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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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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9-3 영적싸움의 한 복판에서 (행17:1-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09-03 | 조회: 1201


 

요즘 북한이 핵을 장착해서 미국까지 쏠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로 인해 지금 전 세계가 많은 걱정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북한이 오판하여 이 핵을 장착한 미사일을 쏜다면 그 후유증을 상상을 하기 어려울 정도가 될 것입니다. 어느 군사 전문가가 이야기를 합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6.25때 사상자가 500만이상이 되었고 국가 자체의 존립이 어려울 정도로 피해가 컸는데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더 엄청난 상처와 고통이 일어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또 내부적으로도 국회에 입법화를 추진하는 소수 인권법 안에 동성애법이라든지 난민 보호법은 상당히 차별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잖습니까? 여기에 따르는 위험요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전쟁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크게 둘로 나누면서 전쟁기간전쟁 준비기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가장 먼저한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맙니다. 그 후로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해 왔습니다. 전쟁이 아닌 기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전쟁을 치러왔습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전쟁도 있는가 하면,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그리고 패자를 다스립니다. 전쟁을 통해서 주어지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목숨을 건 전쟁을 불사합니다.

 

성경에서도 신앙생활을 전쟁에 비유하곤 합니다. 6: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씨름은 곧 전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악한 영,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지금 사도행전을 보면서 이 영적 전쟁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보여 줍니다.

 

오늘의 본문 이야기는 바로 이런 영적 전쟁에 관한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뒤에 데살� 灌構》� 온 바울은 능력 있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때 야손이라는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집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7:4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엄청난 역사입니다. 예수를 전혀 모르던 사람이 그것도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행 17:5절을 보면 아주 복음을 더 이상 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당시 집회 장소였던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박해를 하는데 불량자들을 동원하여 소동을 부립니다즘 말로 하면 깡패들을 동원하여 집회자체를 못하게 만들고 예수를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이런 상황 속에 누가 선뜻 믿겠다고 나서겠습니까? 그것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물며 복음을 전한지 3주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런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입니까? 불과 3주의 짧은 기간 동안 제대로 증거도 못한 채, 마치 광야로 피신한 만삭이 된 여인이 아이를 낳고 탯줄을 짜르고 아이를 광야에 버려두고 간 그런 모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난히 환난이나 고난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살전1:6절에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많은 환난 속에 있었다. 살전2:2절에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살전2:14절에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3:7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이 영적싸움에서 더 이상 일어설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상상하지도 않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불량배까지 동원하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극심한 핍박을 했던 데살로니가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전1:8절에 보면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향한 그 교회의 믿음에 대한 소식이 광진구 지역 뿐 아니라, 서울과 전국에 널리 퍼져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이 닮아가려고 하는 믿음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와 이 교회 속한 성도들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지도자의 열정입니다. 본문과 연관 된 살전 2:17-18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했습니다. 여기 바울은 광야에 버려 둔 것 같은 성도들에게 목숨을 버릴 각오로 데살로니가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막습니다. 살전3:1-2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여기 우리가 참다못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염려 때문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모데를 보내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이 어린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돌봐주기 위해서 디모데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습니다. 바로 약육강식’(弱肉强食)입니다. 약한 자의 살을 강한 자가 먹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한다는 말입니다실제로 동물의 세계에는 잡아먹는 포식자가 있고, 잡아먹히는 피식자가 있습니다. 사자와 같은 맹수들은 잡아먹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끝없이 사냥에 나섭니다. 이에 비해 누우나 영양과 같은 초식동물들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늘 긴장하며 포식자들을 경계합니다그런데 성경을 보면 영적 세계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벧전 5: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믿는 자들의 대적인 마귀가 마치 굶주린 사자가 먹이감을 찾아 두루 다니는 것처럼 공격대상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사탄 마귀는 믿는 성도들을 공격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마치 굶주린 사자처럼 공격대상을 찾아 믿는 성도들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영적으로 깨어서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약자들의 생존노력입니다. 약육강식의 원리 속에서 약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이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보살핌입니다. 동물들은 포식자들로부터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물소 떼를 보면 힘센 수컷이 무리를 이끕니다. 사자가 나타나면 대장 물소가 앞으로 나섭니다. 그리고 수컷들이 무리를 에워쌉니다. 그 뒤로 암컷들이 둘러서고 그 안에 새끼들을 숨깁니다. 포식자들로부터 연약한 새끼들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에게 소중한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리더들은 믿음이 어린 성도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여기에 대한 데살로니가 성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았습니다. 살전2:13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 하느니라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이는 여기 성도들이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예수를 전했습니까? 우리가 읽은 3절입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證明)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여기 내용이 무엇입니까?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십자가는 단순한 사형 틀이 아니고, 바로 나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열쇠이기 때문에 이것은 개인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부활]이었습니다.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인간은 죽음의 문제로 고통을 당해왔고, 이것을 해결하려고 하였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왕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누구인가 왕으로 섬기고 있고, 그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자기가 왕인 사람도 있고, 타인이 왕인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오직 가이사 만이 왕이었고, 다른 왕을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리와 읍장들이 소동한 것은 바울과 실라가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고, 영적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철학적인 이야기나 해박한 이론이나 심리 분석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진정한 부흥의 시작은 말씀의 회복에 있습니다.

