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여러분! 참 우리는 강한 것 같지만,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IMF가 한창이던 1998년 여름 조간신문에 한 남자의 자살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는 한때 잘나가던 중견 사업가였습니다. 사업은 번창하고 아이들은 아무 탈 없이 대학에서 공부를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IMF가 찾아왔습니다. 부도로 사업을 포기해야 했고, 아이들은 학비가 없어서 다니던 대학을 휴학해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있던 집도 차압으로 넘어가고 달동네에 방 한칸을 겨우 구해서 몇 식구가 한방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기를 수개월째 드디어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시신이 놓여 있는 옆에 한 작은 종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아주 짤막한 그의 유서였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문은 닫혀 버렸다. 어디를 가도 열려 있는 곳이 없다. 사방이 다 막혀 있다. 여보, 미안해. 하지만 이 길밖에는 내게 열려 있는 문이 없구려. 얘들아, 이 아빠를 용서해 다오.’ 이것이 그의 유서 내용 전부였습니다.
어느 인생이라서 닫힌 문이 없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과연 닫힌 문이 없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닫힌 문이 있을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때로 우리는 기대에 부풀어 계획을 세웁니다. 목표를 세웁니다. 출발이 너무나 좋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순풍에 돛단 듯합니다. 그러나 때로 아무 경고도 없이 폭풍우는 불어 닥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기대했던, 우리 앞에 그렇게 활짝 열려 있던 문은 아무 말 없이 “꽝!” 닫혀 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생의 닫힌 문을 열고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사방에 문이 꽉 막혀 버린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다름 아닌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지난번에 1차 선교 여행 때 큰 상처를 안고 이제 실라와 함께 자신이 가려고 했던 사역지를 돌아보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본래 제2차 전도 여행의 목적은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에서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들을 만나보고 그들을 통해 세워진 어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려함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여유가 있으면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소아시아 지역으로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행15:41을 보십시오.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행16:5을 이어서 읽겠습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 가니라”
그런데 본문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급변합니다. 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바울은 무시아 지역까지 오게 되었고 다시 소아시아 북동쪽 비두니아로 진출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그것도 용이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6-7절의 상황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허락지 않으셨다’ 이 단어는 ‘칼로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 원어적인 의미는 ‘잘라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이들 일행이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그 길을 잘라 버리신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어디를 가든 길이 막히는 것을 쓸 때 이 단어가 쓰여 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이 준비한 길을 가려고 애를 씁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길은 가야 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하나님!”하고 애를 썼는데 성령께서 그 길을 막아 버리십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할 수 없이 드로아에 돌아와서 마게도니아, 오늘날의 유럽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인생 앞에 다가오는 닫힌 문들을 우리가 어떻게 아름답게 지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 일행에게 사방의 모든 문이 닫혀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몇 가지를 말씀하기를 원하십니다.
1.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세계역사를 바꾸어놓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선교 역사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열어 놓은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는 사건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 가고자 한 것은 돈을 벌거나 자신의 육신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나 어떤 세상 적인 목적을 위해서 가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가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바울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과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이 다릅니다. 사55:9절에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리고 잠 16:9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자기 기준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준들은 자기에게 유리하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맞추어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 앞에 내 모든 기준을 내려놓는 결단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를 통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과 같은 방향에 맞추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기가 막힌 계획을 짜 놓아도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으면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고 팔려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있는 것인가, 아니면 순전히 나의 생각인가? 지금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그것을 내어 맡기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고 하면서도 수없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에 내 삶을 맞추지 않고 내 생각대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선 하나님의 생각은 원대하고 넓고 미래적이고 비전과 뜻이 있고 사랑이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오늘 여기에, 현재에, 내 이익, 내 입장에 집착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닫힌 문 앞에 서면 좌절합니다. 이것은 불행 중의 불행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인생의 닫힌 문을 아름답게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인생의 셔터가 내려졌을 때에 그 앞에 주저앉아 좌절하지만 말고, 내가 너에게 말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거라.” 하나님은 괜히 우리의 길을 막아서시지 않습니다. 사도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이 괜히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들을 향해 뭔가 하실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2, 우리가 어떻게 인생의 닫힌 문을 지나갈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 인생의 문이 닫힐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여기 환상을 보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 동안 자신의 선교지에 대해 많은 연구와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 앞에 자신의 계획과 의지를 겸손하게 내려놓습니다. 10절에 보면 우리가 두 가지 관심을 가져봅니다.
하나는 바울이 환상을 본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환상을 본 후에 곧, 바로 떠나려고 힘썼습니다. 곧 바로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환상 본 후에,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서 준비하고 제 할 일 마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곧 바로 떠났습니다. 때때로 성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은퇴 후에, 이번 일을 마치고, 이런 저런 교회일 좀 하고 싶다'는 얘기 종종 듣습니다. 목사로서야 반가운 소리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정말 주의 일 하는 것은 은퇴까지 기다려야 하고 자신의 일을 마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 있을 때,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는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에 대하여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해석했습니다. 마게도냐가 지금 어디인지 아십니까? 지금의 유고지역입니다. 유고 슬라비아는 여러분도 아시지만 내전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다 파괴가 된 아픔의 현장입니다. 아마 당시의 마게도냐 역시 이와 버금가는 영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꺼이 마게도냐에 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게도냐와 크게 다를바 없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 믿는 성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세상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십니까? 때로는 경제적으로 때로는 영적인 외로움을 호소합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도 예수가 필요해서 "우리를 도우라"고 소리지르며 손짓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라"는 음성이 들리십니까?
