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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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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9-11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행17:16-23)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09-10 | 조회: 1215

 

1963828일 미국에 있는 전 흑인들은 워싱턴을 향해서 대대적인 평화 행진을 거행했습니다. 이날 한 흑인 목사가 워싱턴 광장에서 거기 모인 흑인들을 향해서 아주 유명한 한편의 연설을 했었습니다. 그 연설의 제목이 ‘I have a dream’ 이었습니다. 그는 그 연설을 통해 전 미국 그리고 전 인류를 향해서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일이 없어야 될 것이라는 공헌을 세웠고 그 다음해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지금부터 55년 전에 한 흑인 목사가 꿈꾸었던 그 연설은 이렇습니다.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 노예후손들과 노예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지금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는 곳이 평탄케 되며 곳곳이 평지가 되며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을 당한 마틴 루터킹 목사의 설교의 한 부분입니다. 50년대와 60년대에 소망없이 살아가던 흑인들에게 소망의 빛을 안겨주었고 흑인뿐만 아니라 미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며, 용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던 위대한 삶의 메시지였습니다. 도저히 이 꿈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는데 이제 그의 기도가 미국인들에게 실현되었습니다. 미국은 흑인 대통령을 배출했고, 이제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로 움직여가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55년 전에 워싱턴 언덕에서 외쳤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설교가 세상을 바꿔놓은 것처럼 오늘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피를 토하듯 외쳤던 바울의 설교를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빠져 나온 바울은 베뢰아를 거쳐 이제 마게도냐의 최고 도시인 그 유명한 "아덴"에 오게 되었습니다. 아덴 즉 아테네는 당시 사양길에 들어서고 있기는 했지만 유구한 전통에 빛나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답게 최고 수준의 철학과 수사학, 문학과 과학으로써 여전히 그 명성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및 군사적으로는 당대에 아예 적수가 없었던 로마제국조차 문화적으로는 이 헬라의 전통에 굴복당하고 흡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잘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제일 먼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때문에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즉시 "회당"에서 전도를 시작했으며 또한 "저자" 즉 저 유명한 '아고라 광장'에서도 노방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바울은 그 당시 아덴에서 최신으로 유행하고 있던 두 대조적인 학파의 철학자들을 만나 "쟁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비구레오" 철학자란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들은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것을 사람의 최고의 덕으로 여겼던 '쾌락주의자'였습니다.

반면에 "스도이고" 철학자란 저 유명한 '스토아 학파'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감정보다 의지를 앞세움으로써 사람이 자기 욕망을 억누르고 선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금욕주의자'였습니다. 이처럼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철학이 당시 헬라 철학의 양대 산맥인 동시에 또한 최신의 철학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자라는 우월의식을 가진 자들입니다. 바울을 어떻게 대합니까?

 

바울을 "말장이"라고 깔보지 않습니까? 즉 참새처럼 이말 저말 주워듣고 지껄이는 사람을 가리켜 얕잡아 하는 말입니다.  아테네 철학자들은 바울을 시장 바닥에서 떠드는 개똥철학자 쯤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 '잡신을 전하는 자'라고 얕잡아 본 것은,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당대 최고 수준의 철학에 대한 교만심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헬라 철학자들은 바울을 본문에 나오는 "아레오바고"라는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것은 아덴시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한 집회 장소로서 아테네 시민의 공적인 회의와 토론이 이루어지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이 아레오바고는 아덴시의 재판소이기도 했는데,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가 501명의 아테네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으로부터 유죄판결과 사형언도를 받은 곳도 바로 이 "아레오바고"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계 최고의 철학의 도시에서 당시 지성이라고 일?는 현장에선 바울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아무리 복음을 위해 살아온 바울이지만, 이 낯선 환경은 낭만적인 현장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에 불과한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이름 없는 시골 동네에서 출발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처럼 큰 무대 '아덴'에서 문자 그대로 세계 최고를 상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도저히 '게임도 안 될 일'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대강당에 노벨상 수상 경력들이 찬란한 대 석학들만 가득 모여 있는 가운데 연단에 올라서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면, 아마 모르긴해도 입이 얼어붙어 버리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교만과 아집이 버무려 있는 당시 지성인들이 모인 이 도시 한복판에서 그는 외칩니다. 사도 바울도 신자가 되기 이전에는 유대 사회에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수재 중의 수재였으므로 헬라 철학에 대해서도 정통한 학자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보통 회당에서 유대인들을 전도할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 성경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지만, 이 헬라인들 앞에서는 바로 그들이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던 '온 세계'를 소재로 전도를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를 못박은 세상에서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그 은혜 앞에 서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 먼저 그들을 향해 종교성이 많은 자들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22-23절에 보면 유명한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이것이 바로 아덴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아테네라는 도시 명 그 자체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아테네라는 말은 지혜의 신이요, 학문의 신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바울은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 보면 그들이 얼마나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모든 신을 다 인정하는 범신론자였던 헬라인들은 혹 그들이 섬기는 신들 중에 실수로 빼 놓은 신이 있을까 염려하여 특별히 그런 제단까지 세웠습니다. 즉 자기네들이 잘 모르는 다른 어떤 민족이나 지역의 신에게서 받을 복을 놓치거나 혹은 그 노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소위 '무명의 신'까지 섬겼던 것이었습니다. 네로 시대에 아테네 광장에 서 있던 공중 우상이 300개였고, 기타 신상들은 3만 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페트로니우스는 아테네 거리에는 사람보다 신이 더 많다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아테네와 고린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귀신에 매여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2. 바울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철학이 아닌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방금 읽은 18절은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와 부활>을 전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가 복음이 아닙니까? 부활의 소식이 복음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그는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예수의 부활로 인류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철학으로 죄 문제에 대한 해결을 보았다고 고백한 사람이 있었나요? 철학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고 간증한 사람이 있었나요?