 똑 같은 말씀을 받는데 어떤 사람의 인생은 변하고 어떤 사람의 인생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이 능력이 없어서 일까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예배 시간에 청중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늘 말씀이 들립니까? 그러면 당신들은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 들립니까? 심판의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인생을 흔히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냥 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캄캄한 밤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캄캄한 밤길을 가노라면 위험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위험한 것은 올바른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도시에서야 표지판도 있고 등불도 있어서 괜찮지만, 시골길이나 산길을 가게 되면 늘 다니는 사람이 아닌 경우 정말 당황하게 됩니다. 안개까지 끼면 문자 그대로 오리무중입니다.

 

부끄러운 기억입니다만, 수년 전 제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기도원에서 설교 요청이 있어서 찾아 간 적이 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밤늦게 나오는데, 주최 측에서 에스코트 안 해줘도 되겠냐고 묻습니다. 큰 길까지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폐가 될 것도 같고, 밝을 때지만 그래도 찾아 들어왔는데 돌아가는 게 뭐 그리 어렵겠나 싶어 사양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기도원을 나서자마자 칠흑같이 캄캄합니다. 가로등도 없고 표지판도 없고 길은 여러 갈래이고 ... 지레짐작으로 가는데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습니다. 더듬거리며 한 2,30분 갔는데 자세히 보니 다시 그 자리입니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한참 헤매다 길을 찾기는 했지만 혼났던 기억이 납니다. 어두운 밤길을 찾아간다는 게 이렇게 어렵습니다 .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의 길은 이와 같이 뱅글 뱅글 돌다가도 나중에 찾아갈 수 있지만, 인생은 단 한 번뿐인지라 길을 한 번 잘못 가면 인생이 휘청거리고, 심한 경우 쫄딱 망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승리하려면 마치 어둔 밤길에 등불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인생길을 비춰줄 등불이 꼭 필요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그 등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입니다. 119:105절을 보십시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인생길에 빛이 되고 등불이 된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을 가지고 말씀과 더불어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고 보증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 위에 바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말씀 없이 이루어진 부귀영화는 사상누각 - 모래 위에 세워진 집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잠시 복음을 증거 했지만, 이들은 그 말씀을 붙잡고 삶에 적용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 열매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앙생활의 3각대와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겸비되어 있습니다. 같이 해볼까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입니다. 이 세 가지의 특징으로 인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짧은 시간 안에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본이 되는 모델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데살로니가라는 한 도시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주위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결코 식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깡패를 동원하고 믿는 사람들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현대 번역에서는 [세상을 소란케 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사실 신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가슴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속에 은혜를 받으니까 힘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예수 생명의 힘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을 살 수 있게 하는 힘, 벌떡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내 자존심을 살려주는 힘이요, 절대로 기죽지 않게 하는 힘이요, 비틀 거릴 때마다 붙들어 주는 강한 손이요,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는 힘이요,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서 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까이 나아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붙들고 그분의 그 놀라운 사랑을 내가 마음에 다시 한번 체험할 때 힘이 생깁니다. 이 힘이 오늘 여러분에게 있나요? 이 아침!! 이 힘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너 인생의 짐이 무겁다고? 나는 너 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세상을 살았어!! 그러나 다 지나는 거야! 나중에 내가 너에게 안겨줄 하늘의 영광은 세상의 고난과 비교가 안돼!!”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주님이 주시는 이런 음성을 듣는다면 힘이 안 생길까요? 내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구나!! 하나님 이 나를 이렇게 소중하게 보시는구나!! 그러면 나는 절대 시시하게 살 수가 없어!‘ 지금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하나님도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지 않습니다.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이런 자아의식을 가질 때 힘이 안 생기겠어요? 오늘은 고생할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에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할 것입니다. 오늘 살아계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어 그거 생각하면 힘이 안 생기겠습니까? 그렇다면 절대 인생을 시시하게 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세요!! 세상에 섞여서 즐기고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과 같아집니다. 덴마크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엘케고르의 유명한 예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야생 오리 한 마리가 날아가다가 집에서 키우는 오리 떼들을 발견하고 내려와서 함께 오리 우리에게 살게 되었습니다. 몇 달 동안 주인이 주는 것을 잘 먹으면서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야생 오리들이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자기도 본래의 자기 무리인 야생 오리들에게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날으려고 하는데 이것이 왠일입니까? 집에서 키우는 오리들과 함께 살다보니 땅에서 걸어만 다녔기 때문에 뒤뚱거리기만 했지 날개에 전혀 힘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늘을 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이 그런 하늘을 날지 못하는 야생 오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음 한 주간이라도 복음으로 세상을 어지럽게는 못할 망정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를 알려서 작게 남아 복음 증거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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