지난 7월 27일에 출발해서 8월 2일 6박7일의 러시아 사역을 은혜 가운데 잘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 그리고 철야와 기도의 불을 계속 지펴 주셔서 아무 사고 없이 다녀오게 됨을 먼저 인솔자인 제가 교회 앞에 대신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선교는 우리 청년들로 하여금 우리 역사의식과 또 문화 사역 그리고 복음 사역의 분야를 가지고 몇 군데 사역지에서 예배와 그리고 현장에서 섬기시는 선교사님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청년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 일행을 자신의 가족처럼 돌보아 준 여러 선교사님들의 헌신과 사랑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과 대화 속에서 하나 같이 느끼는 것은 선교지 현장은 어느 누구 예외가 없이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현장임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와 문화가 다르더래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복음이 아닙니까? 예수를 통해 그들이 새 생명을 얻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이 일이야 말로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한 사람의 잃은 영혼을 찾기 위해서는 밤바다에 표류하고 있는 난파선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하는 영혼의 절규하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번 세월호의 사고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도 바다 속에 침몰되어 있는 그 배안에 살아 있는 분들이 울부짖는 그 음성이 아마 가족에게는 뼈속까지 들려 올 것입니다. 우리 역시 곳곳에서 부르짖는 영혼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영혼을 결코 살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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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도 사탄이 그저 제철을 만난 듯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영적 어두움이 우리를 덮으려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영혼들이 겉은 멀쩡한데 영혼이 병들어 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는 절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만이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어느 성도의 간증입니다. 한 회사에 20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그 회사는 20년 정도 근무하면 지방에 가서 3년 동안 지사에 가서 근무하는 게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직원들이 제일 선호하는 지사가 제주 지사였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3년 동안 올레길도 마음대로 걷고 바다낚시도 하고 공기도 맑고 등산도 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모두가 다 원했어요. 이 김 집사님은 분명히 자기 정도면 제주 지사에 갈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거기 갈 준비를 하고 아이들 전학도 생각하고 자기가 가서 살 집도 알아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3년을 지낸 곳은 그 경치 좋은 제주도가 아니라 강원도 영월 지사에 발령이 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떻게 그는 제주도가 아닌 영월에 가서 3년을 보내야만 했을까요? 혹시 영월에 감자가 맛있기로 유명해서 그것 때문에 거기로 갔을까요? 아니면 영월에 고시동굴이 유명해서, 아니면 단종이 죽은 장릉이 거기 관광지가 있어서, 왜 그곳으로 갔을 까요?
이분은 그토록 원하는 제주지사에 못가고 강원도 영월에 가야했을까. 처음엔 이유를 몰라서 이젠 회사를 그만 둘려고 까지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낙심되고 슬프고 버림받은 것 같은 비참함이 들었습니다. 마지 못해 갔는데 주일날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산 밑에 시골에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갔더니, 나이 많은 전도사님이 교회를 목회하고 계셨습니다. 보니깐, 교회학교가 없어요. “왜 교회학교가 없습니까?”, 아 젊은 교사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때, “할렐루야, 내가 서울에서 20년 동안 교회에서 교사했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 있구나.” 그래서, “전도사님 제가 이제 주일학교를 만들겠습니다.”
개척자가 되었어요. 3년 동안 열심히 전도해서 아이가 한 20명이 모였고 그들에게 열심히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평신도 선교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3년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가 보니까 우리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볼 때는 망하는 것 같은데, 인간이 볼 때는 안 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흥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복을 주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문을 닫으실 때 다른 문이 열릴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역사의 연구’를 쓴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오늘 본문을 읽고 그는 외칩니다. - 드로아에서 바울을 태우고 마게도냐로 가고 있었던 이 이름 모르는 조그마한 배가 바로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배였으며, 유럽의 문명사의 미래를 안고 가던 배였다고 증언합니다. 유럽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유럽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유럽과 서구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길이 막혔다고 그래서 이제는 끝이 났다고 절망하고 낙심하지는 않습니까?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임을 믿습니까? 저 옛날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지만 또,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간 것은 사실입니다. <span style="font-size: 12pt; mso-fareast-font-family: 바탕;">그러나 분명 그것은 절망이고 끝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은 노예보다, 감옥보다 더 큰 은혜 주셔서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하시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도, 현상수배범으로 10년이 넘는 긴 세월을 광야에 숨어 다니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살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피난살이를 함께 아둘람 굴에서 만난 6백명의 용사로 나라를 세우는 기초를 세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이 위기 앞에 어떻게 바울은 이 위대한 선교의 물꼬를 털 수가 있었던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을 분별 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진 생각을 빨리 포기 할 수가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인간의 끝을 하나님의 시작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으면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 즉시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꺾고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때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말씀을 따릅시다.
지금 좀 힘이 들어도 그리고 더 이상 앞이 안보여 주저 안고 싶어도 이것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독생자인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 이 은혜가 있는데 왜 포기하시나요? 왜 주저 앉아 방황하시나요? 이제 이 무더운 여름 기도의 그늘 아래 머무십시오. 말씀의 그늘 아래 머무십시오. 그리고 주의 음성을 듣고 일어서십시오. 반드시 또 다른 예비하신 하나님의 기막힌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이 주의 은혜가 늘 동성의 성도 여러분들 위에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