 

여러분 바울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시다시피 그는 누구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운 핍박자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가 어떻게 변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참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고 유대전통과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성장했기에 헬라의 문화와 철학, 그리고 로마의 정치와 법에 익숙한 ?을 살았습니다. 또 그는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시민권을 돈으로 사기도 했지만 태어나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말은 대단한 가문의 배경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당대 석학으로 알려져 있는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성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과 신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앞장을 섰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일에 모든 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예수 믿는 사람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러한 열심은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이처럼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생을 송두리째 변케 한 사건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이 가졌던 세상적인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 온갖 고난, 수모를 겪었습니다. 결국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순교를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바쁜데도 불구하고 아산에서, 포천에서 수원에서 이곳 저곳에서 오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신 분들이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여러분, 이어령 교수를 잘 아시지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요 무신론자의 대부라고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지금까지 성경을 수없이 많이 읽었습니다. 물론 한국 최고를 자랑하는 지성을 가지고 성경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무신론자였고, 성경을 읽더라도 비판적으로 읽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딸의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772470이 넘은 나이에 세례를 받고 그의 인생의 방향이 무신론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완전히 전환 되었습니다. 그분이 얼마 전에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습니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의 삶이 지성을 추구하는 삶이었다면, 70세가 넘어 시작된 지금부터의 삶은 영성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죽음과 절대적 고독 앞에서는 영원히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오직 하나, 하나님을 영접하는 데 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최고의 지성인이 자신이 가진 지성으로 하나님을 발견한 것 아닙니다. 지성은 그것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지성으로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지금 바울은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영적 싸움을 합니다. 이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자기 앞에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을 보고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이 언덕에 서서 외친 것입니다.

 

3. 성도 여러분, 32절부터 34절에 보면 바울 사도의 복음의 증거에 대하여 아덴 사람들은 정확하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 반응을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선 32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무슨 말입니다. 첫째 유형은 조롱 혹은 야유로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둘째 유형은 오늘 우리 식 표현으로 하면 결신 보류입니다. 좀 더 생각해 보고 좀 더 연구해 보고 좀 더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 제가 40년 전에 예수 만나고 너무 기뻐 전도했더니 응답이 생각해 보고였습니다. 최근에 다시 만나 전도했더니 지금도 생각해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아덴의 희망은 세 번째 유형의 반응을 보인 사람들에게서 시작됩니다. 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이 몇 사람-그들이 바로 아덴의 희망의 불씨였습니다. 아덴이 변화되기 위해 반드시 수천의 사람들이 한 순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몇 사람이면 됩니다. 한 나라의 변화, 한 도시의 변화, 한 일터의 변화는 언제나 몇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몇 사람이면 족합니다. 여러분! 이들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함께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누가 이들의 앞길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20%가 넘는 숫자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의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잠재된 빛의 기능이 있고, 소금과 같은 맛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왜 세상 앞에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까? 저는 그 원인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부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렉산더가 4만의 군대로 이수스에서 당시 40만의 다리우스 군대를 쳐부순 것도, 중국 공산당 의 초기멤버인 정강산의 23인의 동지가 장개석의 국민당을 제압하고 10억 중국을 접수할 수 있었던 비결도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그들이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는 세상의 기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 보혈의 능력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영광과 능력과 권위는 초대 교회 교인들의 헌신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글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입은 절대적인 헌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변화의 역사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보고 낙심만 하지 하십시오. 우리가 바로 되면 세상이 바뀝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예수를 못박은 세상 앞에 외치는 저 피의 복음은 생명을 잉태했습니다. 작은 겨자씨처럼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복음은 유럽을 변화 시키고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아침!! 우리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은 바뀝니다. 진짜 예수를 만난 변화를 우리가 세상에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세상은 바뀝니다. 기도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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