짐을 쌀 테니까 당신은 비행기 표를 좀 알아봐 주시오’ ‘, 그러죠 ,’

 

그래서 바울이 옆에서 열심히 짐을 싸는 동안에 바나바는 항공사에 전화를 겁니다. 몇월며칠에 가는 비행기 표가 지금 있습니까?” “, 있습니다.” “누가 가실 겁니까?” “ , 제가 이름을 불러 드리죠. 안바울, 김바나바.”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또 한사람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송마가.” 에서 짐을 싸던 바울이 그 소리에 펄쩍 뜁니다. 막 달려오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아니, 지금 예약을 하는데 왜 그럽니까?” “아니 좀 내려놓아 봐요!” 수화기를 내립니다. 바울은 마가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어떻습니까? 37절에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가고자 하나우리말은 보통 시제로 쓰였지만, 헬라어에서는 미완료 시제를 썼습니다. 이 말은 고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한번만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한 것이 아니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계속 고집을 하는 것입니다. 왜 고집합니까? 바나바를 잘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에게는 참으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가가 어떤 사람입니까?

 

13:13절을 보니 마가가 교회 역사 최초의 선교 여행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아마도 더 이상의 선교 여행에 재미가 없었든지, 복음 때문에 법정에 서는 것이 두려웠을지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가는 갑자기 선교 여행을 중도에 포기하고 버가라는 곳에서 뒤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내가 없고 지구력도 없고 용기도 없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사실 마가의 중도포기는 다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쓰일 수 없을 그럴 정도의 중대한 실수였습니다. 치사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때 마가의 이 어리석은 결정은 그 당시 교회 지도자였던 바울에게 큰 실망을 주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마가는 바울의 마음속에 한심한 사람으로, 아무 쓸데없는 비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사실 마가의 이런 행동은 지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도 중도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적이 있었습니다. 14:50-52절에 보면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여기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친사람이 마가입니다. 이처럼 마가는 중도에 관두고 포기하는데 전문가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가 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자신을 생각해보아도 정말 구제불능의 모습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모습이 반복 되다보면 자신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감이 그리고 죄책감마져 그 마음에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바나바가 그것을 안 것입니다. ‘마가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역에서 떠날지도 모른다. 마가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야. 그가 비록 몇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함께 해야 한다는 이 마음이 바나바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습니. 마가를 데려가겠다고 하는 바나바의 고집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옳습니다. 100번 옳습니다.

 

그러나 38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밤빌리아에서 자기를 떠나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이 구절 역시 미완료 시제입니다. 안된다고 그냥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못 데리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너무 가혹한 사람입니까? 역시 아닙니다. 지금 바울의 입장은 자신들의 선교는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만약 사람의 일 같으면 마가를 얼마든지 데려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차대한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사람과 함께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를 한 것입니다. 바울의 주장이 틀렸습니까? 옳습니다. 100번 옳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마가를 데려가야 합니까? 아니면 두고 가야 옳습니까? 이 문제를 놓고 투표를 해 보면 신기하게도 반으로 나뉩니다. 어느 교수님이 마침 이 본문을 가지시고 설교하시다가 신학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데려가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반으로 갈라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둘 다 옳지만, 우리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 사역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평생을 함께 사역을 위해 살아갈 것 같은 사도가 심히 다투다가 결국 갈라서고 맙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견해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둘 다 다른 쪽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정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좁은 시야를 가지고 이 문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다투었고, 그들은 갈라서 버린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왜 여러분은 다툼이 있습니까? 왜 머리가 터지도록 싸웁니까? 예외가 없습니다. 자기라는 시야를 가지고 상대를 보기 때문에 상대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서고 심지어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수많은 다툼이, 얼마나 수많은 가정불화가 이 좁은 시야에서 비롯되는지 모릅니다. 불화하지 아니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렇다면 시야를 넓히십시오. 나의 생각으로만 문제를 보지 말고 나의 눈으로만, 사물을 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사물을 보기 위해 노력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노력이 필요합니.

