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인생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09-11-08 |
조회: 2215
목마른 인생 요4:14-15. 2009.11.8 태신자 초청 주일
오늘 저희 교회 터치 153 새 생명 축제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걸음이 인생의 강장 값진 걸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해바라기 그림으로도 익숙한 네덜란드의 화가 '반 고흐'가 있습니다. 그는 목사 아들이었습니다. 화가가 되기 전 벨기에의 한 조그만 탄광에서 말씀을 전하며 광부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어느 날 고흐의 눈에 노동자가 입고 있던 옷이 눈에 띄었습니다.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만든 옷이었는데, 등 쪽에는 본래 쓰여 있던 문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니 취급에 주의할 것' 여느 때 같으면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갑자기 감전이라도 된 듯한 동안 깊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렇다. 인간이란 정말 깨어지기 쉬운 존재구나. 나는 전도자라고 하지만 얼마나 자주 깨어지는가.‘ 옆에 분들하고 함께 인사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참 깨지기 쉬운 존재가 옆에 계시군요.‘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찮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수가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녀가 대낮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왔습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매우 드문 행동입니다. 중동 지방에서는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이는 대낮을 피하여, 대부분의 여인들이 새벽이나 저녁에 물을 길러 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불볕더위를 무릅쓰고 대낮에 아무도 없는 우물가에 혼자서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 이유는 내리 쬐이는 뜨거운 햇빛보다 사람의 시선이 더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여인은 아픔과 사연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기에 사람들을 피하여 그것도 태양이 작렬하는 그 햇빛을 그대로 받아가며 물 한 동이를 얻기 위해 가야합니까?
1. 이 여인은 무엇보다 소외된 고독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여인은 6절에 보면 제 6시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나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시각으로 6시면 낮 12시 정오입니다. 사막지대에선 가장 더운 시각 아무도 우물가에 나오지 않는 시간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었습니다. 그녀는 고립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바로 우리 시대의 삶의 풍경이 아닌가요? 한 아파트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를 모릅니다. 이웃집에서 살해당한 쌍둥이 아기가 비닐에 싸인 채 냉동고에 방치되어 몇 달을 지나도 알 수 없는 시대입니다. 이웃이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이해한다 하더라도 스스로도 문을 닫아걸고 이웃을 외면해 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립되어 버렸고 우리는 뼈 속까지 스며온 춥고 떨리는 외로움을 당연한 존재의 모습으로 수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물질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만 있으면, 참 행복할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만, 요즘 보세요. 두신 그룹의 전 회장의 자살 소식, 그리고 지난 5월 이 나라의 대통령을 지냈던 분의 자살이라든지, 인기 연예인들이 자살하는 모습을 보면, 참 허무하지 않습니까? 고인들이 남긴 유서를 보면 그가 당한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됩니다. 목을 매고, 투신하며 약물 과다복용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면에는 무서운 고독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고독감을 잠깐 동안 잊어버리기 위해서 엉뚱한 데 마음을 쏟는 것을 봅니다. 잠깐 기분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쇼핑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고, 영화관을 드나들기도 하고, 스포츠에 열광하기도 하고, 게임, 여행, 오락을 하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사치하고, 음주하고, 탈선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를 하면서 어떻게 든 인생의 고독을 잊어버리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을 봅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 사회를 가리켜 음모집단이라고 말했습니다. 곧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으로 보기에 온갖 화려한 것들로 사람들의 안목을 가려놓고 속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잠깐 기분전환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인생의 고독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 여인을 보세요.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웠을까요?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을 무려 다섯 번이나 바꾸어 버렸던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여인을 보고 능력 있는 여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남자가 얼마나 못났으면 여자한테 다섯 번이나 바뀌는 중에 한 남자가 됐을까 얘기하지만, 어쨌든 한명의 남편과 사는 것도 힘든데 다섯 번이나 바꿀 정도면 그녀 인생에 깊은 갈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물음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한 것은 이 여인이 지금 얼마나 고독하게 지나고 있는가를 절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금 그 남자가 곁에 있기는 하지만 자신을 이해하고 품어줄 남편은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외롭다는 말입니다. 고독하다는 말입니다. 혼자이다라는 말입니다.
2. 상처난 인생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는 요청에 줄 수 있다/ 없다하면 될 것인데 이 여인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9절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얼마나 공격적입니까? 그 안에 뿌리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상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 인생이란 무엇인지 아세요? 자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이웃을 믿지 못하고 이웃에 대하여 공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웃들이 평범하게 던지는 말도 순수하게 받지 못하고 늘 불만투성이의 말을 쏟아 넣습니다.
상처는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상처는 치료하지 않으면 그 상처에서 고름이 나옵니다. 상처는 치료하지 않으면 몸을 썩게 만듭니다. 육체의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의 상처입니다. 육체의 상처는 치유하지 않으면 심한 고통을 동반하기에 즉각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육체의 상처와 달리, 바로 조치를 취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미루다가 더 큰 고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깊어지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지 않은 채 두면 마음에는 쓴 뿌리가 자라게 됩니다. 잘못하면 절제력을 상실한 채 분노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됩니다.