 

2. !! 이 성령 충만한 두 사도의 싸움에서 우리는 또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타협점을 찾아야 합니다. 양보와 섬김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엔 죄를 범한 인간은 항상 갈등과 분열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갈등을 잘 극복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건이 나옵니다. 13장을 보면 아브람과 조카 롯이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함께 살아왔는데, 이방 땅에서 이들에게 깊은 갈등이 생깁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가축이 점점 많아지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소유가 적었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재산이 많아지니 동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은 결단을 내립니다. 우리 서로가 친척으로 이국땅에 와서 사는데 서로 다투지 말자고 합니다. 그리고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9절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 그때 롯은 눈을 들어 소알 땅을 바라봅니다.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애굽 땅처럼 비옥한 곳입니다

 

롯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눈에 보기에 좋은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당시 최고의 환락도시인 소돔 성이었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기보다는 세상적인 향락을 즐기며 살기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적인 안목과 기준으로 선택하지는 않습니까? 내 인생의 밧줄을 세상에 메어 놓고 살 때가 많습니다. 천국을 향하여 나아간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 방법으로, 내 계획대로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롯이 선택하고 난 나머지를 아브라함이 선택한 것입니다. 14절을 읽어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너 있는 곳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서있는 자리가 어디 입니까? 롯이 떠난 외로움의 자리입니다. 또한 비옥한 것과 물질 ,행복한 것과는 상관없는 척박한 황무지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것이 네 인생속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 합니다. 보이는 것 그 이면 속에 내가 너를 위하여 숨겨둔 계획과 놀라운 꿈과 비전을 설명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너 있는 곳- 비록 아무것도 없는 외로움과 고독만이 깔려있는 절망감만 서려있는 현장이지만, - 지금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환경을 보지 말고 환경너머 계신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오늘도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눈을 들라!! 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평생 양보와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어디까지입니까? 십자가까지입니다. 거기까지 양보와 그리고 죽기까지 섬겼습니다.

 

3.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만약 이 마가를 그대로 버려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으로 말씀을 정리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에게 일평생 가장 부담되는 사람이 있었다면 누구였을까요? 바나바가 아니었겠습니까? 자신이 다메섹에서 회심하고 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갔을 때 모든 사람이 믿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멀리할 때였습니다. 바나바는 그런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했던 사람입니다. 박해를 받고 고향 다소에 가서 10년간 묻혀 지낼 때 안디옥에 파송되었던 바나바가 다소까지 찾아와 그를 안디옥 교회 지도자로 세운 것도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오늘의 바울은 바나바 없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다투고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울 삶에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요? 선교에 필요 없는 존재, 선교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며 마가에게 상처를 준 바울은 마가가 그러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상처를 남긴 존재 로써 그에게 기억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11절을 보면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증거합니다. 지금 바울은 마가를 자신에게 유익을 끼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죽음 직전에 마가를 간절히 찾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와 인생의 마지막에 서서 그와 함께 거하며 서로의 가슴에 남은 응어리를 풀고 하나님의 교훈과 사랑으로 그를 다시 한번 사랑할 기회를 갖고자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욱 놀라운 것은, 비겁하고 겁이 많아 도망을 쳤던 이 마가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후에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의 가장 위대한 사역, 즉 마가복음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는 마가가 엄청난 영예를 누리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마가를 통해 하나님은 언제나 또 다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비겁한 행동을 했어도, 심지어 심한 죄를 지어 사람과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을 지라도,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회복하여 사용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13:5). 이 진리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 진리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인생의 영원한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이 새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 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러분이 누구입니까? 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여러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요즘 바나바가 그립습니다. 그는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믿어 준다는 것은 그의 삶에 어떤 환경과 문제와 갈등 앞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를 만났을 때, 주님께서 자신을 믿어 준 것처럼 바나바는 아무도 그를 믿지 않고 바울조차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을 때도 그를 믿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마가만은 안 된다고 소리칠 때 아마 바나바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 바울을 믿은 것처럼 나는 마가를 믿는다. 이런 바나바로 말미암아 마가는 마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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