3. 목마른 인생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과 물 길러온 이 여인과의 대화에서 제일 흥미로운 대화의 역전은 “물 좀 달라”던 예수님이 갑자기 이 여인에게 “네가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내게 오히려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네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목마른 인생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인을 바꾸고, 파트너를 바꾸고, 직업을 바꾸고, 직장을 바꾸고, 종교를 바꾸고 심지어 교회를 바꾸어 봅니다. 그래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방황입니다. 끝없는 목마름, 타는 목마름으로 허덕이는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어떻게 보면 이 땅에 희망을 두고 살 수 없는 여인, 마지못해 남의 이목을 피해 더운 태양의 그 작렬한 햇빛을 받으며 물을 길로 온 이 여인에게 70km나 되는 예루살렘에서 다가오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신데이 여인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이 이 여인을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었습니다. 4:4을 읽어 보면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당시 사마리아 인들을 경멸하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땅을 반드시 통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물가에 먼저 도착하여 이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만남이 우연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초대받아 오신 것이 우연일까요? 만일 여러분을 만나시고자 그분이 오늘 여러분을 이곳에 오게 하시고 지금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 앞에 솔직하시겠습니까? 내가 무척 외로웠다고--그동안 인생의 상처로 많이 아팠다고--목말랐다고--고백하시겠습니까? 내게 이제 주님이신 여러분이 필요하다고--주께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그렇게 구하시겠습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 말입니다. 성경은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 이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지금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님 앞에 오십시오. 지금 오십시오. 지금 결단하십시오. 지금이 여러분의 변화의 기회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자서전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한두 권의 자서전은 다 읽어보셨을 겁니다. 자서전이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진솔하게 써 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중에 프랜시스 탐슨이라고 하는 사람의 인생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쳐 왔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의 인생이 상당히 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일찍이 목사로 만들려고 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공부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맙니다. 그러자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가 다시 그를 설득해서 의대를 지원하게 했습니다. 의사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중단해 버립니다. 결국 그는 런던 시내 한가운데 노숙자가 되어 버리는데, 거기서 마약을 하고 성냥과 신문을 팔며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급기야는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생활을 하며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순간 순간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그의 재능을 윌프레드 메이넬이라는 한 출판사 사장이 발견하고 그를 돕기 시작합니다. 병원에 데리고 가서 마약을 끊게 만들고, 사랑으로 용납하고 품어주며, 인내하며 그를 결국 문학가의 한 사람으로 올려놓습니다. 그가 훗날 유명한 시집(詩集)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집의 제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천국의 추적」, 재미있는 제목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합니다. 사냥꾼을 주제로 한 '헌터'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사냥꾼이 얼마나 끈질기게 인내하며 동물을 쫓아가는지, 그리고 사냥을 하면서 동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영화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아름답게 그려 놓았습니다.
그가 왜 그 시집에서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했을까? 그는 새사람이 되어 어느 날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집요하게 추적하셔서 기어코 자기를 변화시킨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자신이 잘나서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의 자기를 만든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음을 깨닫고 그 은혜를 자신의 책에 썼으며, 그 제목을 「천국의 추적」, 이 얼마나 멋있는 제목입니까?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을 축복해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마름의 문제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의 우물물은 아무리 깊이 들어가서 신선한 물을 퍼서 마신다 할지라도 목이 다시 마르지만, 주님이 주시는 living water, 생수를 마시는 자들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예수는 누구이신가? 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 고립되고 상처 나고 목마른 인생을 이렇게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영생을 물로 표현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몸의 70%가 물로 되어있습니다. 물은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게 아니라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살수가 없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영생을 얻지 못하면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대해 표현하기를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분명하고 변함없고 확실한 미래는 죽음입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도착하는 최종적인 목적지이며 운명입니다. 죄값을 치러서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라는 말은 선물(gift)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는지 안다면 네가 지금 나에게 달라고 그랬을 것이다……. 인생이 갈급합니다. 인생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죽음이고 심판입니다. 이것으로 내 인생이 끝나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끝날 인생으로 두지 않고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데 그 선물은 영생이며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신 선물입니다.그러면 이 영생을 우리가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세주로 맞이하여 그 분을 인정할 때 영생함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신 사람입니까? 정말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예수의 생수를 날마다 맛보면서 사는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처럼 돈은 없어도,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어도, 마음은 항상 천국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분들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갈증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계신분이 있습니까?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갈증 가운데 사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한 분들은 이 시간에 사마리아 여인처럼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생수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를 잡으시고 여러분의 고통과 문제를 기쁨과 평강으로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생수이신 예수님을 마심으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신 분들이라면 십자가의 복음으로 세상의 헛된 장벽들을 허물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 한번 나의 이 소중한 인생을 잘 가꾸어가는 행복한 인생으로 살아가 보지 않으시렵니까? 기도하십시다. 아-멘
← 목록으로 돌아가기